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읍과 철원 노동당사 김미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철원 노동당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금강산로 265 위치에 지상 3층의 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졌다. 정면의 돌출 현관을 중심으로 직사각형 창문들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규칙적으로 배열된 건물로 벽면의 수직성을 강조하여 당시 노동당의 권위를 드러냈다. 1946년 완공된 노동당사는 그해 8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쳐 결성한 ‘북조선노동당’의 당사로 사용하기 위해 철원읍 중심지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집중공격으로 노동당사는 지붕이 날아가고 3층 바닥이 내려앉았으며 건물입구 중앙계단에는 탱크 바퀴자국이 선명하고 기둥과 벽 도처에 총탄자국이 남아있는 폐허상태이다.  노동당사가 세워진 당시 철원읍은 어떤 모습이었나. 한반도의 분단선인 38선은 1945년 미국 소련 두 강대국에 의해 그어졌다. 상상의 산물이던 38도선을 따라 콘크리트 말뚝을 박으려 했으나 분단이 영구화 될 것을 우려하여 나무 목책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70년이 지나는 동안 목책은 썩어 없어졌지만 더 견고한 철책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동강내며 세계에서 유일한 냉전의 상징으로 분단은 지속되고 있다. 철원읍은 38선으로 분할되기 전에는 인구 2만5천 명 정도 규모로 인천 춘천에 버금가는 도시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주의는 도시를 점령하면서 식민지에서 수탈한 자원을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도로, 철도 등 교통인프라를 가장 먼저 부설하였다. 1914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역시 그러한 목적으로 개통되었는데 경원선의 중심역으로 철원역이 철원읍 외촌리에 세워졌다. 철원역과 금강산 내금강역을 연결한 금강산선이 1931년 전 구간 개통되면서 철원역과 인근 관전리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완공되면서 철원은 한반도를 종단하고 횡단하는 X축의 정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철원은 정치·군사적 비중이 증대됨으로써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 발행된 『철원읍지』에 의하면 교육기관은 유치원에서 중·고등학교까지 5개, 금융기관 4개, 일반 행정기관은 철원군청을 포함하여 34개, 접객업소는 103개가 있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 이미 상수도 시설이 완비되었고, 철원극장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얼음 창고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당히 번화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 되자 북쪽으로 편입된 철원군은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이 실시되었으며 당시 철원에 거주했던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상 교육과 학습이 많았다고 한다. 철원 노동당사는 정책을 실행하고 선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활용되어 당사 앞 광장에서는 집회가 자주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철원군은 남쪽으로 편입되어 ‘수복지구’로 명명되었다. 전쟁당시 미군은 초토화 작전으로 철원읍을 불태워버렸으며 주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출입을 제한하였다. 노동당사 역시 지금은 폐허로 남아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전하고 있으며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안보관광으로 활용되고 있다. 70년간의 분단은 흘러가는 역사가 아니라 고통의 현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