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라면 노동자의 기억 (13)
* 1차 투표가 끝난 후 일주일후에야 2차 투표일이 잡혀졌다. 11월 11일이었다. 1차 투표가 끝난 지 15일후였다. 회사 간부들의 출장, 회사의 업무가 바쁘다는 것에서부터 선거관리위원장의 교회 부흥회 등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1차 투표 후 15일후에 하기로 한 것이다. 몇몇 선거관리위원들 역시 조합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그렇게 이실직고를 한 터였다. 어용후보인 유완영 후보 측 선거 참모들 역시 2차 선거일이 늦게 잡힌 이유를 무용담처럼 떠벌이며 돈과 조직엔 장사가 없다느니, 우리 회사의 경우 회사 측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죽었다 깨도 노조 위원장이 될 수가 없다는 얘기를 장담하고 다녔다. 선거자금과 조직의 열세에 회사 측의 선거방해로 인해, 안 그래도 힘든 선거운동에 엎친 데 덮친 것이 길게 잡힌 2차 선거일이었다. 유완영 후보 측 선거 운동원들은 회사 측의 배려로 마음 놓고 결근을 하며 지부에서 선거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 측 선거 운동원들은 1차 선거 때 연차나 월차, 생리휴가까지 모두 써버려 이제는 결근을 해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전해에 결근이 없을 경우에 한해 년 8일씩 주어지는 연차휴가이니 만큼 휴가가 아닌 결근의 경우 다음해 연차휴가가 없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출근부에 꼬박꼬박 출근도장이 찍히면서 열흘이건 한 달이건 지부에서 상주하며 선거운동에만 전념하는 유완영 후보 측 선거운동원들과는 급이 달랐다. 2차 선거일이 잡히고 하루 이틀 지나자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이 난무했다. 노선과 정책이 판이한 2인의 대결로 압축된 탓인지 1차 선거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질이 나쁘고 추잡하기 짝이 없는 얘기들이었다. 노동조합의 공고문 조차 회사 측의 도장을 받아야 게시할 수 있는 단체협약의 홍보조항을 이유로 노조 집행부에서도 홍보의 문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물며 위원장 선거 때도 후보자의 경력과 공약의 게시 외엔 일체의 홍보물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언론의 자유가 봉쇄되면 자연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리는 법이다. 바로 이런 점을 거꾸로 이용하여 진실을 가로막고 왜곡선전을 하려는 것이 언론의 자유를 거부하는 자들의 속셈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비호남인들, 특히 부산공장의 조합원들의 지역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내가 호남인이라는 것과 김대중 씨의 평민당에서 선거자금을 지원받고 있다는 흑색선전이었다. 후보자의 이력 란에 경기도로 출생지가 표기되어 있음에도 본적을 바꾼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여가며 이런 소문을 퍼뜨렸다. 이외에도 민주후보인 내가 전노협 소속이라느니 전민련 소속이라느니 하는가하면 경기도 군포 소재 전노협 소속 사업체인 TND의 파업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또한 안성공장에서는 업무부장과 공무부장, 공무과장 등이 내가 좌익 운동권이라는 자료를 경찰에서 입수했다고 하여 조합원들이 보여줄 것을 요구하자 기밀이라며 거절하는 일까지 있었다. 극우 보수 언론의 편향보도와 지역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치판의 술수에 익숙해진 N라면 노동자들을 현혹시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효과적일 터였다. 뿐만 아니라 1차 선거 때 안성공장 참관인으로 참석했던 자동정비반의 강영식은 입사 때 추천자인 기계정비반의 박진호과장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함께 참관인 포기를 강요받기도 했다. 그의 동네인 호계동의 토박이이고 또한 그의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인 인연으로 그의 힘으로 입사를 한 강영식이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그의 집에도 수차례 전화를 해 놀란 그의 아버지마저 막무가내로 참관인의 포기를 강요해 결국 2차 선거 때는 차명진으로 교체를 했던 것이다. 이외에도 안성공장 유세에 구경삼아 따라왔던 라면3과의 포장실의 신윤정도 입사 때 추천인인 남상악 총무과장이 집으로 회유협박 전화를 하여 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일하던 라면3과 포장실에서 조합원들과 동떨어지고 라면을 스팀으로 쪄 내보내 일 년 내내 한증탕인 납형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회사 측의 선거개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작업 중인 조합원들을 마음대로 만나게 하는 유완영후보 운동원들과는 달리 민주후보는 유세 때 외는 일체 회사의 정문출입이 봉쇄되었다. 출퇴근 통근차에 회사 측 대의원이나 관리자들이 3-4명씩 타고앉아 민주파들이 단 한 발짝도 오르지 못하게 하며 조합원들에게 인사조차 못하게 했던 것이다. 유완영후보 측 운동원들이 보란 듯이 회사 정문과 작업장을 드나들며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민주후보측은 정문 앞에서 관리자와 경비들에 둘러싸여 그들과 시비를 해야 했던 것이다. 40여 가지가 넘는 단체협약 징계조항을 의식해 비공개로 홍보물을 배포하는 우리와는 달리 유완영후보 측은 관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흑색선전물들을 공개적으로 배포했다. 우리도 같이 공개적으로 배포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민주후보 측의 유인물 배포만 문제 삼아 후보자격을 무효화시키고도 남을 회사 측과 어용노조이기에 포기했던 것이다. 민주후보만을 징계하여 사실상 후보자격을 박탈하여 어용후보를 당선시키는 방법은 다른 회사에서도 가끔 쓰는 수법이었다. 민주후보만 징계할 경우 즉각 조합원과 함께 강력 투쟁해 회사 측과 노조 측의 징계철회를 받아낼 힘이 없는 한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안양공장 원료실의 임민용이 자신의 명의로 작성해 부산공장에서 직접 배포한 8절지 6장짜리 흑색유인물이었다. 노동조합의 장래가 걱정된 나머지 어느 후보 쪽도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 경험한 일들을 사정을 잘 모르는 조합원들에게 솔직히 전하고자 썼다는 유인물이었다. 그러나 민주후보인 나를 비방 매도하고, 어용후보인 유완영을 지지하는 유인물이었다. 유인물의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소속과 이력 이름 등을 분명히 밝힌 것도 특색이었다. 부산공장에서 몇 년간 근무하다 안양공장의 원료실로 전출한 20대 후반의 친구로 현장 노동자로는 드물게 전문하교 출신에다 그럴듯한 패기와 말솜씨를 갖춘 친구였다. 생산직 노동자의 경우 공장간 전출이 거의 없고, 더구나 고향이자 생활 근거지인 부산에서 안양공장으로 전출을 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어지간한 배경이 없으면 가기 어려운 원료실로 배치를 받아 조합원 사이에서 의문의 사나이였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도 남달라 노동조합 사무실을 안방처럼 드나들고, 서너개의 친목모임을 조직해 관리하는가 하면, 또 회사에서 극력 반대하는 독서회를 부장의 조카 등을 회원으로 해 회사 밖에서 운영하는 아주 특별한 친구였다. 신기하게도 일체 회사나 구사대의 간섭 없이 이런 활동들을 하고 있어 조합원 사이에서는 회사에서 어용위원장으로 키우는 친구라는 얘기까지 도는 친구였다. 그런 그가 2차 선거를 20여일 앞두고 부산공장 근처의 여관에 상주하며 유완영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고 있던 터였다. 위의 흑색유인물을 작업 중인 부산공장 현장을 돌아다니며 조합원들에게 일일이 배포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자기의 안양공장의 경험을 토대로 민주세력과 해고자를 외부 불순세력과 연계되고 호남세력이 주축인 과격 급진세력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민주후보인 나는 회사에 앙심을 품고 있어 원만한 노사협상이 불가능함을 강조한 반면 유완영후보는 그 반대의 논리로 추켜세웠다. 간간히 몇몇 조합원을 통해 범상치 않은 그의 행동에 대해 지나는 말처럼 들어와 막연히 알고 있을 뿐 나와는 단 한차례 눈인사도 나눈 적이 없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구였다. 아무튼 안양공장에 몸담고 있는 부산공장 출신 조합원의 제법 논리정연하고 속사포 같은 입담을 이용한 제3자의 유완영후보의 위원장 론은 조합원사이에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특히 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도 홍보물도 전혀 접해보지 못한 부산과 안성공장 조합원의 경우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간 회사의 관리자들이나 노조 간부들을 통해 들어온 내용들이니 더더욱 그럴 터였다. 민주후보를 과격혁명세력으로 조작한 흑색선전물의 내용은 물론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2차 투표일을 2일 앞두고 3개 공장에 대대적으로 배포한 것은 N라면과 노동조합에선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수십 년간 없는 간첩도 만들고, 불법, 은폐, 조작을 밥 먹듯이 해온 서슬 퍼런 공안기관이나 그 출신자들이 아니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수법이었다. 그게 당시 평민당 안양지구당 관계자와 뿌리 깊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꾼 대기업 노동조합 간부들의 한결같은 얘기였던 것이다. * 2차 결선투표의 결과는 유완영후보가 총 2,299표 중 1,222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53.1%의 득표였다. 나는 43%인 989표에 머물렀다. 예상보다 극히 저조한 득표였다. 이러한 의아한 표정은 우리 측 운동원들 뿐 아니라 유완영후보 측에 가까운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사람의 속은 알 수가 없고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모양이다. 5명이 겨룬 1차 투표에서 유완영후보는 719표를 얻었고 나는 812표를 얻었다. 1차 선거에서 낙선한 나머지 3후보를 지지한 조합원들은 민주후보는 외부 불순세력의 사주를 받는 것 같아 너무 과격하고 회사 측과 대결양상을 보여 그랬을 것이다. 유완영후보 역시 본사 감사실의 부장과 동서지간이고, 또 회사 측의 노골적인 지원을 받고 있어 그 3후보들을 지지했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따지자면 민주파도 어용파도 아닌 중간파 정도일 터였다. 따지고 시끄럽게 하는걸. 싫어하는 보수적인 조합원들도 많겠지만 반대로 그간 회사 측의 대변인 노릇만하는 어용노조에 환멸을 느껴 강력한 노조 집행부가 필요할 때라는 생각을 하는 조합원들도 있을 터였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는 그에 비슷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5명이 겨룬 1차 투표 때보다 2명이 겨룬 2차 투표에서 유완영후보가 503표를 더 얻은 반면 민주후보가 177표를 얻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립적인 조합원들이 전해주는 현장 분위기와 우리 측 선거운동원들이 다양한 층의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분위기 등을 통한 분석이었다. 1차 선거 때부터의 현장의 분위기가 민주후보 측에 절대 유리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반대로 유완영후보 측에게 절대 유리한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미 나왔고 어떻든 조합원의 결정이니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애써 태연을 꾸민 채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노조사무실 앞은 100여명의 인파로 인산인해였다. 개표장인 노조사무실 안에서 창문을 통해 개표 결과가 전해져 대체적인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최종적인 발표가 나오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인파들은 좀체 자리를 뜰 줄을 몰랐다. 그중에는 양측 선거운동원들 외에도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작업 중 빠져나온 듯 작업복 차림의 조합원들도 상당수 보였고 노무관리실과 교육상담실 직원들도 10여명 눈에 띄었다. 오히려 관리자들이 당사자인 우리들보다 더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뭐랬어, 민주노조인지 빨갱이노조인지 한경택이는 죽었다 깨나도 안 된다고 했잖아. 일찍 꿈 깨라고 했잖아." 기고만장한 구사대 한상복이 들으라는 듯이 우리들의 앞을 서성대며 지껄이고 다녔다. "선거 전부터 그런 소리를 하고 다녔는데 그럼 공항에서 비행기 화물칸의 부산공장 투표함을 바꿔치기했다는 얘기네? 맞지? 부산공장에서 내가 100%를 얻어도 안 되게 되어 있다며? 우리 회사에서는 회사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위원장이 될 수가 없게 되어있다며?" 나는 일부러 관리자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떠벌렸다. 그러자 그는 슬그머니 꼬리를 사린 채 비실비실 사라져갔다. 뭔가 대답하기가 곤란하든가 입장이 곤란할 때면 자취를 감추는 게 그의 특기인 것이다. 안양지역에서 조폭들과 어울려 다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삼청교육대에 들어가 수년간 순화교육을 받고 나온 친구였다. 그런 위인답게 항상 머리를 박박 밀고, 앞 이빨 한 개가 황상 휑하니 빠져있고, 웬만한 아이 장딴지만한 양 팔뚝이 빗살무늬 같은 칼자국이 난무한 찬구였다. 그것도 모자라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이 떨어질 정도로 걸쭉한 욕지거리인지라 조합원들이 무슨 벌레를 대하듯 하는 친구였다. "너 노무담당 이사가 시켜서 이러는 거지, 엉? 솔직히 고백하고 떳떳하게 살아 인마, 왜 인생을 그렇게 더럽고 추잡하게 사냐, 엉? 네가 그런다고 회사에서 널 부장시켜 줄줄 아냐? 이사 시켜 줄줄 아냐? 넌 끽해야 반장이야. 반장 해먹자고 그렇게 개처럼 살아야하냐, 이 불쌍한 인생아?" 그의 주 공략대상인 정동철이 해고되자 그의 주공격 대상자가 나로 바뀌었다. 날이면 날마다 술에 만취되어 멱살잡이를 하질 않나, 빨갱이 새끼들 때려죽인다며 각목을 들고 난동을 부리고 자동정비반 사무실의 유리창을 깨부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쏘아붙이는 말이 이 말이었다. 그 말만이 그의 난동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노무담당 이사 얘기만 나오면 신기하게도 꼬리를 사리는 것이다. 그러니 노무담당 이사 외에는 어느 과장 어느 부장도 그를 어쩌지 못하고 심지어는 밖으로 불려나와 술을 사줘야 하는가하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협박하면 껌벅 죽는 것이다. 나 역시 그와의 시비를 통해 회사 측의 정보를 간간히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시비를 하다보면 그의 말을 통해 언뜻언뜻 회사 측의 속셈이 감지되고 또 상당수 사실로 밝혀지기 때문이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러나 졌지만 우린 이겼습니다. 더럽고 추잡하게 이기느니 정정당당하게 싸워 졌습니다. 이게 오히려 이긴 겁니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 노조위원장이 되느니 빨갱이 불순분자 소리 들으며 여러 조합원들과 함께 고생하며 싸우며 민주노조 운동을 하는 게 오히려 진정한 승리자인 겁니다." 우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좀 더 과격하고 좀 더 큰 불순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조의 건설에 실패한 것도 결국은 회사 측을 비롯한 반민주 세력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입니다. 민주노조를 결사반대하는 회사 측의 방해책동에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좀 더 민주노조에 대한 공부와 확신과 활화산 같은 투쟁정신을 가져야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이번 선거를 경험삼아 내년 선거에서는 기필코 민주노조를 건설합시다. 또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무리 빨갱이, 불순분자라고 떠들어도 또 협박과 폭행을 일삼아도 43%, 989명의 조합원들이 우리의 민주노조를 지지한 것을 잊지 맙시다.“ 말이 중언부언 거려졌다.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삐져나왔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며 눈물을 흘리는 여성 조합원들을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했다. 회사 측의 노골적인 개입과 상대후보의 야비한 선거운동을 비난하며 위로의 악수를 청하는 남자 조합원들에게도 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말에는 어쩐지 뒷심이 없었고 공허한 메아리 같은 느낌이었다. 회사의 관리자들과 유완영측 운동원들이 뒤엉켜 승리를 만끽하는 노조 사무실을 뒤로 하며 나는 우리 측 운동원들과 함께 밖으로 빠져 나왔다. 승자와 패자. 과정이야 어떻든 그들은 만인이 공인하는 승자였고 나는 누가 뭐래도 패자였다. 1차 선거 때 3인이 연대합의를 했던 홍선재후보가 유완영 후보에게 500만원을 받고 매수되고 전위원장인 김준태 역시 유완영 후보에게 800만원에 넘어갔다 해도, 또 그의 분신으로 출마했던 박봉산 후보 역시 회사 측의 흑색선전 놀음에 놀아났다 해도 그것으로 선거의 패배가 합리화될 수는 없었다. 월급의 절반 혹은 전부를 선거자금으로 내놓으며 오직 사람답게 살기위해 한 달 가까이 입술이 부르트도록 싸워온 아가씨들에게 나는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좀 더 강력하게, 좀 더 과감하게, 좀 더 투쟁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선거투쟁이 아닌 순진한 선거운동이 되었던 것도, 그들의 흑색선전을 남에게 불순분자,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불순분자, 빨갱이라는 공세적인 대응이 아니라 ‘아니다, 그런 적 없다’는 식의 해명과 방어적인 대응을 했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었다. 조직은 물론 민주노조의 생명인 투쟁성에서도 패한 선거였다. 문찬식이네 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패배의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을 새웠다. 일 년 후에 다시 있을 위원장 선거를 위해 필승의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졌지만 소중한 경험을 한 선거였다. 민주노조에 대한 굳건한 확신과 활화산 같은 투쟁정신,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똘똘 뭉친 조합원들을 확대 강화시켜 거대한 민주세력으로 키우는 일, 소위 조합원들의 의식화와 조직 확대 강화만이 민주노조의 건설을 앞당길 수 있는 지름길임을 확신시켜준 선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