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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가보는 내 나라
저 도시의 흙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아픈 역사, 여수
서동석 (통일문제연구소 회원)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1945년 8월부터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멈춘 날까지 8년 동안의 세월은 아무리 곱씹어도 어떻게 우리 겨레에게 이런 일들이 겹쳐 일어났는지 너무 슬픕니다. 돌아보면 이 비극의 시작은 전승국으로 이 땅에 진주한 미군의 한반도 정책입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군은 조선인들의 자발적 준정부기구인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건준의 발전적 해체에 이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또 김구주석이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패망한 한반도주둔 일본군을 내세워 치안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이틈을 타서 친일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고 그들만의 조직을 만듭니다. 이들은 그해 12월 모스크바회의에서 채택한 신탁통치를 교묘하게 왜곡하여 친일의 과거를 거적때기로 덮고 자신들이 독립투사인냥 거리로 나섭니다. 신탁통치의 내용은 ‘한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돕고, 그에 필요한 적절한 방책을 연구, 조정하기 위하여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자는데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하고, 협의를 위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이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의 묵인인지 아니면 후원인지, 남한의 언론은 이 회의에서 ‘신탁’을 결정한 듯이 보도하였습니다. 그것도 소련이 적극 주장한 것으로 말입니다. 한반도에 대한 미, 영, 중, 소 4개국이 참여하는 직접지배방식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고, 영국은 이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소련은 한반도의 즉각적인 독립 및 민주주의 절차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신문보도의 내용과는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반세기에 이르는 식민통치에 대한 감정이, 그것도 해방이 되었다고 하면서 역시 미군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판에 이 왜곡보도는 불을 지른 꼴이 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친일반민족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파와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좌파의 대립은 시간이 갈수록 극렬한 양상으로 치닫습니다.
여수는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지독히도 아픈 역사가 배인 도시입니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봉기가 일어납니다. 미군정을 반대하고 망국적 분단정부로 가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봉기였습니다. 서북청년단 등 외지의 극우세력이 가세한 진압대는 그 다음해까지 제주도민 5만여 명을 살해합니다. 이승만정부는 제주봉기 진압에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를 투입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진압에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연대는 제주도로 가지 않습니다. 여수항에서 제주도로 가기로 한 시각, 1948년 10월 19일 저녁8시. 남조선노동당(남노당) 14연대조직책 지창수상사의 지휘로 연대원은 병기고와 탄약고를 장악하고, ‘친일세력이 장악한 경찰타도, 제주도출동결사반대, 분단정권 거부’를 내걸고 총궐기를 주장합니다. 봉기군은 이에 반대하는 하사관 3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연대를 완전 장악합니다. 봉기군은 다음날 새벽, 여수의 각 관공서와 주요기관을 접수하였고, 그날 낮에는 순천까지, 다음 날엔 남원, 구례, 보성을 차례로 장악합니다.

<여수 시내 전경 _사진 여수시>
국방경비대에서 봉기군이 된 14연대가 있던 곳, 여수시 신월동에는 지금 한국화약공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수수협냉동창고를 돌아 해안도로를 달리면 왼쪽으로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바다를 끼고 오른쪽에 그 여수 앞바다를 굽어보는 산이 우뚝 서있습니다. 이곳이 부대자리입니다. 이곳 주민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큰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주위의 땅도 기름져서 이곳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으로 풍족한 생활을 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 복 받은 마을이 우리 현대사에 비극의 마을로 전락한 데에는 패망을 앞둔 일본의 저주가 작용했습니다. 1942년 8월. 이 마을의 앞바다가 디귿자(ㄷ) 모양이라 ‘천혜의 요새’임을 확인한 일본해군은 비행장을 만들고자 바닷가에 호안을 쌓고 콘크리트 포장길을 냈습니다. 거의 완공단계에 들었을 때 일본은 패망하였습니다. 그 뒤 미군정이 이 시설을 이용하다가 남한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곧바로 국방경비대가 들어섰습니다. 세월이 한참 흘러서는 그 자리에 화약공장이 들어섰으니 참 착잡합니다. 화약공장이라 그런지 경계도 삼엄합니다. 정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니 대뜸 경비원이 다가옵니다. 무슨 일이냐고 용무를 묻는 경비원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공장은 산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빙 둘러친 철책의 중간 중간에 초소가 있어 그 안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사진은 찍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여수의 비극은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이 지역에 투입된 군경이 만들었습니다. 10월 21일 정부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에 법에도 없는 ‘계염령’을 선포합니다. 장갑차를 비롯하여 중화기로 무장한 병력을 앞세워 25일에는 여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탈환하였습니다. 여수 진압작전은 26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전 육군 병력의 3분의 1과 공군, 해군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여수는 앞바다에 떠있는 미군의 함정에서 발사한 포탄으로 완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여수수산시장과 선착장이 근방에 있어 늘 북적거리던 이곳은 1948년 10월 26일 국군의 육해공군 진압작전에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그때 여수 시내에서 좀 떨어진 집이란 집도 모두 구멍이 뚫렸다고 할 만큼 포격과 사격은 엄청났다고 합니다. 나중에 국회에 보고된 피해현황을 보면 시의 6할이 파괴되고 시내 중심가의 주택 1700여 호, 그 외 2600여 호가 완전 잿더미, 이재민 2만 수천 명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온갖 병력과 화력을 다 동원하여 초토화하며 여수에 진입했지만 시내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봉기군은 앞서 24일 밤에 병력을 빼내어 지리산, 백운산 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산사람이 된 이들은, 최종적으로는 1963년 11월, 정순덕을 마지막으로 ‘빨치산’이 되어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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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26일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장면.
호남일보 이경모 기자가 찍었다.>
여수를 장악한 진압군은 이때부터 살인마가 됩니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에 민간인 4만 명을 집결시키고 봉기군과 이에 협조한 좌익을 색출하는 작업에 들어갔고, 여수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좌익을 선별하는 작업은 마구잡이식이었는데, 우익인사가 경영하던 고무신공장을 좌익이 털어갔으므로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모두 ‘빨갱이’라고 하여 즉결처형을 했습니다. 손에서 화약냄새가 나기 때문에, 군인양말을 신었다고, 학생복이나 국방색 속옷을 입었다고, 머리를 짧게 깎은 죄로 살해하였습니다. 또 경찰이나 우익진영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끌어내어 때려 죽였습니다. 이 손가락질이 얼마나 무서우면 ‘손가락총’이라고 했을까요. 일본군출신의 군간부는 ‘칼 시험을 해 보겠다’며 일본도를 빼들고 청년 7명을 모두 베어 죽였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진남관, 종산국민학교에서도 거의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태백산맥』(조정래)에 그려졌듯이 순천도, 고흥도, 보성도, 벌교도.
‘진압군의 협력자 색출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시내는 공포분위기로 완전히 뒤덮였다. 14연대는 이른바 ’반동분자‘인 경찰관, 우익인사, 우익 청년단체원들만 지목하여 처벌했고 일반 시민들은 처벌대상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큰 우려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국군은 전 시민을 일단 혐의자로 의심했기 때문에 이러한 공포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진압의 대상‘이었다. 무자비한 몽둥이 고문에 견디지 못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쉴새없이 흘러나왔다. 참수 즉결총살 등으로 여수시내 중심부의 시청과 경찰서 주변에는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경찰서 뒤뜰에는 시체가 대강 정렬돼 있거나 혹은 난잡하게 포개져 있어 그 처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만성리로 가는 터널 뒤쪽에는 집단 총살된 사람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같이 가담자 색출작업은 ’같은 민족으로서는 도저히 하지 못할 일‘이었다. 여수는 공포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성대경 엮음,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역사비평사 간)「여순사건 당시의 민간인 학살」중에서)
여순사건의 피해는 끔찍합니다. 앞서 인용한 대목은 극히 일부입니다. 이 도시에 사시는 분 얘기에 따르면, 제주 4.3은 뭍에서 파견된 군경과 청년단이 한패가 되고 이에 맞서 제주도민이 싸운 사건인데 반해 여수사건은 같은 고을에서 대를 이어 오랫동안 살던 사람끼리 피를 본 사건이라 그 상처가 더 깊고 후유증도 심하다고 전합니다. 그때의 원한으로 자식끼리 혼례도 못하게 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합니다. 정부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를 하고자 그때의 피해자에게 증언을 듣고자 하여도 선뜻 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경우가 있어 그렇답니다. 남해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여수엔 그런 아픔이 서려있습니다. 잘 포장된 도로 밑 흙에는 아직도 그때 상흔이 고스란히 있을 겁니다.
한반도에서는 가장 마녁끝(남단)에 있는 역, 여수역. 서울에서 호남선을 타고 오다 익산역에서 전라선으로 갈아타고 여수역에 내렸습니다. 내리고 보니 내가 탄 기차에는 해수욕을 즐기려는지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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