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3월 10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이하 한국노협)가 노동절 기념대회 자리에서 노동조합원 약 400여 명과 내외 귀빈 약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하였다. 한국노협은 출범식에서 비조직적이고 고립분산적인 서클 및 소그룹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질적인 전환, 즉 노동운동의 주체성, 통일성, 연대성을 드높이자고 하였다.
한국노협, 시대의 아픔인가! 태생적 한계인가!
김영수(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80년 3월과 5월, 노동자들은 일어섰다. 박정희의 죽음을 앞세워 총칼을 들고 노동자?민중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신군부 세력들은 ‘노동계 정화 조치’라는 미명 하에 노동조합운동을 소멸시키려 하였다. 신군부 세력들은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적인 활동가나 간부들을 직업적 깡패와 경찰을 동원하여 납치?감금?협박?집단폭행 등이 자행하였다. 당시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는 곧 생명을 담보로 하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의 노동운동은 서클 및 소그룹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방식은 국가폭력의 서슬이 퍼런 조건하에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였지만, 종파적이고 수공업적인 활동과 연계되는 종파주의 및 기회주의의 근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84년 3월 10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한국노협)가 노동절 기념대회 자리에서 노동조합원 약 400여 명과 내외 귀빈 약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하였다. 한국노협은 출범식에서 비조직적이고 고립분산적인 서클 및 소그룹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질적인 전환, 즉 노동운동의 주체성, 통일성, 연대성을 드높이자고 하였다. 한국노협은 1970년대의 민주노조 활동가, 종교기관에 의존해서 활동했던 노동자 교육운동의 주체, 한국노총에 의존해서 활동했던 노동조합 활동가, 그리고 노동운동의 개별주체들을 총망라하였다. 당시 결성식에 참여했던 한 활동가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시작이자, 대중노동자 정치운동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격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결성식에는 한국의 민주노동운동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과 재야의 명망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국노협에 참여한 주체들이 정치적?이념적으로 다양한 만큼, 활동의 노선과 방식에서 통일성을 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민주노동 창간호. 한국노협의 주장과 현장수기, 투쟁사례 등이 생생하게 실려있다.>
그래서 한국노협은 노동운동의 경제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경향성을 토대로 노동조합운동과 연대하였다. 한국노협은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노동자 대중역량의 강화활동에 주력하고, 이차적으로 노동관련 법?제도의 개선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노협은 기관지 ??민주노동??을 발간하여 ‘노동자 투쟁현황, 노동자 생존현실조사, 투쟁평가 및 과제의 제시’ 등의 선전활동, 년 평균 100여 회의 노동조합간부 교육활동, 부당해고?체불임금?퇴직금?산업재해 등의 문제를 상담하고 법정투쟁을 지원하는 일상적 지원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84년 하반기에는 노동법개정운동을 추진하였다. 특히 1984년 9월 27일에는 ‘노동법 개정촉구 인천대회’ 등 지역집회를 개최하였고, 노동법개정 서명운동을 통해 1980년 개악된 노동법을 개정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노협은 노동법 개정을 위한 국회청원운동을 전개하여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인천, 원주, 광주, 대구 등을 순회하며 노동법개정 촉구대회와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한국노협은 노동자 탄압에 대한 선전활동, 조직을 확대하는 활동, 노동법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선전활동, 노동법의 개정을 위한 국회청원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노협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자대중이 주체적인 연대활동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원칙하에, 전두환 정권의 노동정책에 대한 허구성 폭로, 현장지도, 노동자 대중역량의 강화를 위한 교육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국노협은 조합주의, 경제주의를 완전히 극복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또는 노동운동의 역량이 미약하다는 것을 근거로 정치투쟁에 반대하였으며, 현장 노동자에 대한 적극적인 정치학습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노협은 학생운동 출신의 활동가들과 대립하면서 조직 내부에서 홍역을 치르기도 하였다. 1984년 5월에는 한국노협의 경제주의적 입장과 대조를 이루는 생산지역 정치투쟁론 및 선도적 정치투쟁론이 제기되고, 정치적인 가두시위가 기습적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이 투쟁론은 선도적인 정치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노협은 참여주체들의 차별성 격화로 1984년 노동법개정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활동의 막을 내렸다.
<한국노협이 제기한 제3자개입금지 폐지 촉구 _ 동아일보 1984.10.13.>
그래서 한국노협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중적이다. 한국노협의 경제주의 및 조합주의 노선은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평가와 태생적인 한계에서 비롯되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전자는 그 당시 노동운동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전제에서, 그간 한국노총이라는 제도권 안에서의 민주화투쟁이나 종교단체 중심의 지원운동을 벗어나, 과거 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운동의 제도개선투쟁을 주도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이다. 후자는 한국노협이 노동운동의 전체적 과제와 방향, 그리고 구체적 조직과의 실천적 결합이라는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출발함으로 인해 애초부터 확고한 지도력을 갖추기가 어려웠고, 또한 계급적?정치적 노선을 정립하여, 그것에 기반하는 활동을 전개하기에 내부 구성원들의 이질성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는 평가이다.
어떤 투쟁체이든 시대의 아픔을 머금고서 탄생하거나 소멸한다. 문제는 아픔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주체들의 진정성과 치열함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진단과 처방이 자의적이거나 개인적으로 오진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아야 한다. 진정성과 함께 하는 치열한 평가만이 그것을 예방할 수 있다. 2000년대 노동운동의 또 다른 아픔은 평가가 치열하지 않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