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990년 4월 방송민주화투쟁 백서 이영기(노동자역사 한내 자료국장) KBS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1927년 라디오방송 송출을 자신들의 역사의 시작으로 적고 있다. 『KBS 1990년 4월 투쟁백서』에서는 그 이후 64년의 역사를 “ ‘민’에 의한 방송이 아닌 ‘관’에 예속된 반민주적, 반민족적 방송사였다.” 고 고백하고 있다. KBS는 1987년 6월 항쟁과 그 이후 조금씩 민주화가 이행되는 과정에서 맞이한 첫 민선사장체제(서영훈 사장. 1988년 11월~1990년 3월) 아래에서 80년대 5공 정치 특별채용자들을 퇴진시키고 <광주는 말한다>, <인권선언>, <르포60>, <심야토론> 등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력의 입맛대로 굴지 않는 방송은 정권에겐 손보기의 대상었고 다시 장악해야 할 지배도구일 뿐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월과 2월 연예PD촌지사건, 법정수당변태지급사건을 왜곡, 확대하여 KBS와 KBS노조의 이미지와 신뢰를 떨어뜨리고 구성원들을 위축시켰다. 그리고 1990년 3월 3일 서영훈 사장을 강제 퇴진시키고 4월 3일 정권의 대변인 격인 서기원 사장을 임명한다. 1990년 4월 KBS의 방송민주화투쟁은 노태우정권의 방송장악에 맞서 36일간 방송제작 거부로 저항한 투쟁이다. 3월 초부터 KBS구성원들은 노조를 구심으로 ‘KBS자주권수호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영훈사장 퇴진 철회-서기원 사장 임명 저지를 위한 농성 투쟁 중이었다. 4월 12일 KBS에 백골단이 투입되어 117명이 연행되자 즉각 방송제작 거부 결의, 13일부터 투쟁에 돌입했다. 여기에 4월 30일 2차 공권력 투입-333명 연행 직후 MBC와 CBS 방송노조가 (시한부)방송제작거부에 동참한다 역시 최초의 방송제작거부 연대투쟁이다. 전노협과 민족민주운동진영도 투쟁초기부터 KBS투쟁 지원과 지지, 연대투쟁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즉자적으로(계획됨 없이) 돌입했던 제작거부투쟁은 연일 2,000명~5,000의 투쟁대오가 모이는 투쟁의 열기를 승리로 이어가지 못했다. 지도부의 혼선과 분열 등 지도역량의 한계, 지도부와 투쟁대중의 의식의 한계에서 비롯한 언론노동자들만의 고립된 투쟁(외형적으로는 전국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이었지만), 강경책과 교란책을 동반한 정권의 집중탄압 등 내외부의 한계 등을 그 원인으로 말하고 있다. KBS비대위는 서기원 사장 퇴진 등 투쟁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5월 18일 방송제작에 복귀한다. 이 투쟁은 다음과 같은 성과들을 평가받고 있다. ① 1990년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 조성으로 위축되어 있던 민족민주운동, 노동운동 진영에 기폭제 역할을 하고 ② 국민들에게 노태우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를 폭로하고 ③ 이후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결성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 등이다. 백서는 1990년 4월 KBS 방송민주화 투쟁의 평가, 반성과 앞으로의 전망과 과제를 세우기 위해 투쟁 1주년을 맞이하여 1991년 5월 만들어졌다. 백서에는 2편의 토론내용(‘기획방담-4월 투쟁의 평가와 반성’, ‘KBS 4월 투쟁 1주년 심포지움-방송민주화투쟁의 평가와 전망’)과 발제문, 노동운동가, 정치인, 사회학자, 신문언론인 등의 투쟁평가와 전망에 대한 글, 국내외 연대투쟁에 대한 각 주체들의 글, 그리고 투쟁에 참여했던 다양한 KBS인들의 투쟁 참여와 1주년의 소회 글들이 실려 있다. 그리고 법정투쟁기록, 투쟁일지, 성명서 모음, 설문조사분석 자료 등이 모아져 있다. 백서는 투쟁의 성과와 한계 등의 평가를 하나의 합의된 결론으로 도출하거나 정리해서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투쟁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또는 관찰했던) 내․외부의 시선으로 각자가 정리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 참고자료 -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전노협백서3권 1990년 , 전노협백서 발간위원회 노동운동역사자료실, 논장, 2003 - 『언론노련 10년사』,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