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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10월 인민항쟁, 노동자와 농민이 도시와 농촌에서 함께 일어나다!
첨부파일 -- 작성일 2008-11-10 조회 1810
 

뉴스레터 [한내] 2008. 10월 (제2호)

이달의 노동자역사
10월 인민항쟁, 노동자와 농민이 도시와 농촌에서 함께 일어나다!

  글  : 안태정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사진 : 정영진,『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교과서에 없는 역사, 10월 인민항쟁


1946년 10월 인민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몇 가지 표현을 보자. 예를 들어, 부르주아계급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은 자기의 선조 부르주아계급이 주도하여 2개월여에 걸쳐 200만이 넘는 민중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한 1919년 3?1운동을 국경일로 정하여 해마다 기념한다. 그러나 한국은 노동자와 농민이 주도하여 2개월여에 걸쳐 200만이 넘는 민중이 미국제국주의 등에 대항한 10월 인민항쟁을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한국은 그 기억을 애써 지우려는 듯이 ‘6?25전쟁’ 당시 육군 3사단 23연대 병사들이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1950년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기념한다. 10월 인민항쟁에 대한 역사 서술은 어떤가. 내용은 제쳐두고 양만 보자. 예를 들어, 한국은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2008년)에서 3?1운동에 대하여 1쪽의 지면을 채웠으나 인민항쟁에 대해서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검정교과서인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금성출판사)는 3?1운동에 대하여 6쪽의 지면을 채웠으나 인민항쟁에 대해서는 5줄도 채우지 않고 있다. 소위 ‘민중사학’을 주창하는 역사연구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가령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는 3?1운동에 대해서는 7쪽이 넘는 지면을 채웠으나 인민항쟁에 대해서는 1쪽의 지면도 채우지 않고 있다.

여기서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부르주아계급이 사회의 지배계급일 수밖에 없는 이유 하나는 철저한 계급의식적인 역사인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노동자계급 등 민중이 피지배계급일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는 철저한 계급의식적인 역사인식을 지니고 있기는커녕 오히려 부르주아 계급의식에 종속되어 있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19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인민항쟁

10월 인민항쟁에 대한 연구성과를 간략하게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다. 인민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이 날은 9월 총파업을 파괴하기 위하여 미군정 무장경찰 등이 9월 30일 새벽 2시부터 서울 용산의 철도공장에서 농성중인 철도노동자 총파업단 본부를 공격하여 2명 이상을 살육하고 1,400명 이상을 검거한 그 다음날이었다. 10월 1일 정오 무렵 약 1,000여 명의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쌀을 달라고 항의했다. 오후 1시경에 대구역 앞에 동맹 파업단이 집합하여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간판을 역전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에 본부에 내걸자, 경찰당국은 군중의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수천 명으로 늘어난 군중들은 무장경찰의 철퇴를 조건으로 내걸고 해산을 거부했다. 오후 5시 30분쯤에 역 앞에서 운수경찰관과 운수노조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출동한 경찰 수명이 군중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며, 6시 30분경 군중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이 발포하여 군중 1명이 사망했다.



10월 2일에는 대구경찰서, 대구역 앞 등에서 오전부터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대구경찰서 앞에서는 전날 사망한 사람의 시체를 들 것에 싣고 항의하는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수천 명의 군중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정오경 경찰서를 점거했다. 비슷한 시간에 대구역 앞의 파업투쟁위원회 본부 앞 단상에서 선동하는 파업단 측 사람들을 출동한 경찰이 사살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경찰을 공격함으로써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좌익’ 측의 주장에 따르면 민간인 18명, 경찰 4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대구경찰서가 군중들에 의해 접수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군중들은 시내 도처에서 경찰을 공격했고, 그 결과 많은 경찰관들이 피살되었다. 이에 미군정 측은 전차 4대를 출동시켰고, 오후 7시에는 계엄령을 발동했다. 그 이후 대구에서의 항쟁은 점차 가라앉게 되었다. 이것으로 노동자와 민중의 항쟁이 끝났다면 10월 인민항쟁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항쟁은 38선 이남의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 도시와 농촌에서 함께 만들어 내었다.



10월 2일 저녁 이후 대구항쟁의 여파는 경북의 여타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주변의 가까운 지역에는 선동자들이 진출했고 지역주민들이 일어났다. 2일 밤에서 4일에 이르기까지 항쟁은 태백산맥 이동(以東)의 몇 개 군을 제외한 경북 전역에서 발생했다. 달성군에서는 군중들이 달성경찰서 관내의 9개 지서 가운데 8개 지서를, 5개 파출소 가운데 3개 파출소를 점거했다. 칠곡군에서는 군중들이 낫과 도끼 등으로 경찰을 공격하여 7명의 경찰이 사망했다. 성주군에서는 3,4천 명의 군중들이 21명의 경찰들을 유치장에 가두고 이들을 생화장시키려 했으나 경찰응원대가 도착하여 이를 저지했다. 항쟁이 군 수준에서 가장 대규모로 발생한 영천군에서는 수만 명의 주민들이 봉기하여 경찰을 비롯한 행정관리들을 공격했고 경찰서, 군청,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 출장소 등의 관공서를 불태웠다. 특히 그 와중에서 그 해 여름 무리하게 하곡공출을 강요했던 영천군수는 군중들에 의해 생화장을 당했다.




선산군에서는 ‘좌익’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적으로 구미경찰서와 면사무소를 접수하여 이를 인민위원회와 보안서로 바꾸었고 인사배치까지 했다. 일제 때부터 항일운동을 해 왔던 박상희(박정희의 친형)는 선산군에서 항쟁을 지도했던 중심인물 가운데 한사람으로 항쟁 직후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살되었다. 의성군에서는 5천여 명의 군중들이 별다른 유혈사태 없이 경찰서를 비롯한 행정 관서를 장악했다. ‘좌익’세력이 강력했던 예천군에서는 사전연락을 받고 대비했던 경찰과 이들을 포위 공격하려는 군중 사이에 경찰서를 둘러싸고 교전이 벌어졌다. 예천 이북의 영주군, 봉화군에서도 경찰서를 공격하는 군중과 응원대가 올 때까지 자신들을 방어했던 경찰이 대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경북에서는 22개 군 가운데 19개 군에서 항쟁이 발생했다.



인민항쟁은 경북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도 파급되었다. 경남에서는 10월 7일에서 14일까지 각지에서, 10월 17일에서 19일 사이에는 충남의 서북부 지역에서, 10월 20일에서 22일 사이에는 경기 서북부의 38선 부근에서, 10월 29일에서 11월 첫째 주 사이에는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항쟁이 발생했다. 10월 29일서 11월 4일까지는 나주와 화순을 중심으로 한 전남 중북부 지역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했다. 11월 7일 이후에는 해남을 중심으로 한 전남의 남쪽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12월 8일에는 전북의 전주에서 항쟁이 발생했다. 


역사는 ‘대표되던’ 사람들이 ‘대표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알아야 바로 선다. 

10월 인민항쟁의 전개과정을 통하여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 요구한 것을 간추려보자. 즉 경찰을 비롯한 ‘친일파’ 제거, 식량난과 생활난 해결, 미군정 정책 비판, ‘좌익’인사 구속에 대한 항의와 민주주의의 실천 등이 그것이었다. 그들의 전반적인 행동과 요구의 밑바탕에는 ‘해방’이후 1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민중을 위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미군정과 그 후원 하에 ‘친일파’에 의한 기존의 지배체제가 유지되고 식량문제를 비롯한 생활난만 더해지는 것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여기서 또 나는 생각한다. 1945년 8월 ‘해방’이후 38선 이남의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을 ‘대표하던’ 조선공산당과 같은 정치세력은 ‘의회주의적’으로 국가와 자본 등에 의해 발생된 부자유, 불평등, 상호대립 등이 없는 세상의 실현을 향해 한걸음 내딛기 위하여 미군정과 부르주아 정치세력과의 협의, 즉 ‘미소공동위원회’ 사업 참가, ‘민족통일국가’ 지향 운동 등을 벌였지만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고. 그리하여 이번에는 ‘대표되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직접적으로 총파업이나 민중봉기 같은 대규모 항쟁을 통하여 그들을 ‘대표하던’ 정치세력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것 역시 무자비한 탄압만 받았다고. (최근의 ‘촛불항쟁’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세계사적인 차원이든 일국사적 차원이든 국가와 자본 등에 의해 야기된 부자유, 불평등, 상호대립 등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세력의 ‘의회주의적’ 방식과 노동자와 농민 등의 총파업과 민중봉기 같은 방식은 모두 국가와 자본 등의 탄압만 받거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귀결되지 못했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인류가 참된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구가하는 세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자유와 불평등과 상호대립 등을 발생시키는 국가와 자본 등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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