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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 시기 : 1989년 7월 22일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부노협)는 1989년 7월 22일 부천지역 42개의 민주노조 4,000여 명으로 출범했다. 이어 7월 24일에는 부천공전 운동장에서 2시간씩 총회시간을 빼고 참석한 조합원 2,000여 명과 함께 ‘부노협 창립 보고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부노협 준비소위’의 북부지구 대표의 소속 사업장인 경원세기노동조합은 대의원대회에서 부노협 참여가 부결되고 말았다. 이후 경원세기노조가 ‘부천지역 금속사무소’로, 한국노총으로 합류하는 과정을 겪음으로써 부천지역 민주노조 진영의 역량이 총집결하지 못한 채 부노협을 결성하게 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1987년 9월부터 자본가들의 탄압이 휘몰아쳤다. 새서울산업, 우진전자, 한국스파이서 등에서 위장 취업자에 대한 구속, 조합원들과의 이간질, 구사대를 통한 폭압적인 탄압이 거세졌고, 작업물량을 하청으로 빼돌려 회사의 위기를 조장하기도 했다. 9월을 경과하면서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탄압에 대한 공동대처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이러한 연대의식은 노조결성 당시 지원을 받은 ‘한국노총 부천시협의회’로 기대가 모아졌다. 그러나 ‘한국노총 부천시협의회’가 새서울산업의 민주당사 16일 농성 과정에 성명서 한 장 내는 것조차 이 핑계 저 핑계 끝에 끝내 거부하자 특히 신규노조들이 부천시협의회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초 원방에서 노조탄압 중지와 부서폐쇄 계획 철회, 적정 작업물량 보장을 내걸고 파업농성에 돌입했고 이에 대한 지원투쟁이 본격화되면서 ‘한국노총 부천시협의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원방 파업투쟁은 부천과 인천지역 신규노조와 민주노조들을 중심으로 37개 노조(인천 14개)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연일 지원투쟁을 벌인 결과 6일 만에 승리하게 되었다. 부천지역에서는 이를 계기로 15개 안팎의 노조 위원장들을 중심으로 ‘연대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초보적인 연대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들어 부천지역에서는 89개의 노동조합이 새롭게 결성됐다. 금산전자, 유한전자, 대아, 건화상사 등의 투쟁이 이어지면서 지역 노동운동이 활성화된 결과다. 특히 범우전자의 경우 여성노동자가 대부분인 사업장이었기 때문에 지역 규찰대가 그곳에 상주하면서 지원했는데, 이러한 활동은 지역 내 연대활동을 한층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5월에 있었던 한국노총 부천시협의회 의장 선거는 지역연대 조직체 건설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선거에 대한 대응방안은 크게 “적극 참여”와 “독자적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자”는 의견으로 나뉘어져 오랜 토론을 거친 끝에 경원세기노조 위원장 장진수가 위원장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그 어느 쪽 입장에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88년 초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임금인상투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6~7월부터 “부천지역 민주노조 진영의 구심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민주노조들의 핵심적인 과제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에 여름에 위원장단 수련회를 거치고 난 뒤 9월에는 위원장단을 중심으로 ‘부천지역 금속노동조합연합 준비위원회(‘부금노련 준비위’)’가 결성됐다.
한편 1988년 전국노동자대회를 거치면서 부천지역 노동자들 사이에는 지역협의체 건설을 두고 본격적으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부금노련 준비위’가 ‘노총 민주화론’을 발상함으로써 조합원 대중의 결의를 적극적으로 조직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대토론회가 12월 대윤전자 식당에서 개최됐지만 상호간의 의견차이만 뚜렷해진 채 1989년을 맞게 되었다.
1989년 들어 조직논쟁과 함께 임투 준비 체계를 놓고 의견대립이 확대되어 갔다. ‘부금노련 준비위’를 주장했던 쪽에서는 노총과의 역할분담 하에 ‘쟁의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 했고, ‘부노협’을 주장했던 곳에서는 ‘임금인상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임투 전반에 대한 사항을 공동으로 모색하자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러한 의견대립이 쉽게 결론나지 않자 양자 모두는 지역 연대조직을 1989년 임금인상투쟁을 치룬 뒤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로 하고 2월에 ‘부천지역 임금인상투쟁본부(투본, 본부장 한경석 신광전자노조 위원장)’를 결성했다. 이로써 부천지역 최초의 실질적인 연대기구이자 부노협의 전신인 투본이 탄생했다. 투본은 급조된 조직이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노조결성과 파업을 지원했으며, 임투속보와 ‘부천지역 임금인상 기초 자료집’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투본은 1989년 임투를 거치면서 123개의 신규노조 결성을 지원했음은 물론이고 기존 노조들의 임투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신규 사업장의 확대와 투쟁 승리의 여파를 타고 4월 9일, 임투승리 결의대회를 원천봉쇄된 성심여대에서 부천역으로 옮겨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부천지역 최초의 가두시위가 전개되었고, 이를 이유로 한경석 투본 의장과 임동섭 상황실장이 구속되자 13일, 14일, 15일에 걸쳐 총 49개 노조 5,000여 명이 참가한 총파업이 전개됐다. 그 뒤로 한국피코 투쟁, 5․1절 가두투쟁이 투본 주최로 진행됐으며 5월 12일에는 당시 파업 중이던 8개 노조가 ‘임금인상 및 민주노조 사수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급박하게 진행된 투쟁 과정에서 “부노협을 건설하자”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통일된 슬로건으로 형성돼 갔다. 이후 5월 31일 부천지역 노동조합 확대간부회의, 6월 13일 반도스포츠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는 4일간의 단식투쟁 과정에서 확인된 조합원들의 결의를 모아 부노협 준비소위 결성, 6월 28일 부노협 강령과 규약 초안 완성, 6월 29일 40개 노조가 참여해 ‘부노협의 성격과 활동방향’에 관한 교육과 토론, 7월 3일 지구별 부노협의 필요성과 역할 교육, 7월 15일 노조별 부노협 참가 결의 및 파견대의원 선출을 거쳐 7월 22일 42개 노조 4천여 명이 참가한 부노협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부노협 초대 의장은 창립 당시 한국신광전자노조 위원장이었던 한경석이 선출됐다. 부의장에는 김용국(화인보원노조 위원장), 장정임(금산전자노조 위원장), 오신근(우일노조 위원장), 윤원구(대윤전자노조 위원장), 회계감사에는 민복기(유신정밀노조 위원장), 사무처장에는 양용진(동양에레베이터노조 위원장)이 선임됐다.
그밖에 조직국장 임동섭(전 원방노조 위원장), 교육국장 임한철(삼령정밀노조 위원장), 홍보국(미정), 쟁의지도국장 윤석인(삼근물산노조 위원장), 문화국장 김진웅(대흥기계노조 문화부장), 조사통계국장 박미경(흥양노조 위원장), 여성국장 김순덕(공성통신노조 위원장) 등을 사무처 집행국의 국장에 선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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