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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지역 1987년 노동자대투쟁
부천은 1986년 말 상주인구 51만 명으로 수원(50만)을 제치고 경기도 내 인구집중도가 가장 높은 도시였다. 서울과 인천의 외곽도시로서 주거지역 기능이 강하며, 서울 외곽 주변공장지대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적인 공단개발이 아니라 땅값이 비싼 서울, 인천지역에서 이주한 업체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형태로 공단이 조성되다 보니 공장지대와 주거지대가 혼재해 있었다. 또한 수도권 제한정비권역이라는 점 때문에 대규모 공장이 거의 없고 임대공장의 비율이 높은 영세기업 밀집지역이었다.
부천지역 투쟁의 첫 번째 포문을 연 것은 7월 27일 ‘우성밀러’의 투쟁이었다. 우성밀러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한 푼의 상여금도 받아본 적이 없고, 노동자들이 ‘개밥’이라 불렀던 회사밥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는 등 그야말로 열악한 근무조건에 놓여 있었다. 이에 이들은 ‘식사 질 개선’과 ‘상여금 200%’를 요구하며 파업투쟁에 돌입해 6일 만에 승리를 쟁취했다.
이 투쟁을 시작으로 약 2주간의 소강상태를 겪은 후 8월 중순 들어 부천노동자들의 투쟁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8월 11일, 경원세기와 원방, 8월 12일에는 동양에레베이터, 14일에는 화창, 미창, 제영, 남성제화가, 17일에는 대흥, 영창, 한국스파이서, 대평, 시대전기 등이, 18일에는 새서울, 연합전선이, 24일에는 우진전자, 25일 삼령정밀, 8월 말에는 엘리건스, 신한일전기 등 약 30여 개 사업장에서 파업이 전개됐고 65개에 이르는 신규노조가 결성됐다. 투쟁의 양상도 격렬해서 대부분 회사 점거가 기본 형태였으며, 경원세기의 경우에는 고속도로를 점거했고, 원방의 경우는 소수가 옥상을 점거해 극한 농성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자본과 정권은 이때까지 무능력한 대응을 하던 단계를 넘어 9월 들어 핵심노조원 중 대학생 출신 노동자들을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구속했으며, 폭력·회유·협박 등이 노골화됐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새서울산업’의 경우는 민주당사에서 16일간이나 농성투쟁을 전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9월을 지나면서 탄압에 공동대처하자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신규노조들 사이에 확산됐고, 새서울산업의 민주당사 투쟁을 계기로 공동대처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그러나 한국노총 부천시협의회는 성명서 한 장 내는 것조차 여러 이유를 들어 끝내 기피했다. 신규노조들은 한국노총을 불신하고 서로 정보교환을 하면서 연대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11월 초 ‘원방’이 적정한 작업물량 보장과 부서폐쇄 계획 철회,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전격적으로 회사를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한 것을 계기로 ‘한국노총 시협’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37개(인천 14개) 사업장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연일 지원투쟁을 전개했다. 이어 15개 사업장 위원장들을 중심으로 한 ‘연대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각 부서장들간의 모임을 조직해 상호 정보교환과 투쟁, 상담 그리고 탄압에 대한 공동대처 등 초보적인 연대활동을 수행했다.
⦁ 참고자료 :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부노협 백서>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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