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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라면 노동자의 기억_ 우리는 실험쥐가 아니다. 밥, 밥, 밥을 달라! (1편)
첨부파일 -- 작성일 2020-11-11 조회 454
 

1970년대 말부터 1990년초 까지 N라면 공장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N라면 공장의 투쟁은 때로는 민주화 운동이라는 시대상황에 조응하거나, NS자본의 노조파괴 공작에 맞서 격화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노동자 H씨가 16년간 N라면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며 느낀 그간의 역사에 대한 운동적 소회이자, NS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해 N라면 노동자들이 벌였던 투쟁의 기록입니다. 한내가 비정기적으로 진행해온 노동자 자기 역사쓰기의 일환으로 수회차에 걸쳐 연재합니다.

  

 

개미와 진딧물

- ‘N라면 노동자의 기억

 

개미는 진딧물의 천적인 무당벌레를 퇴치하고 진딧물이 주는 단물을 받아먹는다. 개미가 진딧물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건드리면 진딧물은 항문으로 단물을 배설한다. 개미는 그렇게 진딧물의 꽁무니에 매달려 그 단물을 핥아 먹는다. 개미와 진딧물은 이렇게 상생하고 협력하며 살아간다. 이는 자연의 선순환 구조이자, 인간과 문명사회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가치이다.”  글쓴이 노트

 

   

1부 우리는 실험쥐가 아니다. , , 밥을 달라!

 

1화 어용노조 배제한 1987년 파업

 

1987년 봄은 예사로운 봄이 아니었다. 87년의 봄은 27년 군사독재의 서슬에 숨죽이며 살아온 민중들이 과감히 떨쳐 일어선 가슴 벅찬 봄이었다. 그중 가장 우아한 꽃이 대통령직선제였다. 거리와 공장에도 생기가 넘쳤다. 세상이 온통 봄, 봄이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봄바람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더더욱 박정희 정권을 흉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동안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했던 신문과 방송에서도 부쩍 거리의 민주화 시위와 공장의 파업 소식을 전할 정도였다.

*

 

공장마다 파업이 들불처럼 일었다. 경기도 안양지역의 N라면 주변도 온통 파업이었다. 자연스럽게 N라면 공장 안의 화제도 파업이었다. 어제는 어느 공장의 파업이 끝났고, 오늘은 어느 공장이 파업에 들어갔다는 얘기였다. 어느 공장은 파업을 통해 얼만큼 임금인상이 됐고, 어느 공장은 무슨 수당과 함께 퇴직금 누진제가 신설됐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조합원들에게 시달리는 축은 대의원들이었다. 어용 집행부가 나서서 파업을 조직하긴 틀렸으니 대의원들이 앞장서 보라는 얘기였다. N라면은 안양지역에서 2-3번째 큰 공장이다 보니 주변의 공장 노동자들도 관심이 많았다. 회사 정문에 투쟁의지를 담은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에 돌입한 다른 공장의 규찰대들의 영향으로 파업을 조직하지 못한 우리는 나쁜 일이라도 저지른 듯 절로 주눅이 들어 어깨힘이 빠지고 타공장의 규찰대들을 외면하게 되었다. N라면의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과 무파업 등이 다른 회사 사장들에게 파업의 부당성을 강조하는데 악용된다는 항의 아닌 항의를 들을 때는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N라면 공장은 새로 뽑은 사람의 절반이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두고, 나머지의 절반도 석 달을 넘기지 못하니 안양 지역은 물론 통근차가 다니는 한강 이남 지역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N라면 사용자도 바빴다. 준비 과정부터 철저히 대의원들을 배제한 채 밀실야합을 해온 1987년 임금협상은 노조 위원장 혼자만의 잔치로 끝이 난 상태였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 누구와 협상을 했는지, 회사 측 안이 얼마고 노조 측 안이 얼마인지는 노조 위원장과 회사 측 대표만이 알고 있는 1급 비밀이었다. 임금 인상액 또한 에누리 없는 정부의 임금인상 권고안이었다. 회사 운동장이 두어 달 동안 라면과 스낵으로 산더미를 이룬 것도, 임금협상이 끝난 그날부터 정상근무가 연장근무로 바뀐 것도 예년과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대방동에 하나뿐이던 공장이 20여년 만에 안성 부산 등 6군데로 늘어나고, 1986년과 1988년 아시아게임과 올림픽 공식지정 식품으로 선정되었다며 요란하게 선전을 한 게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입이 찢어지게 자랑만 했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만의 자랑이고 자부심일 뿐 노동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며, 노동자의 현실은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이래저래 일만 힘들어졌다.

 

*

 

노동조합 사무실은 연일 조합원과 대의원들의 항의로 시끄러웠고 스낵 1라면 1의 경우엔 대의원을 중심으로 몇몇 조합원들이 연장근무를 거부한 채 정상근무만 하고 퇴근해 어수선한 상태였다. 3시간 연장근로 해봐야 약값도 안 되니 차라리 몸이라도 편하게 쉬겠다는 얘기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남아 연장근로를 하며 죄책감과 자괴감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작업자들도 노동조합과 대의원들이 앞장서면 대부분이 열심히 동참하겠다는 분위기였다. 관리자들이 연일 사무실로 불려 올려 주동자를 찾는다느니, 불법적인 작업거부라느니, 명령불복종이라느니, 하며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으나 이미 압력을 이기지 못해 폭발해버린 노동자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 이상 연장근로 거부의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게 관리자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노동조합 집행부와 대의원들은 타오르는 조합원들의 분노를 남의 일처럼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민주파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몇몇 대의원들이 모여 대책을 숙의해봤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뭔가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고, 지금이 그런 시점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으나 연장근로 거부를 주장하는 적극적인 행동파가 30여명의 대의원 중 6명의 민주파 뿐이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니 대의원들로선 최대한 투쟁분위기를 고조시켜 조합원들의 등쌀에 떠밀려 모든 대의원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유도하는 방법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조합원들과 함께 점심시간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항의 방문해 협상과정의 공개와 재협상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퇴근시간을 이용해 탈의실에서 공청회를 열어 연장근로 거부 분위기를 확산시켜 나가기도 했다. 남녀 탈의실이 마주 보고 있고 출퇴근 시간에는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니 파급효과는 만점이었다. 물론 그 일도 오로지 6명의 민주파 대의원들의 몫이었다.

 

*

 

그런 일들이 있고나서 라면3과 포장실 밖에서 바람을 쐬며 어둠속에 우뚝 솟아있는 모락산에 취해 있을 때였다. 우르르 쾅쾅거리며 작업이 시작 된지 한참 됐는데도 야식시간의 토끼잠이 진드기처럼 붙어있었던 것이다. “, 뭐해요?” ‘라면 2포장실의 정비 담당인 전재명이었다. 뭔가에 쫓기는 듯 긴장된 빛이 역력했다. “뭐하긴, 눈 속의 고춧가루 좀 날려 보내는 중이지......” 눈두덩이 천근만근으로 주저앉는 초저녁잠과는 달리, 새벽녘의 잠은 뒷골이 멍한 채 눈 속이 고춧가루를 뿌린 듯 따가웠다. 전재명은 연신 주변을 의식하며 나에게 눈짓을 하며 고철장 쪽으로 향했다. 전재명은 앞장 서 가면서도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전재명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 오늘 새벽에 터뜨린다는데!”

내가 잘못 들은 듯 멍한 빛으로 응시하자 그가 재차 말했다.

새벽 5, 간식시간에 맞춰 터뜨리기로 했다는데요!”

누가?”

김준태, 김학우, 강기중, 모두 그 또랜가 봐요. 나한테 도와달라고 왔더라고요.”

라면과와 스낵과 출고장에서 포장된 제품박스를 받아 차에 싣고 밀가루를 운반하는 30대 초반의 친구들이었다. N라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노름꾼과 술꾼들로 선거 때마다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는 위인들이었다.

어떻게 한대?”

자세한 건 몰라요. 준비는 다 됐나봐요.”

그런 걸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될 텐데, 조직적이고 치밀한 준비와 계획이 없으면 안 될 텐데......”

정형한테도 얘기했어?”

얘기는 했죠. 지금 스낵 1과 다녀오는 중이예요.”

정동철도 반응이 썩 좋진 않은 눈치였다. 내 반응이 의외라는 듯 전재명은 못내 서운한 빛이었다. 서둘러 돌아서는 그에게 다시 단도리를 놓았다.

어설프게 하려면 아예 안 하는 게 나을 거야.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할 거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길로 스낵 1를 내려가니 정동철 역시 그런 빛으로 앉아 있었다. 정동철 등 몇몇 대의원들은 디데이를 광복절 연휴가 끝나는 월요일인 817일로 잡고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오늘 새벽, 그것도 광복절 연휴 전날인 14일 금요일에 시작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판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정숙을 비롯한 나머지 시말서 동지들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시말서들이란 작년 이맘때 껌값에 불과한 밀실야합 임금합의안에 노조사무실을 찾아가 항의와 시정을 요구했다 불법집회와 근무지 무단이탈로 시말서를 쓴 동지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얼마 후 지전영이 다시 스낵 1포장실로 찾아왔다.

한 형, 그냥 밀어붙인대요. 이미 회사에 말이 새나가 부장들도 퇴근 않고 있대요. 노조위원장도 안 나갔대요.”

“...... ”

아무튼 새벽 5시에 식당 앞 공터로 나와 봐요.”

전재명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휭하니 사라졌다. 난감했다. 걱정이 돼 각 과별로 알아보니 김준태의 몇몇 술친구들에게만 얘기가 된 상태였다. 그들에게 인원의 동원을 요청한 모양이었으나 모이는 시간과 장소를 아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계획도 없이 우리도 한 번 터뜨려 보자는 식이었다. 터뜨리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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