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라면 노동자의 기억 (10) 해고도 모자라 대공수사과 형사를 통한 차량미행까지 당하고보니 민주파 핵심 6인은 조직적이고 일상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노동조합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대의원 활동의 활성화와 노동조합의 활동상황을 조합원들에게 사실대로 알리는 작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합원들의 무관심만 탓할 게 아니라 관심을 유도하여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자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비밀조직인 ‘N 민주노조쟁취 추진위원회’를 ‘N민주노조실천 노동자회’로 확대 개편했다. 3개의 근무조별로 구성된 조별회의와 조직부, 총무부, 교육선전부 등 4개의 활동부서, 그리고 각 조의 조장과 각 활동부서의 부장과 회장, 부회장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그 핵심조직이었다. 주 1회 조별회의와 각부회의, 집행위원회가 열리며 상호 활동계획과 활동의 실천보고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밤을 세워가며 토론하는 게 예사였다. 조합원들을 민주노조 세력으로 의식화시키고 각종 홍보를 담당하는 교육선전부, 조합원들을 여러 가지 형태의 모임으로 엮어내는 조직부, 부서 구분 없이 같은 근무조끼리 자주 만나 현안 문제를 논의하는 조별회의, 조별회의 결과를 취합해 활동방향을 결정하는 조장회의 등의 조직이었다. 회사 창립 이래 최초의 신문인 ‘징소리’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N민주노조실천 노동자회’의 소식지로 회사 측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비공개 제작과 점조직을 통해 현장의 곳곳에 은밀하게 배포하는 비밀신문이었다. 합법적인 상급단체 임에도 외부 단체라는 이유로 노조 집행부조차 외면했던 안양노총을 드나들며 우리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요청하고 안양노총 주최 집회나 교육에 조합원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안양노총 관계자들이 회사 근처에서 안양노총 신문을 출퇴근 조합원들에게 배포해준 것도, 또 내가 수십 부씩 가져다 현장에서 조합원들과 나누어본 것도 이 때였다. 합법적인 노총신문을 통해 홍보물에 대한 거부반응을 무력화시키고 노동계의 동향과 인근 타사업장의 노동조합 움직임 등을 조합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징소리와 함께 안양노총 신문이 현장에 나돌자 회사에서는 초비상이 걸렸다. 각과의 부장과 과장들이 부서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최초의 배포자가 누구인지를 찾느라 법석이었다. 노동조합 상급단체의 신문인 안양노총 신문이야 공개적으로 나누어주며 몇날 며칠을 돌려봐도 어쩔 수 없었지만 문제는 ‘징소리’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현장의 기계 위나 화장실, 탈의실, 공중전화 등에 뿌려지기 때문이었다. 반장이나 회사에 가까운 조합원들로 감시조를 구성해 24시간 감시를 해도 끊이지 않으니 골치였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모르고 있는 일들, 회사와 노동조합에서 쉬쉬하고 있던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징소리로 폭로되니 대략난감이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눈과 귀를 막아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노동조합과 조합원의 고리를 형식적으로 유지시켜온 게 지금까지의 N라면 노사정책이었다. 또 그 방법이 회사의 의도대로 노동조합을 움직이는 가장 무난한 방법이었다. 은밀하고 지능적인 노동조합 활동 탄압 탓에 쉽게 노출되지도 않고 증거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 조합원들의 애환이 담긴 문예작품이나 임금 계산법, 산재보상법 등 기본적인 노동법 해설과 노동관계 판례, 인근 타사업장의 노동조합 활동사례 등이 폭넓게 실리자 조합원들의 반응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프로야구단인 청보핀토스를 인수하기 위해 협상을 한다느니, 설립 준비 중인 SBS방송에 수백억을 출자 한다느니, 하는 신문보도를 안 것도 징소리를 통해서였다. 경남 울주 양산지역에 골프장을 짓기 위해 30만평의 땅을 사놓는 바람에 인근 땅값이 50배 폭등했다는 야당 국회의원의 국회 국정감사 폭로도, 부사장이 수만 평의 부동산을 사 두었다가 부동산투기 혐의로 입건된 사실을 안 것도, 입만 열면 불법, 불법하던 노무담당이사가 아들의 경원대 입시비리로 수갑을 찬 채 호송차에서 내린 것을 알려준 것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해마다 임금협상이나 상여금 협상 때면 수만 평의 운동장에 산더미처럼 라면과 스낵이 쌓이는 이유를 깨달은 것도 징소리 때문이었다. 각 부장들이 강당에 부서원들을 집합시켜놓고 당장 나라와 회사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악선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징소리를 배포하는 것은 물론 보는 것도, 또 남이 보는 것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는 것도 징계의 대상이라며 연일 대자보와 조회, 개별면담을 통해 엄포를 놓지만 현장의 징소리는 좀체 끊이지가 않았다. 반장과 관리자들이 정기적으로 현장을 순시하며 일일이 수거를 하고 출근 때 경비들이 정문에서 검사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꼬깃꼬깃 접은 징소리가 주머니에서 나오면 기계 위나 탈의실에서 주운 것이라느니, 쓰레기통에 버리기 위해 갖고 있었다고 둘러대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회사 측의 이런 징소리 악선동은 조합원들에게 징소리를 선전해주는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고, 징소리의 진가를 한껏 올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세력이 회사 측과 노조 집행부로부터 징소리파로 불린 것도, 징소리는 곧 과격 불순세력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취하겠다던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절감한 게 이때였다. * 풍문만 떠돌았던 노조위원장의 공금횡령 건은 1989년 9월 28일 위원장의 사표로 일단락 되었다. 징소리를 통해 속보가 간간히 나오긴 했지만 정보수집의 한계로 깊이 있는 홍보를 할 수 없던 문제였다. 아무튼 실형을 선고받고도 은밀하게 회사의 관리자들을 만나가며 한 달 가까이 버텨오던 노조위원장이 물러남으로써 보궐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이 문제는 돈 욕심에 눈이 먼 노조위원장과 갈등을 빚은 노조집행부의 측근이 차기 노조위원장을 꿈꾸는 위원장 중독자와 야합해 터뜨린 부패사건이었다. 그는 1987년 노조위원장 선거 때 민주파와 연합해 1차 투표에서 패했던 유완영이었다. 그의 근무처인 공구창고는 연일 그의 참모들로 들끓었다. 배가 터지도록 혼자서만 먹는 노조위원장에게 등을 돌려 공금횡령 건을 유완영에게 밀고하고, 그와 함께 수원지방 검찰청에 가서 위원장을 고발한 소비조합장도 거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를 비롯한 몇몇 야심가들은 공금횡령 풍문이 퍼지면서부터 사실상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검찰과 회사 측에 처벌과 해고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모두 자신의 공으로 선전하고 다녔다. 민주진영 역시 공금횡령 노조위원장의 처벌 요구와 함께 민주세력의 조직 확대와 강화에 역량을 집중했다. 노조위원장이 벌금 100만원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그 사실이 명백히 해고항목에 해당됨에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위원장의 불신임 문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주파 대의원을 중심으로 한 탈의실과 노조 사무실 앞에서의 공청회와 불신임 서명운동 등이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위원장이 사퇴는커녕 큰소리를 치며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선거운동을 한다는 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주노조 활동으로 밉보여 서울하치장으로 전출된 문찬식은 자신이 위원장에 출마할 것임을 공표하고 다녔다. 1987년 파업이후 생긴 민주파 6인 모임은 아니나 1989년 파업당시 파업지도부에 열성적으로 참여했고, 패기와 결단력을 갖춘 30대 초반의 친구였다. 그런 만큼 그도 조합원 사이에서는 민주파로 불리는 친구였다. 그러나 그의 출마 의사표시는 다른 민주파의 파업주도 세력은 물론 6인 모임과도 전혀 상의가 없었던 그들 몇몇만의 결정이었다. 더구나 민주진영에서는 위원장이 회사 측 관리자들과 은밀히 만나며 활보하는 상황에서 타 후보들이 선거운동을 한다고 같이 따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위원장이 사퇴한지 일주일후 민주진영은 문찬식을 민주진영의 위원장 후보로 선출했다. 6인 모임에서였다. 6인 모임의 일원인 나를 민주후보로 추대하자는 안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의 출마공표로 인해 이미 현장에 민주파 후보로 소문이 파다하고 또 본인이 강력히 출마를 희망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3일 홍보활동을 하던 선거 운동원들은 아연했다. 문찬식에 대한 조합원들의 여론이 의외로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간 몇 년간 안양공장에서 대의원으로서 또 파업지도부의 일원으로 열심히 활동했고 또 해고자들의 복직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에도 열성적이었던 사실은 조합원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저런 일로 밉보여 한 달 전 서울하치장으로 전출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거부반응은 예상 밖으로 심했다. 게다가 구체적으로 내 이름을 거론하는 조합원들도 상당수 있었고, 1987년 파업의 6인 모임에 4명의 열성적인 민주파 조합원을 추가한 가칭‘민주후보 선출위원회’는 이 문제로 연일 토론을 하였고 결국 3일 만에 나로 후보자를 교체하였다. 선거 23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또한 조직이나 선거자금이나 절대 열세인 점을 감안, 선거참여의 의미를 민주세력의 조직 확대와 안성, 부산공장의 연결고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두기로 했다. 회사 측에 의해 과격불순 세력으로 왜곡 선전된 민주노조 세력의 이미지를 바로 잡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목표를 당선보다는 민주세력의 의식화와 조직 확대 강화에 둔 셈이었다. 당선에 최우선 목표를 둘 경우 당선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 후보들과 다를 게 없고 올바른 방법과 과정이 승리의 지름길일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열정과 튼튼한 민주노조 세력이 없는 한 선거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하고, 설혹 노조 집행부를 장악한다 해도 회사나 반 민주노조 세력들의 와해공작에 버텨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나오겠다며 후보자 교체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는 문찬식은 송양이 설득하기로 했다. 10인 모임에 포함되지 않은 문찬식을 설득하는 것은 그와 소모임 활동을 했던 송양이 적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찬식의 반발은 의외로 컸다. 수일 전 송양과 나와 셋이서 만났을 때 문찬식이 출마의사를 고집하며 양보할 의사가 없음을 피력하자 나는 솔직히 욕심이 없음을 밝혔던 터였다. 송양까지 문찬식의 후보론을 내세우니 그랬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문찬식의 반발은 더더욱 큰 듯했다. 노조위원장 선거 얘기가 나올 때마다 현 위원장의 공금횡령 사건의 진상규명과 불신임이 선결 과제라는 점만 강조했을 뿐 나의 출마여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던 터였다. 올바른 후보자의 자격과 이번 선거의 중요성, 민주노조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한 달부터 현장 조합원 사이에는 나의 출마 풍문이 돌았고 귀찮을 정도로 출마여부의 질문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본인의 의사보다는 조합원의 여론에 따라 결정할 문제라고, 그게 바로 민주노조의 후보 결정방법이라는 원칙적인 말로 확답을 피했던 터였다. 조합원을 위해 앞장서 일을 하다보면 가정의 소홀함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감방이라도 갈 각오를 해야 하는데 나만이 위원장 감이라고 떠벌이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막중한 민주노조의 위원장 후보를 조합원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또 민주노조의 건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러 동지들을 무시한 채 당사자들끼리 시장 물건 흥정하듯 한다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10인 모임에서 공식 결정된 이상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찬식과 단 둘이서 연 3일을 만나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문찬식은 막무가내였다. 죽어도 끝까지 해보겠다는 거였다. 감정이고 오기였다. 선거는 19일 앞으로 다가왔다. 결국 일단은 둘 다 출마하기로 하고 2-3일후에 여론에 따라 열세자가 우세자에게 양보를 하기로 했다. 어떠한 경우든 2인이 끝까지 출마하여 민주파 조합원들을 실망시키고 어용 후보가 당선되게 하는 일만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타 후보 측의 비방은 물론 평조합원들의 비난도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후보교체 6일 만에 문찬식은 후보를 사퇴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일부 서먹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하였으나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뭉치기로 합의를 했다. 민주진영의 후보자가 단일화 되자 이내 ‘민주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부산공장을 필두로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지각 선거 운동이었다. * 선거를 2일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서 후보자와 참관인 회의가 열렸다. 안성, 부산지부의 참관인의 경우 투표 전날 현지로 내려가야 하고 또 기타 선거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각 후보자의 공장별 참관인은 투표와 개표 모두 1명으로 제한하고 개표는 관례를 준수하고, 지부별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안양공장에서 3개 공장의 투표함을 모두 섞어서 개표를 한다는 거였다. 가까운 안성의 경우는 승용차편으로 운송하고, 부산의 경우는 비행기를 이용해 운송해야 한다는 거였다. 투표함을 들고 탈 수도 있냐는 말에 모두들 어물거렸다. 계속 캐묻자 그제야 그건 안 된다며 화물칸에 싣고 타야한다는 거였다. 별난 선거에 별난 규정이었다. “지부별 분열이란 말이 도대체 뭐야? 투표 종료와 동시에 지부별로 그 자리에서 즉시 개표를 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오해의 소지도 적을 텐데 굳이 몇 십만 원 들여 비행기 타고 오겠다는 이유가 뭐야? 비행기로 와도 김포공항에서 안양까지 오는 시간이 2시간은 걸려 승용차로 싣고 오나 비행기로 싣고 오나 별 차이가 없는데 그런 똥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뭐냐 이말야? 10키로 이하 물건은 들고 탈수 있는데 굳이 비행기화물칸에 싣고 타야 한다는 이유가 뭐냐 이말 이야?” 이 문제 또한 나머지 5명의 후보와 참관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나와 우리 측의 참관인 두 명만이 선거관리위원장을 비롯한 선거관리위원들과 입씨름을 할 뿐이었다. 10키로 이하도 들고 탈수 없게 돼있다고 우겼다. 3개 공장의 투표용지를 모두 섞어 개표를 한다지만 선거가 끝나면 공장별 득표내용이 구체적으로 떠돌았다. 부산지부 투표함을 굳이 비행기 화물칸에 싣고 오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회사 측과 가까운 몇몇 사람들을 통해 들은 터였다. 선거를 아무리 해봐야 우리 회사에서 민주노조가 생기면 손에 장을 지진다느니, N라면에서 회사의 지지를 못 받으면 노조위원장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간간이 들어온 터였다. 부산지부의 표는 죽었다 깨나도 회사 측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많게 되어있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기업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민주노조를 방해, 탄압하는 기관이 한둘이 아니니 투표함 바꿔치기는 식은 죽 먹기인 것도 사실이었다. 대기업 민주노조 간부들에게 그런 음모에 대한 주의를 수차 들어온 터였다. 대기업 민주노조의 봉쇄수법 중 가장 흔한 방법이 공안기관원들을 이용한 공항에서의 지부 투표함 바꿔치기라는 얘기였다. 지부 투표함의 비행기 화물칸 운송 공작을 조직의 힘으로 격퇴한 대기업 민주세력치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지 못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고 했다. 반대로 조직의 힘이 약해 그런 공작에 끌려간 대기업 민주세력치고 승리를 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고 했다. 대공과 형사가 해고자의 출근투쟁을 미행하고, 해고자가 재직 중 회사에 제출했던 서류일체가 회사의 노무과장의 명함과 함께 그의 차에서 발견되는 회사이니 당연한 일일 터였다. “자기표가 안 나왔으면 다음 선거를 위해서도 더 잘해주고 더 신경을 쓰지 보복은 무슨 보복이야? 위원장 같으면 보복하겠어?” 도대체가 당치도 않은 얘기였다. 위원장 당선자가 자신의 지지표가 적게 나온 지부를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게 지부별 개표 반대의 논리였다. 사실을 숨기고 둘러대다 보니 이런 되지도 않는 말까지 나왔다. “노조위원장에 당선되면 누구든지 다음번에 한 번 더 해먹으려고 조합원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수를 다 쓸 텐데 자기표가 안 나왔다고 보복을 한다고? 홍형 같으면 보복하겠어? 이형 같으면 보복하겠어?” 얼버무리는 선거관리위원장을 흘겨보며 나머지 후보들에게 물었으나 그들도 애매하게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분명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시정을 요구하는 후보나 참관인은 없었다. 하나같이 꿀먹은 벙어리였다. 어떻게든 민주파와 2차 결선투표까지 올라가 회사 측의 지지를 업고 위원장이 될 꿈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괜히 회사 측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며, 목표가 2차 결선 투표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후보도 있을 정도였다. “3개 공장 투표용지를 한데 섞어서 개표해도 회사와 집행부에서는 공장별 후보자 득표 상황을 전부 알고 있었잖아? 작년 선거에서 전 위원장 표가 부산공장에서 유완영씨보다 배이상 나왔다며? 그리고 안양과 안성공장에선 비슷하게 나왔다며? 그래 안 그래?” 회사 측의 지지를 받는 유완영 후보의 얼굴이 갑자기 울그락불그락 거렸다. 그와 같은 부류로 관리자들과 가까운 선거관리위원장 역시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문제로 한 시간 가까이 논쟁을 했지만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는 듯 결사 반대였다. 나머지 후보와 참관인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투표용지 좀 봅시다. 부산공장의 투표용지와 안성공장 투표용지, 안양공장의 투표용지 좀 봅시다.” 내가 선거관리위원장 책상위의 투표용지 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3개 공장의 투표용지는 이미 지부별로 분류되어 단단히 묶여 있었고, 선거관리위원장은 그 뭉치를 품을 듯 한 자세였다. “다 묶어 놓았는데, 이걸 다시 풀어!” 선거관리위원장이 머뭇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투표용지도 지부로 보내기 전에 후보자에게 미리 확인시켜야 하는 거 아냐?” “그런 것까지 못 믿으면 어떻게 해? 일단 믿어봐야지. 못 믿기 시작하면 한이 없어.” 선거관리위원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1987년 선거 당시 유완영의 선거참모였으나 의외의 인물인 김준태가 당선되자 그와 야합해 부위원장으로 군림을 한 위인이었다. 당시에도 유완영 후보 측으로부터 선거운동도 시늉만 내며 누구누구를 포섭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해 선거후에도 구설수를 달고 다녔다. 유력 후보자들만을 골라 은밀하게 돈을 요구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특히 남자들의 세력이 취약한 민주파의 취약점을 이용해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충청도 출신 친목회인 충우회와 다른 친목회의 회원들을 포섭해 주겠다며 여러 사람을 통해 제의했던 사람이었다. 사람을 만나려면 찻값이나 술값은 물론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맥주에 양주도 먹어야하고, 나이트클럽에도 같이 가줘야 한다는 위대하고 한심한 사교술을 소지자였다. “자, 홍형은 안성공장 투표지 보고 박형은 안양공장 투표지 봐요. 난 부산공장 투표지 볼 테니까.” 나는 선거관리위원장이 감싸듯 안고 있는 투표지 뭉치를 낚아채 분배 했다. 그리고 공장별로 투표용지를 확인한 우리는 기막힌 투표용지에 아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안양공장의 투표용지는 선거관리위원장의 직인이 선거관리위원장이란 글씨와 나란히 정상적으로 찍혀있는 반면, 안성공장의 투표용지는 1센티 정도 위로, 부산공장의 투표용지는 1센티 정도 아래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공장별로 완벽하게 구분해 직인을 찍어 놓았던 것이다. “이러고도 믿으라고? 믿어 보라고?” “그게 어떻게 그렇게 찍혔지? 시간에 쫓겨 밤늦게까지 찍었더니 그렇게 찍었구먼.” 선거관리위원장이 중언부언 얼버무렸다. 어용후보인 유완영도 얼굴이 붉게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 지시야? 회사 측의 지시야? 무슨 대가를 받기로 하고 이렇게 한 거야? 아무 대가도 없이, 아무 이해상관도 없는 일을 선거관리위원장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쥐약 먹지 않은 담에야 생기는 일 없이 욕먹을 일을 할 수는 없는 거야.” 선거관리위원장은 단순한 실수라는 말만 반복했다. 단순히 실수로 1,200장과 600장, 1,200장을 각각 다르게 직인을 찍었다는 거였다. 참으로 치밀하고 신기에 가까운 실수였다. 실수라는 말 외에는 달리 둘러댈 말도 없을 터였다. “미안합니다. 다시 찍을게요. 도장도 신경 써서 잘 찍어야겠네!” 선거관리위원장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이 투표용지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결국 공장별 즉시 개표와 2차 결선투표일의 명시 등은 선거관리위원장의 결사반대와 타 후보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번 선거에서 회사 측과 어용노조 집행부의 요구대로 선거업무를 관리해줄 경우 500만원의 돈을 받기로 했다는 풍문을 뒷받침하듯 선거관리위원장의 똥고집이 의외로 완강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