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죽음은 나의 삶을 바꿔 놓았다.
박창수 열사 부모님 이야기 (마지막)
"이거나 다 먹고 가지
아, 이것도 못 다 먹고 갔냐"
황지익, 김정자 말하고 정경원 받아적음
5월 6일 새벽. 전화벨이 울렸다.
“뭐? 알았다.”
아버지는 자고 있는 박창수의 동생들을 깨웠다.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 어머니가 듣지 않게 주의를 하라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알렸다.
어머니는 병원으로 뛰어가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까맣게 몰랐다. 어머니가 생각할 수 있던 최악의 경우는 ‘머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으니 뇌수술을 받는가보다’ 정도였다. 아들이 죽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응급실 안은 고요했다. 나중에야 큰 일이 터졌음을 알게 된 어머니는 경찰이 아들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온몸으로 저항했다. 곳곳에서 노동자, 학생들이 안양병원으로 달려왔다. 박창수 열사 살인 진상규명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응급실에 들어가니까 며느리가 혼자 않아있는데, 어머니요 소리도 안 하고 울지도 않고 앉아있더라고. 없는 부모 만나가지고 그랬는가보다 싶은 게 눈물이 나잖아. 그래서 울면서 나왔어. 나와가지고 안양병원 들어가는 데 보면 전화박스 있더라고. 그 밑에 앉아서 담배를 피면서 울었어.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없고. 막내가 지 동생보고 어머니 지키고 있어라 하고 가드라고. 가보고 온다 하면서.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경찰들이 왔다갔다 왔다갔다하고 이상한거야. 그래서 무슨 일이 있구나. 그게 아닌가보다, 딸이 붙드는데 확! 뿌리치고 뛰어갔어. 사람들 많은 데로 뛰어가보니까, 아이구~ 우리 창수는 어느새 죽어서 싸늘한 시신이 되가 있고 이것들이 끌고 갈려고 벌써 구루마에 태웠드라고. 가니까 우리 인갑이하고 막내하고 막 구루마 밑에 발둥 잡고 드러누워 있고. 그때 성호하고 막 온 거야. 성호도 막 같이 붙들고 있고. 눈물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보니 막대걸래가 있데. 그걸 팍 하니까 칼같이 이런 삐죽한, 그걸 가지고 누구든지 우리 창수 손대면 찔러 죽인다고 전경들 가라고 확! 전경들한테 눈깔 찔러 죽인다고 막 설치고, 그래 하는데. 그때까지는 우리 식구밖에 없었거든, 성호하고. 조그만 창문 거기로 막 넘어 들어오는 거야. 학생들하고 노동자들 하고 넘어 들어오는 거야. 창수 못 끌고 나갔지. 우린 복판에 있고 전경은 밖에 있고 우리는 삥 둘러쌌지.
박창수 열사는 안기부의 공작에 의해 죽었다. 대기업 노조들의 민주화와 그 결집이 전노협으로 대표되는 당시 노동운동진영으로 힘이 실리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자본과 정권이 그를 죽였다. 누가 보아도 자살의 이유나 정황이 없었다. 경찰은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고 노동자들은 시신을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안양병원을 지켰다. 경찰은 급기야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 강제 부검을 했다. 당시 가족들이 시신과 정황을 찍은 사진들도 모두 빼앗겼다. 가장 먼저 시신을 확인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엄마는 봇 봤지만 딱 가니까 시신이 누워있는데 상처가 하나도 없어요. 반창고 그대로 붙어 있고, 피 난 데도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링게루 병이 반경 1m정도에 소복이 쌓여 있는 거야. 쓰레빠도 이쪽 하나 저쪽 하나 있고. 나중에 알았지만 병원 높이가 18m야. 보통 옥상이면 1m 정도 턱이 있는데 그걸 신고 올라가서 떨어졌겠어요? 쓰레빠 그대로 있고 링게루 그대로 있고. 그때 내가 인갑이 보고 일회용 카메라 사와라 그래 사 온 거예요. 찍을라 하니 뺏고 박종환이가 자기가 다 찍어서 다 해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면서 뺏드라고. 압수한 거지. 이미 죽은 거 갖다 버린 거야. 떨어졌으면 상처 피가 났을 텐데 하나 안 났으니. 그런 거 저런 거 없고 사진 하나도 안 주고, 그래 폐기처분 했다는 그런 말도 있어.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히겠다는 가족들의 완강한 저항이 이어졌다. 그 해 5월 정권의 폭압에 맞서 죽음으로 맞서는 열사들이 이었고 운동진영의 투쟁이 확산되자 이를 정리하기 위해 정권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다. 박창수 열사의 고등학교 동창을 올려 보내 부모님을 설득하기도 하고, 구청장이 와서 밥벌이를 위한 가판을 미끼로 회유하기도 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점을 보고 저들은 회유로 투쟁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해가는 장면이다.
기자들이 찍은 사진으로 당시 투쟁 포스터에 실렸던 것들이다.
우리가 안양에서 싸울 적에 심지어 창수 고등학교 동기들을 다 올려 보냈더라고. 걔들이 와가지고 고생해서 어쩌냐고 저녁이나 잡수러 가자고 그래. 나는 창수 친구니까. 반갑고 고맙고 하니 갈라하니까 거기서 투쟁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싫어하더라고. 나가면 안 된다고. 난 나대로 성질이 나잖아, 창수 친군데. 저녁 한 끼 사준다고 하는데 먹고 들어오겠다는데. 그 사람들은 엄마 아부지를 어찌해서 빨리 끝내려고 한다, 그 사람들은 벌써 머리 꼭대기 앉아 있는데 우리는 뭐가 뭔지 모르잖아. 그래 냉면집에 갔어. 그랬더니 이놈의 새끼 하는 소리가 엄마 아부지도 연세도 그러고 동생들도 어리고 하니까 엄마 아부지도 이제 살아야될 거 아니냐, 그 말이 돈 몇 푼 받아서 살아라 이 소리아닌가벼. 그건 또 머리에 팍 들어오드라고. 니 방금 뭐라 그랬노. 되풀이하데. 그런 소리 할라믄 가라, 니가 창수 동기냐, 친구냐고. 친구가 어떻게 죽었어? 분하지도 않아? 진상을 밝힐라 하는데 뭐 어째? 쫓아 보냈어. 그놈 말고도 딴 놈을 또 데리고 왔어. 고놈도 우리집에 줄창 와가지고 콩나물죽 먹던 놈인데. 그런데 두 놈 다 똑같은 말을 하고. 필요 없다, 너그도 친구냐고, 우리 창수가 참 불쌍타. 저런 친구를 친구라고 끌고 와가지고 죽이라도 처먹이고 했다니 말이지. 당장 가라고. 그래 그 길로 가가지고 안 오드라고. 심지어 막 고등학교 애들까지 올려 보내드라니까. 내가 못살지, 아부지가 의붓 아버지지. 돈 몇 푼 준다 하면 지새끼 아니니까 혹할 줄 알았던 거지. 근데 아부지가 더 세게 나가. 강남구청장이 캔 같은 거 사가지고 왔어. 아들이 죽었는데 장례식 할 돈이 없어서 장례식을 못하고 있다 해서 도와드릴라고 왔다는기라. 아부지가 뭐, 어째? 장례식 할 돈이 없어서 도와주러 왔어? 대번에 아버지가 야, 이 씨발놈아, 도와줄라믄 우리 창수 어떻게 죽었는지 진상 밝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내가 이거 못 먹어서 그거 하냐고. 아버지가 너그나 가서 많이 처먹어라, 캔 들은 걸 들고 차니까 꾸르르 굴러가니 가면서 줍느라고 그러더라고. 그때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왔어, 그래서 빨리 무마시킬라고. 아부지는 내 창수가 어떤 자식인데 난 진상을 밝혀야 된다. 그래서 두 달 동안 그랬잖아.
안양병원에서 투쟁을 하는 동안 안양 노동자의 집에서 해주는 밥을 타다 먹었다. 밥 한 찜통, 묵은지만 넣고 끓인 김치국. 몇 달을 계속 먹어나니 어머니 아버지는 지금도 김치국을 안 드신다. 물리기도 했고 그때의 기억 때문에...... 열사 투쟁을 이어가는 데는 유가족의 입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정보기관의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는 것이 투쟁을 이어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박창수 열사 부모님은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굳게 자리를 지키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창수 죽고 나서 뭐 우리가 알지. 창수 죽기 이전에는 운동 '운'자도 모르고 살은 사람이야. 우리 아들이 운동을 하다가 구치소에 붙들려 갔잖아. 그런데도 면회를 가잖아 갔다 오다 보면 경원대 제일 심하게 싸우더라고. 그러면 차가 못가는 거야. 학생들이 막 나가가지고 화염병 던지고 해서. 차를 세워놓고 있잖아, 버스가. 그러면 내 속으로 막 욕을 했다니까. 부산말로 쎄빠질 새끼들 애미애비들 뼈빠지게 일해서 대학 공부하라고 보내놨는데 화염병이나 던지고.... 속으로 혼자 욕을 했어요. 그게 바로 내 일인데. 창수 죽고 나니까 그때서야 내가 안 거야. 그게 다 내 일이고 창수 다 관련해서 싸우고 이런 건데. 얼마나 내가 바보면 그걸 모르고....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변화하셨다. 대학생들이 시위를 해 차가 막히면 먹고 대학생 할 일 없어 그런다고 욕을 하던 모습에서 대학생 어머니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애미가 조금만 똑똑하고 그랬으면 자식을 왜 죽였겠느냐”며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가 되셨다.
남아있는 아들의 유품은 도장 하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후회하시지만 당시에는 마음이 아파 전부 훌훌 태워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창수 묻어놓고 와가지고 구치소에서 소지품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대. 왔는데 내가 그 소리 들으니 막 떨리기 시작하는 거야. 아버지가 당신은 가면 안 된다. 또 넘어진다 이거야. 우린 가지 말자, 인갑이 보내자. 그래서 그러자. 지금 내가 그게 후회가 된다니까. 물론 소지품 내보낼 적에 다 조사해서 뺄만한 것은 다 뽑고 주겠지만 그걸 한 장도 안 없애고 내가 가지고 있어야 되는데, 그때 뭐가 뭔지 모르니까. 인갑아, 가서 니 형 소지품 찾거든 서울구치소 앞에 나오면 논이고 그렇잖아, 거기서 훌훌 다 태워버려라, 그거 보면 볼수록 그거 하니까 싹 다 없애고 오라고 그랬어. 이놈이 이놈도 잘 모르니까 다 태웠대. 형 차던 시계하고 도장하고 가지고 왔더라고. 그것도 가져왔는지도 몰랐었지. 지 시계 안 차고 그걸 차고 다니길래 니는 니 시계 나놓고 누구 시곈데 차고 다니냐고, 친구 시계래. 돌려주지, 왜 남의 걸 차고 다니냐고. 돌려줄 거예요. 몇 년이 지나니까 실은 형이 차던 시곈데 내가 차려고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그것도 잃어버렸어. 남아있는 건 도장밖에 없어. 지금 생각하면 그런 걸 다 놔뒀어야 하는데 모르면 할 수 없잖아. 뭘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모르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돈은 20만 2,630원인가 영치금인 남은 거, 돈을 태울 순 없잖아. 갖다 주드라고. 그걸 받아들고 둘이 목을 놓고 울었어. 아부지가 이놈아 이거나 다 먹고 가지, 아, 이것도 못 다 먹고 갔냐. 아부지가 유가협이 동대문 어디 있다 하는데 이거는 우리가 먹을 게 아니다, 유가협으로 가야 한다. 동대문에서 김서방 찾기지 뭐. 둘이 무작정 나선거야. 동대문 유가협 들어가는 입구 지하철 쪽에서 왔다갔다하니까 마침 누가 인사를 하는데 전노협에 있는 누구라고 그래. 전노협에 계시면 잘 알겠네. 유가협 있다 해서 찾아왔는데. 유가협 가실라고요, 따라오라 하데. 골목으로. 갖다 줬어. 그때 사무국장 박래군이 갖다 줬더니 어머니...... 그때서부텀 내가 유가협 활동하고 쫓아다닌 거야. 아버지도 시간나면 가고.
1998년 4월부터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와 추모단체연대회의 등이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11월 4일부터 유가협 어머니들은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의 죽음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 앞 천막 농성에 돌입하여 1999년 12월 30일일까지 422일 간의 피눈물 나는 농성을 했다. 그 결과 1999년 12월 28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 '의문사진상규명을위한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다음해 1월 12일 법이 공포되었다. 이후 만들어진 기구에 민간부문에서 적극 결합하여 활동했고, 많은 민주화운동 사건들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권위주의 시대 국가권력에 의한 사건’이라는 틀, ‘노동운동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라는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여 아직도 많은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져 활동했지만 여러 의문사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박창수 열사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자식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부모님들의 투쟁 - 사진 추모연대
어머니 아버지는 그 투쟁의 한복판에 계셨다. 어머니에게 진상규명은 어떤 의미일까. 어머니는 국가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계시지 않았다. 그저 손주들에게 아버지가 떳떳하고 당당한 노동자로서 불의와 싸우다 죽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으시단다. 당신들도 떳떳한 삶을 이어가시듯이.
창수 장례식 끝나고 나서 구청에서 장사를 못하게 하는 기라. 우리 밥줄인데. 아버지하고 둘이서 구청 가서 두어 번 싸우다가, 뭐 힘이 있나. 입을 갖고 다다다다 하다가 못하게 하니까, 아버지가 드럽다, 안 한다, 죽은 놈도 있는데 내가 살아있는데 리어카를 끌어서라도 밥이야 못 먹겠나. 안 한다 하고는 그래 팔던 거는 집으로 가져오고 가판점은 그대로 뒀더니 나중에 보니까 없앴더라고. 아버지는 몇 달 놀았어. 기가 차드라고.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노 그 생각밖에 없더라고. 전노협에 있던 인구가 신문에 보니까 영등포역 주차장에 사람을 그거 한다고 가보래. 그래 아버지가 거길 한 1년 다니니까 밥은 먹고 지낼만하지. 그러다가 사당동에 아파트 기관실로 들어갔어. 아버지가 기술이 있으니까. 거 들어가서 아버지가 적금을 넣고 이래 사는데 지금쯤 우리 창수가 살아있으면 참 좋아하고 이럴낀데. 93년에 이 집에 이사왔거든. 아버지가 맨날 그래. 이 나이 먹도록 직장 잡고 사는 거 우리 창수가 따라다니며 도와준다고. 굶지는 않겠지. 속이 편해서 산다. 그때 돈 받아 살았으면 떳떳하지 못하지........

용산 투쟁의 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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