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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지역 노동조합 동맹파업 투쟁
⦁ 시기 : 1985년 6월 24일 ~ 30일
⦁ 요약 : 1985년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들 구속에 맞서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이 동맹파업과 지지 농성으로 지역 연대투쟁을 벌여냈다.
투쟁의 배경
정부가 계획해서 만든 구로지역은 수도권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수출공업 산업단지였다. 그곳의 노동조건도 다른 산업단지와 마찬가지로 열악했다. 1985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한마디로 ‘비인간적’ 그 자체였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 차별 대우, 열악한 작업환경 등 모든 여건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노조가 결성되기 이전 임금수준은 1984년 10월 산출한 여성노동자의 최저생계비 160,128원의 절반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월 72,000~75,000원 수준이었다. 정부에서는 10만 원 이하의 저임금 해소를 위해 강력한 단속을 펴겠다고 했으나 전혀 실효성이 없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1,988달러, 즉 1가구 5가족을 기준으로 할 때 평균 70만 원이었다. 이러한 저임금은 자연히 장시간 노동을 강제해 대우어패럴의 경우 정상근무 10시간에 항상 l일 2~8시간의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해 월평균 80여 시간, 110시간 이상의 초과노동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선택은 단결밖에 없었기 때문에, 노동조합 결성과 연대투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구로지역 연대투쟁에 참여한 노조들은 모두 비슷한 조건이었는데 노동조합 결성도 1984년 6~7월에 걸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가리봉전자가 1984년 6월 8일, 이튿날인 6월 9일에 대우어패럴노조가 결성됐고, 이어서 6월 11일 효성물산노조, 7월 8일 선일섬유노조가 결성됐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결성된 노동조합들은 1985년 임금인상 투쟁을 거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활동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던 중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이 대우어패럴노조 사무실로 찾아와 김준용 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해 구속하고, 조합 간부 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지난 4월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집시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민주적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전반적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대우어패럴노조는 구로공단에서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던 노조라는 점에서 가리봉, 효성, 선일 등 다른 민주노조들에게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대우어패럴 노조원들은 간부들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즉각 작업을 중단한 채 100여 명이 회사 총무과에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며 항의하고, 다음 날 전체 대의원이 모인 가운데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청계피복노조 위원장들이 만나 6월 24일 자로 동맹파업 농성에 돌입하기로 결의함으로써 구로지역 노동조합 동맹파업 투쟁의 막이 올랐다.
동맹파업 과정
그동안 일상적인 연대활동을 통하여 동료의식을 함양해왔던 구로지역 노조들도 대우어패럴노조 간부의 구속이 민주노조를 각개격파하려는 신호탄이라 판단하고, 1970년대 민주노조의 파괴 과정을 다시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결의로 연대투쟁을 전개했다. 이 투쟁은 6일간 10여 개 사업장 2,500여 명이 중심이 돼서 진행했다.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부흥사, 선일섬유 등 5개사는 직접 동맹파업에 참여했고, 세진전자, 롬코리아, 청계피복, 남성전기 등 5개 노동조합에서는 중식 거부, 지지농성 등으로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에 동참했다.
[구로지역 노동조합 동맹파업 참가 노동조합(단위: 명)]
- 한국노협, <민주노동> 제12호
회사명
| 참여행태
| 투쟁기간(6월)
| 참가자 수
| 노조설립일
| 조합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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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어패럴
| 파업농성
| 24~29
| 350
| 1984. 6. 9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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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물산
| 파업농성
| 24~26
| 400
| 1984. 7. 14
|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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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전자
| 파업농성
| 24~27
| 500
| 1984. 6. 8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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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일섬유
| 파업농성
| 24~27
| 70
| 1984. 6. 11
|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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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사
| 파업농성
| 25~26
| 120
| 1977. 9. 23
|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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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전기
| 준법농성
| 25~26
| 300
| 1977. 2. 12
| 1,270
|
세진전자
| 준법농성
| 25~26
| 200
| 1977. 1. 23
|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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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코리아
| 준법농성
| 25~26
| 70
| 1978. 7. 1
| 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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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제약
| 중식거부
| 27~28
| 150
| 1975. 8. 11
|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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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간 진행된 구로지역 동맹파업의 전개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6월 22일 오전 11시, 대우어패럴노조 위원장 김준용, 강명자 사무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 연행, 전격 구속. 조합원 100여 명이 작업을 중단하고 회사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 요구하며 항의, 오후 5시까지 농성하다 조합원들은 해산하고 의장단과 상임 집행 간부들은 철야 대책회의.
∎ 6월 23일 대우어패럴 외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노조 위원장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고 6월 24일부터 동맹파업 들어가기로 결의.
∎ 6월 24일 오전 8시, 농성을 예상·준비하고 있던 관리자들의 방해를 뚫고 1공장 2층 생산과 작업실에 350여 명의 조합원이 집결해 ‘우리의 결의문’을 낭독하고 무기한 파업농성에 돌입. 오후 2시부터 효성물산 노조원 400여 명이 마주 보는 건물에 있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파업 동참. 오후 2시 가리봉전자노조 구로공장과 독산공장에서 500여 명 농성 돌입, 선일섬유 역시 오후 2시부터 농성 돌입. 대우어패럴, 선일섬유, 가리봉전자는 회사가 단전·단수하고 선일섬유 농성장을 150여 명의 경찰이 봉쇄함.
∎ 6월 25일 남성전기 조합원 300여 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전자 노조원 250여 명도 오후 5시 30분부터 11시까지 회사 운동장에서 지지 농성. 롬코리아도 100여 명이 2층 식당에서 철야농성을 전개하는 등 연대투쟁 7개 업체로 확산. 이날 구로공단 및 주변 주택가 일대에는 구로지역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연합,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청계피복노조 명의로 “6월 26일 오후 8시 30분 가리봉오거리에 총집결해 전두환 정권의 노동자 탄압을 규탄하는 궐기대회를 하자”고 촉구하는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 함께 일어나 싸워나가자!’라는 제목의 유인물이 광범하게 살포됨. 노동부가 농성사업장을 설득해 징계처분, 강제해산 단계를 밟겠다는 방침 발표.
∎ 6월 26일 대우어패럴 농성노동자 9명이 허기와 갈증으로 실신해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지만, 각 농성장의 구호나 노랫소리는 점점 높아감. 구로연대투쟁을 지지하기 위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22개 단체 50여 명이 오후 2시부터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농성 돌입. 오후 6시 40분경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 굴뚝 중간지점에 올라간 대학생 2명의 “구속노동자 석방” 구호를 시작으로 경찰의 살벌한 경계와 폭압적 제지를 뚫고 200여 명의 노동자·시민·학생 등이 저녁 9시까지 가리봉오거리와 구로공단역 등지에서 시위, 이 중 82명이 무차별 구타당하며 연행됨.
∎ 6월 27일 대우어패럴 농성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탄압 강화, 음식까지 차단하여 농성노동자들이 탈진해 실려 나가 100여 명만 남음. 이 외에도 회사에서는 비조합원 300여 명을 강제로 동원해 농성장 앞 운동장에서 노조를 비방하는 구호를 외치며 4시간 동안 관제 농성. 6월 26일 효성물산노조가 보복 조치하지 않겠다는 회사 약속을 받고 밤 11시에 농성 해산하고 회사는 7월 3일까지 휴업공고, 가리봉전자와 선일섬유도 농성 해산. 반면 뒤늦게 참여한 성수동의 삼성제약에서는 250여 명이 중식을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며 연대투쟁에 동참. 전날 해산한 효성물산노조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100여 명은 오후에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서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2시간 동안 농성하다 강제 해산돼 청계피복노조 사무장, 효성물산노조 위원장 등 7명 구속. 이 외에도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의 민주운동단체 농성에 이어 기독교회관, 가톨릭노동청년회, 민중불교운동연합에서도 농성에 돌입해 이날까지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점거 농성을 벌였거나 벌이고 있는 곳이 신민당사를 포함하여 7곳, 350여 명에 달함.
∎ 6월 28일 부흥사 노조원 120여 명 역시 출근과 동시에 3층 작업장에서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연대투쟁에 동참. 그러나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차별 난타를 가하는 관리직 남자 사원들에게 오후 4시 30분경 해산당함. 해산 이후 공갈·협박·폭행으로 80여 명에게 강제 사직서를 쓰게 하고 29일부터 무기한 휴업. 대우어패럴에서는 1시 30분경 노사 간 첫 만남이 있었으나 구속자 고소취하, 노동부장관 면담 주선, 음식 반입, 파업에 대한 보복 조치 금지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회사가 거절함으로써 30분 만에 결렬.
∎ 6월 29일 농성을 해산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 보복 조치로 농성주동자들에 대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오전 8시경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굶어 지쳐있는 농성노동자들을 지원·격려하기 위해 학생 18명이 빵, 우유, 의약품을 짊어지고 지붕을 타고 넘어 합류하자 벅찬 감동의 환호성이 터져 나옴. 이에 다급해진 회사는 폭력배 200여 명과 사복경찰을 동원, 벽을 뚫고 들어와서 벽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농성장에 진입해 무차별 폭행을 자행하며 강제 해산시킴. 이날 오후 청계노조, 민중불교운동연합 등지에서지지 농성을 벌이던 민족민주운동 단체들 자진 해산.
∎ 6월 30일 6월 26일부터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던 효성물산 36명의 노동자는 신민당이 “노동운동탄압과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대량해고와 폭력을 중지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5일간의 농성 해산.
이렇게 6일간의 구로동맹파업이 끝났다. 이어 자본과 정권의 보복 조치로 43명 구속, 38명 불구속, 47명 구류, 그리고 700여 명이 해고 및 강제 사직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동맹파업 발생부터 해산까지 회사와 경찰은 엄청난 폭력을 행사했다. 농성노동자들의 부모를 동원해서 인간적 감정까지도 악용했으며, 회사가 고용한 깡패들은 구사단을 표방하면서 쌍칼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등 무차별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6월 30일자 <조선일보>는 대우어패럴 농성 해산 당시에 대해 “회사 관리직 사원, 생산직 반(反)노조원 등 200여 명은 농성장에 진입하자마자 적극적인 대항파를 순식간에 분리시킨 뒤 적극파를 한 곳으로 몰아붙여 기선을 제압, 또 농성자를 끌어낼 때도 3명이 1명씩 맡아 머리, 양팔, 다리를 붙잡고 잽싸게 운반해 목격자들로부터 잘 훈련된 경찰 진압부대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번 대우어패럴 사태 때 경찰은 정보과 형사 3명만 안으로 들여보내는 등 시종일관 직접 개입을 피했다. 한 간부는 경찰이 들어가 농성 중인 노조원과 충돌할 경우 득보다 실이 많다며 들여보낸 정보과 형사들도 반드시 회사 작업복을 입도록 지시했다. 현장에서 각목과 쇠파이프가 난무하고 부상자가 생기는 등 폭력이 발생했지만, 경찰은 회사 앞에서 서성거리기만 해 농성근로자 가족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연대투쟁의 고리를 단절할 수 있도록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는 데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고, 회사측에 고용된 폭력배들은 경찰 묵인 아래 농성자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켰다.
구로지역 노동조합 동맹파업의 의의
구로지역 각 민주노조가 노조파괴의 위기에 직면해 돌발적으로 연대투쟁을 전개한 것 자체가 기업별 노조 차원의 지속적인 대중 활동과 이를 기초로 한 지역연대 활동의 성과다. 또 과거 군사정권의 제도적·물리적 탄압 아래서도 현장 대중과의 결합을 토대로 강력한 저항을 수행했던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성과가 계승·발전된 것이다. 자본과 정권에 맞서 연대투쟁을 전개하며 자연스럽게 “폭력경찰 물러가라” “노동악법 폐지하라”는 구호가 터져 나오는 등 초보적이지만 정치적 요구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한편 구로지역 노동조합의 동맹파업은 단절되었던 노동운동 연대투쟁의 역사를 잇는 새로운 장을 여는 투쟁이었다. 또 노동운동이 민족민주운동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더욱 분명히 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지원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변혁운동의 선도적 주체로 나서기 시작한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위상을 정립해가기 시작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 참고자료
- 서울노동운동연합, 「선봉에 서서」(돌베개, 1986)
- 편집부, 「1985년 임금인상 투쟁」(풀빛,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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