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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5월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1-06 조회 913
 

5월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전화를 받았다. 뉴스레터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었지만 차마 못쓰겠다는 말을 못했다. 내가 특별히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혹은 남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살지도 못하였는데. 한내 사무처 동지들이 매달 뉴스레터를 뽑아내고 있는데 보이지 않아도 고생할 동지들을 생각하니 차마 못쓰겠다는 말을 하지 못해 단사 사정을 둘러대고 한 달 연기를 하였다. 그게 11월... 그 한 달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약속한 달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살아온 길’이라는 사뭇 무겁기까지 한 그리고 아직은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는 나이에 살아온 길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자니 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동지들이 올리신 글을 기웃 기웃 훔쳐보기도 하였으나 참으로 난망하였다. 하지만 쓰기로 한 것. 써야 했다.

내 삶의 방향에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나를 흔들었던 것은 내 고향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바로 1980년 광주항쟁이 벌어진 해였다. 그 전 해인 79년에 박정희가 죽었고 TV로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 식구와 함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까지 내 또래의 남자아이들의 꿈이 거의 비슷했듯이 나도 육사를 가서 군인이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였다. 나시찬이 주연으로 나오던 ‘전우’라는 드라마에 열광했던 우리. 그리고 그 시절 비슷비슷한 반공소재의 영화에 몰입했던 우리로서는 군인이라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이고 심지어 옳은 일(!)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극우(!) 어린이였던 나의 세계관을 흔들어 댔던 것은 바로 80년 광주항쟁이었다.
커오면서 여러 자료를 통해서 알게 된 총체적 사건에 내가 경험한 일이 뒤섞여 어떤 것이 실제로 내가 본 진실이었는지 헷갈리기까지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아주 생생하다.
 

프랑스 독립 종군 사진기자인 패트릭 쇼벨이 1980년 5월에 직접 찍은 전남도청 복도 광경.



어느 날부터인가 학교에 가면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들은 소문을 보았던 사실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우리 집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사실 그 시절의 광주라는 도시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어떤 경우에도 약속시간 20분 전에만 집을 나서면 늦지 않았던 도시였다) 도심에서 벌어진 그 모든 끔찍한 일들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모두 알게 되었던 도시였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앞서서 끼어들라치면 약속이나 한 듯 나를 제외하고 모두 입을 다물던 어른들의 침묵. 너 저리 가서 공부해! 라고 밀치시던 어머니와 어른들. 어떤 집에 총탄이 날라들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5월 초여름 더위에 겨울 이불을 꺼내 우리에게 덥고 자라 하시던 그때. 매일 하늘을 날아다는 헬기에서 뿌려대던 삐라. 시내가면 콜라를 공짜로 준다는 소리에 혹해서 친구와 함께 친구아버지의 짐바리 자전거를 타고 나가본 도청 분수대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 옆집 대학생 형이 행방불명이었다가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에 총을 메고 우리 동네에 나타나서 그 집 아주머니가 까무러친 일. 시민군이 지나가면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나가서 음식과 물과 먹을 것을 트럭에 버스에 올려주었던 모습들. 내 자식 같다면서 안타까워하시는 우리 어머니.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걱정 때문에 어머니의 강요로 집에 감금된 고등학생 우리 형. 광주가 진압된 후로 도망친 시민군을 찾고자 우리 동네까지 왔던 계엄군의 탱크와 트럭에 가득 탄 군인의 모습. 휴교가 끝나고 등교한 학교의 표현하기 힘든 침묵들.

그 모든 일들은 나에게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삐라에 나온 대로라면 저 많은 사람들은 폭도였고 내가 보고 들은 일들은 거짓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국가라니!! 게다가 실제로 가까이에서 바라본 계엄군은 정말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내가 되고 싶어 했던 군인이라는 존재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섭고 저주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후 정확히 말하면 5학년 2학기쯤이 되어서 나의 장래희망에서 군인은 지워졌고 나의 관심은 급속히 역사나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서클 선배들이 대학을 진학한 후 우리를 만나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건네주는 책은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이었고 87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6월에 길거리에서 매일 데모를 하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5월 나의 고향 광주에서 경험한 그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5월의 광주는 내 삶의 이정표를 전환시킨 계기였음은 분명하다. 광주는 학살자를 처단하지도 정신을 계승하지도 못한 채 그 정신을 팔아먹는 자들만이 횡횡한 채로 왜곡되어 있다.

광주를 계승하는 것 그리고 광주를 넘어서는 것이 내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는 그 꿈에 얼마나 가까이 있을까? 우리에게 광주는 100여 년 전의 파리꼼뮌보다, 40여 년 전의 68보다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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