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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세계노동절 100주년 기념 투쟁
시기 : 1989년 4월 29일 ~ 5월 4일 1989년은 역대 독재정권에 빼앗긴 메이데이가 42년 만에 자주적·민주적인 노동운동진영의 대중적 투쟁으로 부활한 해다. 정부는 노동절을 1959년부터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로 바꾼 데 이어 1963년부터는 명칭을 ‘근로자의 날’로 했다. 그러나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부단한 투쟁으로 성장한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빼앗긴 메이데이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지역과 업종을 넘어 단결한 노동자들은 전국노동법개정및임금인상투쟁본부(전국투본)를 구성해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를 치른 뒤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전국회의)를 결성했다. 전국회의는 1989년에 드디어 한국전쟁 이후 단절되었던 5월 1일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은 현대, 풍산, 지하철, 금성 등 대기업에서 일찌감치 불붙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전국회의(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와 전국투본(전국노동법개정및임금인상투쟁본부)을 중심으로 지노협·업종협은 이러한 투쟁을 보다 조직적·체계적으로 지원하고, 나아가 노동악법·반민주악법 개정 등 노동자대중의 요구를 투쟁으로 조직했다. 이는 노동자대중이 사회 건설의 주역으로서 생활 개선은 물론 정치의 주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고, 구체적으로 공동임투의 성공적 수행과 노동조합 전국조직 건설의 도정이었다.
1989년 노동절투쟁의 준비
전국투본은 100번째 세계노동절 투쟁의 의의와 목표를 △전노협 건설의 실질적 토대 구축 △노동자대중과 민중들의 연대의식 제고 △노태우정권의 노동운동 탄압 음모 저지로 설정하고 정권과 독점재벌의 탄압에 전투적으로 맞서기로 했다. 또한 4.30대회에 전국의 민주노조가 서울로 총집결함으로써 전노협 건설의 자신감을 다지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세계노동절 행사는 대회위원회를 통해 진행됐고, 대회의원회 의장은 단병호 서노협 의장, 집행위원장은 이흥석 마창노련 의장이 맡았다. 준비 단계에서부터 노동절 당일까지 주최측은 포스터 3종 6만 여장, 홍보전단 10만 장, 현수막을 제작하고 각종 매체 등을 활용해 다채로운 선전활동을 펼쳤다. 외국 노동기구에 축전을 발송하고, 세계노동자에 대한 메시지도 준비했다. 각 당에 협찬과 후원을 요청하고, 전민련·전대협 등의 단체와 사업 공동계획 및 공동행동을 결정해 적극적인 조직동원 결의를 확보했다.
각 노조·지역별로는 출정식을 통해 참여 의지를 높여내고 정권의 대회 원천봉쇄, 노동자 연행에 적극적인 투쟁으로 맞섰다. 지방의 경우 교통편은 행사 7일 이전에 관광버스를 예약하고, 통근버스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3일 전 고속버스 전 좌석을 예매하고, 버스가 부족한 경우에는 기차로 수원, 영등포 등까지 이동한 뒤 전철이나 버스로 바꾸어 타 당국의 감시를 최대한 피했다. 중도차단됐을 때는 해당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견지했다.
한편 정부는 4월 26일 내무부·법무부·노동부장관 연명으로 대회를 원천봉쇄하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에 맞서 전국투본은 “정부는 민주화에 역행하는 노동자탄압을 즉각 중지하고, 4․30 여의도대회의 평화적 개최를 보장하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 대회 강행 의지를 재확인했다.
1989년 노동절투쟁의 전개
4․30투쟁은 4․29 전야제부터 시작됐다. 정부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각 지노협 소속 노동자들은 대회장인 연세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신촌로터리와 신촌역, 연세대에 이르는 모든 도로와 교통을 통제하고 검문검색을 했으며, 사전에 진입한 노동자들과 학생은 시시각각 교문 앞 투쟁을 전개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산을 통해 연세대로 진입했지만, 진입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서강대(약 600명), 동국대(약 2,000명), 한양대(약 300명) 등에 나누어 집결해 투쟁이 서울 전역으로 확산됐다. 경찰의 원천봉쇄로 전야제는 결국 동국대, 서강대, 연세대 등 3개 대학으로 나누어 치러졌다. 지노협을 통해 확인된 참가자 숫자는 약 2,000여 명이지만 전체적으로는 1만 명이 넘게 참여한 것으로 추산됐다.
노동자들이 전야제를 치르고 있던 각 대학 앞은 경찰부대가 철저히 봉쇄했다. 4월 30일 본대회는 각 학교로 분산된 노동자·학생들이 교문을 돌파하는 투쟁으로 시작됐다. 연세대에서는 정오부터 5시간에 걸쳐 격렬한 교문돌파 투쟁이 전개됐고, 서강대에서도 정오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교문돌파 투쟁이 이어졌다. 한양대, 동국대 등지에 산개해 있던 노동자·학생들은 아현동과 서울역, 신세계백화점 앞 등에서 연세대 봉쇄가 풀린 오후 7시 30분까지 가두시위를 계속했으며, 오후 10시까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대략 2,500여 명이 연행돼 전날 3,000까지 합하면 연행자는 총 5,500명이 넘었다. 부상자도 많았다. 연세대에서는 총 104명이 다쳤으며, 봉합수술을 한 사람만도 30명에 이르렀다. 아현동 투쟁에서도 2명이 머리에 직격탄을 맞았고, 연세대 뒷산으로 진입하려던 박애자(경기노련)는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머리와 이마를 맞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서강대에서는 서울대 학생 신영상이 뇌 손상을 입고 고려병원에 후송되는 등 이밖에 파악하지 못한 부상자도 다수였다.
4월 30일 중앙집중으로 치러진 노동절 기념투쟁에 이어 5월 1일 노동절에는 투쟁의 열기가 더욱 확산돼 지노협을 중심으로 한 총회투쟁, 가두투쟁, 집회투쟁이 전국 13개 시도(서울, 인천, 성남, 부천, 안양, 안산, 수원, 대구, 울산, 마창, 부산, 광주, 전북)에서 벌어졌다.
당시 전국투본에는 한국의 노동절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표하고 노태우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메시지와 신문광고 등이 줄지었다.
한편 전국투본은 5월 3일 단병호 본부장 이름으로, 평화적으로 진행된 노동절투쟁을 원천봉쇄하고, 백골단을 동원해 다수의 노동자를 다치게 한 국가권력에 대해 내무부장관 이한동, 법무부장관 허형구, 노동부장관 장영철, 치안본부장 조종석, 서울시경 국장 김우현 등 주요 치안관계자들을 집시법 위반 및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으로 고소했다.
1989년 노동절투쟁 평가 전국투본은 노동절투쟁에 대한 조직적 평가를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 성격과 향후 민주노조운동의 방향 및 당면과제 올바른 인식 △지노협의 지도체계 정비 △노동조합운동뿐만 아니라 광범한 대중의 참여 하에 전 민주세력에게 가해지고 있는 정권의 탄압 공세 저지투쟁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전국투본은 평가작업의 주안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조직적인 평가를 진행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동절투쟁은 △역대 독재정권에게 빼앗긴 메이데이를 42년 만에 자주적·민주적인 노조세력의 대중적 투쟁으로 부활 △노동절 투쟁으로 집약된 1989년 상반기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사회의 정치세력이자 민주화의 주요세력으로 성장했음을 확인 △노동자 내부 사업으로 한정되지 않는 전민중의 연대투쟁이었다는 점을 의의로 평가했다. 한편 △조직 과정에서 지역과 업종협을 주체로 세워내지 못함 △4.30대회와 5.1대회 투쟁 수위(총파업 입장 번복) △5․4 전국노동자대회 원천봉쇄와 무산에 대한 지도부 책임성 등은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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