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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과 5월 민중연대투쟁(1991년 5월)
1990년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은 제도권 야당의 묵시적 합의 아래 민족민주진영의 정치적 진출과 민중생존권 투쟁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하는 정책 기조와 방향을 수립했다. 12월 7일 발표한 ‘1991년 경제안정을 위한 노사관계 및 건설인력 수급 안정 대책’을 통해 한 자릿수 임금동결과 임금협상 조기타결 등 기존의 노동정책을 1991년에도 계속 견지할 것임을 표방했다.
노동운동진영은 이러한 노동정책에 맞서 △임금협약의 유효기간 연장과 업적급 임금제 도입을 포함하는 노동법 개악 저지 △업종별 공동 임금교섭 제도 추진 △노동운동 탄압 분쇄를 위한 민주노조진영의 공동투쟁을 조직하기로 했다. 여기에 노동자대중의 생존권을 중심으로 노조의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는 요구를 결합하기로 했다. 이를 기초로 제도·정책적 요구를 전민중적 차원에서 발전적으로 제기하며 공동 연대투쟁 조직화에 집중하기로 했으며, 민족민주진영의 통일과 단결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기로 했다. 이처럼 노동운동진영은 총체적인 발전을 꾀하는 동시에 반민자당 민주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
전노협은 전국 노동자의 공동투쟁과 민중연대 사업에서 △1991년 상반기에 자본과 권력의 총공세에 대응해 전노협·업종회의·연대회의 등 범노조진영의 공동전선 구축 △노동절 전후해 전 노동자계급의 공동 요구를 내건 총력투쟁 △민중생존권과 정치사회 민주화 요구를 중심으로 민중연대 투쟁 강화 및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민족민주세력과 공동대응을 기조를 설정했다.
1991년 노동자 투쟁은 2월 8일 대우조선이 전면파업에 돌입하면서 본격화됐다. 2월 9∼10일 공동임금인상 투쟁과 대우조선의 파업에 대한 공동대응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 회의’(아래 ‘연대회의’) 간부수련회장을 경찰이 침탈해 7명이 구속됨으로써 노동운동진영과 노태우정권의 전면 대결이 시작됐다. 2월 10일부터 전노협은 즉각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연대회의 소속 10여 개 사업장도 규탄대회, 부분파업, 전면파업 등 다양한 형태로 투쟁을 전개하면서 2월 23일을 전후해 부산, 인천, 경기, 성남 등에서 단위사업장 또는 지역 집회를 개최했다.
3월 9∼10일에는 수서 비리를 규탄하고 노동운동 탄압을 분쇄하기 위해 전노협 중앙위원을 비롯한 노동조합 간부와 노동단체 회원, 학생 등 270여 명이 명동성당에서 철야농성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우정밀, 대우자동차 등에 경찰이 투입되고 전노협․연대회의 간부에 대한 내사와 구속 기도가 노골화됐다. 이에 4월 17∼19일에 전국적으로 ‘노동운동 탄압 중지와 구속노동자 석방을 위한 전국 노조 간부 철야농성’을 전개하고 4월 21일에는 ‘구속노동자 석방과 노동운동탄압 분쇄를 위한 권역별 노동자대회’를 열어 맞섰다.
4월 24일부터 5월 1일은 노동절 기념주간으로서 세계노동절을 기념하고 5·1절 휴무를 쟁취하기 위한 다양한 대중사업을 펼쳤다. 그러던 와중인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타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4월 27일 민주단체들은 ‘고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아래 ‘대책회의’)’를 구성하고 즉각 대응에 나섰다. 4월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국민 결의대회’에 7만여 명이 운집함으로써 1991년 5·6월의 폭발적인 대중투쟁이 시작됐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투쟁 전선이 확대되는 가운데 5월 1일 ‘임금인상과 물가폭등 저지 및 노동기본권 수호를 위한 전국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아래 ‘전국투본’) 산하 188개 노조 9만 5,663명이 전면휴무에 돌입했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에는 수도권 3만 명 등 전국에서 6만여 명이 참가해 투쟁을 벌였다. 이어 5월 4일 열린 ‘백골단 전경해체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에 전국에서 20만 명이 참여했다.
1991년 5월 6일에는 부산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안기부의 공작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전국 노동자의 분노가 폭발, 이후 투쟁에 노동운동진영이 보다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투쟁 전선을 확대하고 투쟁의 수위를 높여나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5월 9일에는 전국적으로 100여 개 노조 5만여 명이 오후 3시 30분부터 시한부 파업에 돌입하고 가두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날 국민대회에는 전국 60여 개 시․군에서 30만 명이 참여해 범국민적인 ‘노태우 퇴진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투쟁 전선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노태우정권의 정치적 위기는 한층 깊어졌다. 5월 9일 투쟁을 기점으로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면서 ‘백골단 해체, 노재봉 내각 사퇴’에 머물러 있던 투쟁 요구가 ‘노태우 퇴진’으로 전면화됐으며 전국적·조직적 투쟁의 구심으로서 대책회의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민주노조운동은 5월 15일 연세대에서 전노협․업종회의․연대회의 간부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전국 노동조합 비상 대표자회의’를 열고 ‘5월 18일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총력투쟁’을 결의했다.
이러한 결의를 바탕으로 5월 18일에는 16개 지역 156개 사업장 9만 1,415명이 시한부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전국투본 산하 450개 대부분의 노조에서는 출정식과 규탄집회 후 조직적으로 국민대회에 참여해 노태우정권 퇴진투쟁을 선포했다. 이날 2차 국민대회는 전국 81개 도시에서 40여만 명이 참여하는 6공화국 최대규모의 가두시위를 전개함으로써 1991년 5·6월 투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한편 대책회의는 명칭을 ‘공안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아래 ‘대책회의’)로 바꾸고 10대 투쟁과제를 선포했으며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5월 25일 3차 국민대회에서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이 백골단의 폭력 진압 속에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투쟁 전선은 새롭게 다시 구축됐다. 6월 8일 5차 국민대회에 이어 6월 12일 김귀정 열사 장례식을 거치며 민족민주진영과 노태우정권 사이에는 팽팽한 대치 전선이 형성돼 갔다.
그러나 노동자의 파업투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대중 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시점에 한국외국어대에서 일어난 정원식 총리에 대한 달걀세례 사건이 벌어졌다. 노태우정권은 보수언론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아래 ‘전대협’)를 ‘패륜아’로 매도하고, 대공장의 파업현장에 경찰을 투입하는 한편, 민족민주진영의 지도부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하는 등 국면전환을 위한 일대 공세에 나섰다. 이러한 탄압에 대해 민족민주진영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투쟁 국면은 광역의회 선거로 전환됐다. 결국 58%의 투표율이지만 압도적 비율로 민자당 후보들이 당선되는 것으로 선거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렇게 전반적인 정세가 퇴조하는 가운데서도 6월 24일 전노협, 업종회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빈민연합(전빈련),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 전대협 등 기층 7개 대중조직 대표자가 한자리에 모여 ‘민중운동 일선 대표자 결의대회’를 하고 5~6월 투쟁의 성과를 모아 기층 민중이 중심이 되는 ‘국민회의’를 내용적으로 뒷받침할 ‘상설연합’ 건설을 결의했다.
한편 6월 29일에는 안기부 공작 살인에 대한 진상규명을 이후 투쟁과제로 남겨 놓은 채 박창수 열사 전국노동자장이 안양과 부산에서 거행됐다. 동시에 6차 국민대회가 전국 동시다발로 진행되면서 1991년 상반기 투쟁은 사실상 마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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