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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한국모방 퇴직금 투쟁 _ 김원 (43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7-15 조회 1180
 
1970년대 박정희 정권과 한국노총은 민주노조의 소모임을 점조직혹은 소조이라고 비난했지만 이들의 악선전과는 달리 민주노조의 재생산과 초기 형성은 소모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모방이었다.
 
한국모방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
 
노동자들은 714일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했다. 당시 노조 정상화의 핵심적 관건은 대의원 선출이었다. 이미 민주파 지동진과 사측 담임인 이한철이 지부장에 입후보한 상태였으며 대의원대회가 717일로 예정된 상황에서 민주파는 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해서 다수 대의원들을 당선시켜야 했다. 특히 사측이 담임들을 대의원에 당선시키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던 상황에서 한국노방 노동조합 정상화를 위한 투쟁위원회는 현장에서 신임을 받고 부서에서 통솔력이 있는 조장급 여성 노동자들을 대의원으로 당선시키려고 준비를 진행했다. 14일 당일 사측은 사원, 담임을 동원해서 투표 장소에 진을 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선거는 식당에서 진행되어 다음날 새벽이 되서야 종료되었다. 결과는 민주파, 투쟁위원회의 승리였다. 42명의 대의원 가운데 여성 29, 남성 13명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했다.
민주파는 표의 이탈을 막기 위해 회사 주변 의용촌에 있는 여관에서 대의원대회 날까지 합숙을 하였다. 대의원들은 출근 때도 집단적으로 행동하였다. 사측이 작업장, 주거지, 고향 등까지 돌아다니며 금품, 뇌물, 지위 보장, 협박, 가족 동원 등을 통해 대의원 포섭에 열을 올리던 것이 1970년대 상황이었다. 특히 당선된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경험도 없어서 더욱 그러했다. 10시와 새벽 6시에 퇴근하는 대의원들을 밖에서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같이 여관으로 오기도 했고 승용차를 빌려 타고 오기도 하였다. 여관에 모인 대의원들은 회의진행법과 절차에 관한 공부를 하기도 했고 발언자를 정해서 연습도 하였다. 경험이 없는 대의원들이기에 만약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철저를 기했던 것이었다.
이처럼 817일 노조대의원대회에서 지동진이 지부장에 당선되자, 사 측은 이튿날부터 해고 14, 부서이동 25명 등 노조원을 무더기 징계하는가 하면, 지동진을 구타해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히는 등 노조를 전면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분노한 조합원 5백여 명은 822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가서, 6개항 요구사항 수락 합의하에 귀사했으나 회사 측은 보복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노조간부들을 고발하여 94일 노조간부 14명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에 조합원들이 또다시 농성할 움직임을 보이자 경찰은 교선부장 방용석과 총무부장 정상범 2명만 구속하고 지부장 등 나머지 12명은 석방했다. 이후 조합원들은 태업을 계속하는 등 끈질긴 투쟁 끝에 임금인상을 쟁취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여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한국모방이 노조를 정상화시키고 민주노조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바로 전에 일어났던 퇴직금받기 투쟁을 살펴보자.
 
 
한국모방 노조정상화 투쟁은 도시산업선교회와 연계에서 출발했다. 1971412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회관에서 퇴직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문제를 협의했다. 당시 퇴직금 연체 현황을 보면, 261명에 대해 15,182,292원이 밀려 있었고 예수금은 위탁자 7인에 1,000,027원에 이르고 있었다. 호소할 곳이 없는 조건에서 이들은 도시산업선교회에 찾아가 협조를 요청한 뒤, 418일 퇴직자 28명이 모여 한국모방 퇴직금 받기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노동청장에 진정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당시 진정서 중 일부를 보면, 근로기준법 제2장 제30조 규정에 의하면 퇴직한 종업원이 퇴직금을 요구하면 회사는 14일 안으로 지불하게 되어 있는데도 회사는 이 날 와봐라 저 날 와봐라는 식으로 속임수를 써왔으며 수십억의 회사를 운영하는 회사가 돈이 없어서 못 주겠다는 이유를 대는가 하면, 회사간부들이 퇴직금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것들 다 뭐하는 사람들이냐, 다 내보내라고 폭언을 일삼고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을 몇 달 만에 내주면서 거지에게 동냥 주는 식으로 내던지며 이것이라도 받으려면 받고 싫으면 그만 두라는 모욕적인 언동을 취했다.

 

<가톨릭노동청년회와 한국도시산업선교회가 한국모방 투쟁 관련
대책회의를 하자고 단체들에게 보낸 초대장_소장 전태일재단>

 
또한 질의서를 제출했으나, 노동청의 반응은 냉담했다. 노동청은 2차례에 걸친 질의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 및 회답이 없었으며 이러한 노동청의 태도는 노조로 하여금 노동문제의 사회화를 선택하도록 했다. 1971512일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의는 공동명의로, 한국모방 정상화대책협의를 위한 모임을 갖고 원풍모방 문제를 본격적으로 사회화시켰다. 한국산업선교연합회, 한국노사문제연구협의회,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민주수호청년협의회, 숙명여자대학교 학생회 대표 등은 이들 퇴직 노동자에게 법적, 재정적 뒷받침을 합의한다. 이처럼 문제가 사회화되자 노동청은 사장 박용운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입건,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사장의 입건이 퇴직금 문제의 해결은 아니었다. 법적인 호소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자, 투쟁위원회는 청와대, 국무총리실, 내무부, 서울시, 검찰, 노총, 신문사 및 방송국에 진정 및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모두 노동청으로 이첩했으니 양지하시라는 회신할 뿐이었다. 노동청은 영등포 지방사무소에서 해결을 지시했다는 말을, 지방사무소에서는 검찰에 고발하는 것 이상 할 수가 없다며, 아직 고발하지 않은 사람들의 것이나 받아보자는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한국모방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되기 전 노동청은 중립자라기보다 방관자 혹은 문제의 해결 의지가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노조가 없는 사업장은 초기 법적인 호소를 단독으로 해보았지만 노동청 및 관계 부서는 대부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노동자들은 투쟁위원회를 결성해서, 노동 문제를 사회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더불어 중요한 동력은 소모임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과 한국노총은 민주노조의 소모임을 점조직혹은 소조이라고 비난했지만 이들의 악선전과는 달리 민주노조의 재생산과 초기 형성은 소모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모방이었다. 한국모방 소모임은 1970년대 10년간 민주노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기본적인 힘이었다. 처음 소모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용노조 하에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개별적 차원의 문제해결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샛별, 소띠, 빅토리 등 소규모 모임으로 시작된 조직들은 쥐띠, 뿌리, 역부공, JOC 모임, 성우회, 친목회 등 20여개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9706월부터 가톨릭 신자 전체모임인 성우회가 조직되고 197110월경부터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등과 교류하면서 소모임은 확대됐다. 1971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1972년 노동조합을 민주화시킨 이후부터는 활동을 공개화했다. 모임의 장소는 주로 도시산업선교회, JOC 그리고 노조 사무실과 자취방과 기숙사 등이었다. 특히 몇몇 노동자들은 197110월경부터 가톨릭 도요안 신부,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경수산업선교회의 안광수, 조지송 목사 등과 친교를 맺어 소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무궁화팀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원풍모방 가톨릭 신자 8인은 19706월 투사 선서식을 하고 일반회원 접촉과 예비팀 발족을 서둘렀다. 이들은 주 1회 모임을 가졌으며, 이듬해 7월에는 15인으로 소나무팀이라는 예비팀을 결성했다. 또한 해고된 교우(敎友) 이길우 등을 만나 노조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830일에는 가톨릭 신자 전체모임인 성우회를 발족했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농성 모습. 사진_[민주노조 10년]>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만의 힘으로 노조가 민주화되기는 어려웠다. 이 때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 초대 민주노조 지부장 지동진과 이들의 만남이었다. 19722월 투사 모임 후 당시 회사 경비원이던 지동진 등이 그들을 찾아왔다. 지동진 등은 한국모방 문제도 많은데 왜 외부에서만 활동하려고 하는가?” “대의원 대회가 5월에 있는 것을 아는가?” “지난해 7명의 대의원이 지난해 해고된 사실을 생각해 보았는가?” 등을 질문하며 같이 일할 것을 제안했다. 성우회 투사들은 좀 더 두고 보면서, 사내에 성우회원 40, 도시산업선교회회원 70, 신협 조합원 50인이 존재함을 파악하고 이들의 힘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22월 오후 2시 수녀원에서 가진 모임에서 이들은 한국모방이 가진 문제 해결과 지원을 위해 A반은 안광수 목사가, B반은 조지송 목사가, C반은 도요한 신부가 지도하기로 하고, 지동진 등을 만난 사실은 비밀로 붙인 채 6월까지 활동하기로 했다. 이들은 애초 5월에 개최예정이던 대의원 대회가 열리지 않자 한국모방 12백 명 조합원 구제회를 조직해서 147명의 서명으로 대의원 대회 소집투쟁을 전개하다가, 이것이 앞서 소개했던 한국모방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위원회”(77)였다.이후 원풍모방 노조 전성기에는 노조 내 7~8명으로 구성된 소모임이 50~60, 그 내부에 500명 규모의 조합원이 활동했다. 원풍모방의 소모임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었는데, 지오세, 도시산업선교 등과 무관한 소모임들도 존재했다. 한국모방 노조는 종교 신자에 대한 조직적 배려도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여호와증인 신자들이었다. 원풍모방은 양복기지를 만들면서 군복기지와 군용담요 기지도 생산했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군용품의 생산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기계배치 및 현장분위기가 나빠지곤 했다. 이런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노조는 조장과 반장들을 모아 토론해서, 작업지시가 내리지기 전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고, 동시에 신자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작업 배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 소모임은 노조 민주화 이후 노조에서 전체적으로 관장하면서 노조의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여성 민주노조가 보여준 자율적인 노조 운영은 외부의 일방적인 주입과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바탕에는 기층 노동자에 기반한 요구의 수렴 및 간부 선출의 절차 그리고 지도부에 대한 집단적 신뢰에 기초한 작업장에서 노동자권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한국모방퇴직금투쟁_전태일사업회_축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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