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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과 민주노조운동
유경순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자본가계급은 끊임없이 노동자 역사를 지우고, 거꾸로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역사를 애써 복원시키려 한다. 그래서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계급)투쟁이라고 하나 보다. 역사를 둘러싼 기억투쟁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노동운동 내에서도 그 입장에 따라 기억해내는 노동자역사가 다르다. 예로 민주노총 등장이후 어떤 이들은 전노협의 역사를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서 애써 외면하려하는 것처럼, 또 19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1987년 이후 노동운동과 단절시키면서 이를 지우거나 폄하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1980년대 노동운동의 변혁지향성이나 전노협의 '노동해방’지향이 부담스러워서인 듯하다. 그런데 1980년대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단절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1980년대 노동운동 세력은 현장에서 민주노조결성을 위한 활동을 하였고, 지역에서는 노동운동단체를 만들어 그 지원활동을 하였다. 정치조직건설운동 역시 계속 되었다. 특히 노동단체들은 1988년 6월 7일 전국노동단체운동협의회(전국노운협)를 건설하여 민주노조운동을 지원하면서 노동운동의 주체로 활동하였다. 여기서는 1980년 노동운동세력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노동운동단체, 특히 전국노운협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가를 살펴보겠다.
1980년대 노동운동은 구로지역의 민주노조운동이나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같은 지역투쟁활동, 서울노동운동연합 같은 정치적 대중조직운동, 정치조직건설운동으로 타나났다. 이 시기 노동운동은 1970년대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운동으로 제한된 것에서 벗어나 변혁 지향적 노동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활동방식은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이후 전국 곳곳에 민주노조가 건설되면서 새롭게 변화해야했다. 민주노조운동을 지켜내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복무해야했다. 이에 부응하여 지역 마다 노동운동단체가 세워졌다.
노동운동단체들은 상담소, 교육기관 또는 여러 이름을 걸고 활동하였는데, 예로 민중교육연구소, 한국노동연구소, 인천노동상담소, 노동회관, 서울노동조합운동연합, 박영진 추모사업회, 경남노동자협의회 등이다. 이들 노동운동단체들은 공통적으로 민주노조결성을 지원하고 동시에 노조활동에 대한 실무교육, 나아가 노동자 의식으로 사회를 인식할 수 있는 기초적 정치교육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 과정은 노동운동단체는 민주노조운동이 뿌리내리고 확산되는데 지렛대 역할을 하였으며, 동시에 노동자투쟁이 연대투쟁으로 발전하도록 노력을 한다.

예로 서울의 노동운동단체들은 맥스테크 투쟁을 연대투쟁으로 발전시켜 조합 간 연대를 촉진하고 지노협의 건설에 바탕이 되도록 하였다. 즉 노동운동단체는 연대의 필요성과 투쟁의 성격을 선전하고 구체적인 투쟁전술을 계획해내어 갓 자라나는 민주노조운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경남노동자협의회의 경우처럼 탄압시기에도 실천투쟁을 벌여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통일적으로 결속해내어 지노협이 대중투쟁의 구심으로 자리 잡는데 크게 기여한 경우도 있다. 더욱이 1988년 전국노운협이 결성된 이후 지노협 결성이 더 빨라져서 12개 지노협의 결성에 전국노운협 소속의 지역 단체들이 결합하였다.
“지역을 보면 지노협이나 업종협의회들이 만들어지잖아요.? 그 부분들이 대부분 목적의식성 운동권...이라고 하는 부분들이 전부 다 산파 역할을 하거든요 이론적으로, 실무로, 그 다음에는 몸을 던져 선도적인 투쟁이든. 사실 그 대오들이 커버를 하는 속에서 이 연대 활동들이 진행 되요.” (전 전국노운협, 김승호)
“전노협의 실질적 토대였던 각 지노협은 각 지역에 존재했던 노동단체들과 활동가들의 투쟁결과라 할 수 있다. 1987년 대투쟁의 과정에서 밀접하게 결합했던 단체와 활동가들은 투쟁과정에서 배출된 선진노동자들을 조직하는 활동, 선진활동가들간의 교류구조 형성활동, 노동조합간의 일상적 연대구조 형성 활동, 지역 내 연대투쟁 조직활동 등을 전개했다” (전 전노협 조직국장)
다른 한편 노동운동단체들은 전국적으로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87년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항의하여 파업에 들어가자, 이를 전국 차원에서 지원하기 위해 1988년 3월 5일‘노동조합탄압저지 전국노동자공동대책협의회’(전국공대협)를 구성하였다. 여러 지역과 전국에서 노동운동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전국공대협은 4월 2~3일과 5월 1일 전국 규모의 집회를 주도하면서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을 벌였고, 하반기에는 노동법개정투쟁을 벌였다. 이후 전국공대협은 전국의 민주노조들을 추동하여 6월 3일‘노동법개정전국노동조합특별위원회’(노조특위)를 구성하였다. 이 노조특위는 민주노조들이 전국 차원으로 연대하기 시작한 최초의 일이었다.
한편 전국공대협 구성원들은 정세에 신속하게 대처하고 사업수행의 책임과 추진력을 담보하기 위해 상설적인‘공동투쟁체’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아 1988년 6월 7일 전국노운협을 결성하였다. 1987년 이후 전국의 노동단체들이 정치적 입장을 떠나‘공동실천을 위해’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한 것이다.
가입단체는 서울노운협 13개, 인천노운협 6개, 경기남부노운협 4개, 충남민주노동자협의회, 전북노운협, 전남노동자공동위원회, 부산노동자협의회, 대구노동자협의회, 경남노동자협의회, 울산사회선교협의회, 현대해고자복직실천협의회 등이다. 여기에는 독자적 활동을 고집하던 석탑계열과 한국노동교육협회와 같이 단순한 노동상담과 노조교육을 담당하는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노동운동단체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전국노운협은“전국적이며 공개적인 상설공동체, 민주노조운동을 지원 강화하고 민주노조운동보다 앞서가는 자주적인 운동체, 노동운동단체의 전국단일대오의 과도기적 형태”로 성격을 규정하였고, 활동 목적을“노동운동의 발전을 도모하고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 민주 통일과 노동해방을 실현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전국노운협은 결성 이후 민주노조의 공동임투 지원, 노동운동탄압공동분쇄투쟁, 현장투쟁에 대한 지원 같은 여러 사업을 통일적으로 벌여나갔다. 한편 전국노운협은 노동법개정 공청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노조대표자들과 10월6일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를 결성하였다. 1988년 11월 13일 첫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는 주체로 서기도 하였다.
전국노운협은 투쟁활동만이 아니라 전국 조직건설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전국회의 결성과 운영과정에 참여하였고, 임투 시기에는 전국투쟁본부 뿐만 아니라 지역 투쟁본부의 대부분의 실무 집행을 담당하였다. 또 전국노운협은 정치운동의 대표성을 부여받아 전국회의의 투쟁사업과 전노협건설투쟁에 긴밀하게 결합하여 정책기획과 대중 토론을 조직하기도 한다. 이후 전노협준비소위원회에도 전국노운협 대표 1인이 전국회의의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자격으로 회의에 참여해 1989년 12월 17일 준비위 발족에 노력했다.
또한 전노협이 창립된 이후 상근활동가는 모두 44명이었다. 전국에 있는 지노협 상근활동가의 수는 전체 130여명 정도로 엄청난 수의 실무집행력을 전국노운협이 거의 감당하였다.
결성초기 80%정도가 전국노운협에서...나머지 15%정도는 노동교육협회, 5%정도는 반합법 정파조직에서 수혈하였죠. 상임집행위원회는 전국노운협 60%, 노교협40%정도의 역량으로 구성되었어요”(전 전노협 조사통계국장, 김종배)
뿐만 아니라 신규노조결성, 노조민주화사업, 선봉대 조직, 소모임 조직 같이 단위노조나 지노협에서 감당할 수 없는 여러 사업들을 전국노운협의 활동가들이 담당하였다.
이처럼 전국과 지역, 사업장에서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이 시기 정권의 탄압에도 전노협을 사수하고 민주노조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전국노운협은 전국의 여러 노동운동단체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안에는 조직 위상을 둘러싼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1990년 하반기 들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일부 세력은 전국노운협을 정파조직을 배제한 선진노동자 중심의 조직으로 재편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전국노운협을 공동투쟁을 위한 협의체로 세워내려려하였다. 결국 대립이 깊어져 마침내 조직분리로 나타나 공동투쟁협의체를 주장하던 세력이 1990년 11월 탈퇴하여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라는 조직을 만든다. 거기에 전국노련에서도 합법정당활동을 추진하던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세력이 분화되었다.
이후 전국노운협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직으로 왜소화된다. 물론 분리된 이후 축소된 전국노운협과 전국노련은 활동의 방향에 차이를 갖고 있었지만 노동운동단체로서 전노협의 지원과 공동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1993년도 전노대 결성과정에서 노동운동단체의 참여를 배제하면서 노동운동단체는 민주노조운동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여 새로운 활동방식을 모색해야 했다.
이처럼 1980년대 노동운동세력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변화된 노동운동의 요구에 따라 지역에 노동운동단체를 결성하고 이어 1988년 6월 전국노운협을 결성해, 처음으로‘노동해방’의 깃발아래 모여 민주노조운동을 지원하고 사수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 노동운동단체는 민주노조운동이 사업장에서 지역과 업종으로 그리고 전국조직으로 발전하는데 지렛대 역할을 하였고, 노동자들이‘조합원’으로 머무르지 않고 노동자 계급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운동단체 내부의 정치적 입장 차이가 굴절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하면서 노동자들이 정치활동의 주체로 변화하는 것을 저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전노운협을 비롯한 노동운동단체의 활동은 1980년대 노동운동이 1987년 이후 단절된 것이 아니라 지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을 노동자의 눈으로 제대로 복원하려면 민주노조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운동단체의 활동, 정치조직건설운동 등을 포함하여, 그 활동과 상호작용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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