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노조 10년의 기억(3)
박재범(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2005년 매일노동뉴스에 1991년 목숨으로 전노협을 지켜낸 박창수 열사 가족들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가 실렸던 기억이 난다. 기사를 읽으며 왠지 모를 그리움과 미안함에 참 많이 눈물이 났다. 슬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그 빈자리는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게 마련이라지만 민주노조 운동을 위해 가족을 놓아버린 동지들의 빈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채우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공무원노조 운동의 역사에서도 그 치열함 만큼이나 가슴 아픈 사연들도 많이 있고 안타깝게도 먼저 떠나보낸 동지들도 많이 있다. 지난해 9월 차봉천 초대 위원장님이 우리의 곁을 떠나면서 그 치열했던 삶의 한 세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날 잠시 잊었던 많은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공무원노조 운동의 역사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동지들 몇 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故 김병진 초대 서울본부장
1999년 9월에 서울지역에서 최초로 강동구공무원직장협의회를 건설하여 서울지역 공무원노조의 초석을 다진 고 김병진 본부장님.
초창기 서울지역을 대표하여 발전연구회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2001년 전공련 출범과 2002년 공무원노조 건설과정에 흔들림 없이 함께하여 초대 공무원노조 서울본부장을 역임하셨다. 2002년 3월 공무원노조 출범대의원대회 장소에서 연행되어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시고 이후에도 서울본부장으로 활동하시다가 2003년 6월 4일, 4개월여 간의 투병 끝에 안타깝게도 간암으로 운명하셨다.

이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발전연구회 시절이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발전연구회에서 나의 채용여부를 두고 공동대표들의 투표과정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던 분이시다. 첫 출근하던 날, 제일 먼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재범아, 내가 너 뽑는데 매우 반대했다. 그러나 함께 일하기로 결정되었으니 열심히 해보자”라고 말씀하셨고 이후에는 언제나 나를 많이 챙겨주셨다.
되돌아보면 30여년 간의 공직생활이 단숨에 그 분을 바꾸어내지는 않았지만 민주노조의 건설과정에 한걸음씩 내딛어온 그분의 길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공무원노조 건설의 길은 거대한 공직사회 보수의 벽과의 싸움이자 공직을 천직으로 살아온 이들의 일터를 단숨에 빼앗길 수 있는 두려움의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노조출범 초기 어느 인터뷰에서 “정부의 악의적인 의도로 인해 국민들이 공무원노조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라고 밝히셨던 본부장님의 말씀은 두려움의 대상이 정부가 아닌 바로 국민의 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다음 말에서 공무원노조 건설의 신념이 여느 활동가 못지않게 굳건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정신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간부들의 구속, 수배는 완전한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공무원노조가 겪을 수밖에 없는 시련일 것입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노조 지도부들의 노조합법화 의지는 더욱 강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차봉천 위원장을 비롯해 산곡성당에서 농성 중인 지도부들에게 조합원들과 공무원노조를 위해서 더욱 더 힘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젊음을 바친 이민형 동지
2004년 하반기 당사자인 공무원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기만적인 ‘공무원노조법’ 제정 시도가 예정된 가운데 이에 맞서 공무원노조는 11월 4일 총파업을 선언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공무원노조의 총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간부들에 대한 탄압 및 회유를 자행하고 심지어 11월 9~10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앞두고 노조사무실을 침탈하여 투표용지를 훔쳐가는 등 전국 여기저기에서 폭력적인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당시 공무원노조 현장간부들은 조합원들에 대한 선전전 및 교육을 강화하면서, 각 지부별로 쟁의행위 찬반투표 및 총파업 준비를 강행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그 해 10월 12일 인천 부평구 이민형 지부장이 충북단양으로 간 직원 MT에서 ‘총파업’ 관련 교육을 진행하다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비보가 나에게 전해졌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뇌출혈이라니... 잠시 멍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지부에서 사무국장으로 궂은일을 다 하고, 공무원노조 중앙에서는 정책국장으로 일하다 그해 5월 2대 부평구 지부장으로 선출되어 총파업을 준비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졌던 동지가 쓰러지다니.
그날 밤 인천 인하대 병원으로 후송중이라는 소식에 병원 후배들에게 전화하여 도움을 청하고, 그 다음날 중환자실을 찾아가니 며칠 전 밤새 함께 술 마시며 서로에게 힘을 주던 나의 동지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누워있었다.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자기 몸 돌보며 일할 위인이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던 내가 왜 진작에 좀 쉬게 말리지 못했을까, 죄책감이 밀려왔다. 총파업을 앞두고 구청의 방해와 탄압이 거세어 질수록 낮에는 현장을 순회하고 밤에는 조합원 한 명이라도 더 만나 설득하려고 밤새 술을 마시며 지새운 날이 그 건강하던 동지의 몸을 무너뜨리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이다. 비록 몸은 상했지만 의식도 돌아오고 오히려 총파업을 앞두고 동지들에게 미안해 하는 이민형 동지를 보며 생명이 위독해지지 않아 감사했다. 그리고 곧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워낙 신념과 의지가 굳어 툴툴 털어버리고 곧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2년여의 병원 재활치료 기간이 끝에 2006년 10월에 이민형 동지는 복직하여 집 인근의 주민자치센터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일상적인 업무나 노조활동은 할 수 없다. 또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찾는 이도 별로 없는 것 같다. 40대 초에 젊음을 바쳐 지켜온 공무원노동조합 활동의 결과를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고난을 평생 자기만의 싸움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공무원노조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동지들의 신념과 희생이 만들어낸 역사이기 때문에 공무원노조가 존재하는 한 모든 이들이 함께해야 한다.
민중의 벗 故 하영일 동지
공무원노조 건설과정에 지역에서 지부에서 수많은 활동가들이 보이지 않게 많은 활동을 하였다. 발전연구회, 전공련 시절을 넘어 공무원노조가 법외노조임에도 14만 조합원 시대를 만들어 내기까지 당사자들의 희생과 열정의 뒤에는 항상 운동의 신념을 가지고 공무원노조에 투신하던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었다.
초기만 하더라도 노동조합에 사람을 채용한다는 것은 대부분 잡무를 맡기기 위한 여직원(?) 채용 정도의 인식이었다. 그래서인지 지역에서 공무원노조를 지원하기 위해 활동가들을 추천해도 민주노총 경력이나 민중운동 경력, 특히나 남성활동가의 경우에는 채용을 꺼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임금이나 복리후생도 매우 열악하여 100만 원 초(여성동지들은 90만 원대) 전후였으며, 상여금이나 후생복지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헌신성만이 요구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나마 중앙에 있던 내가 그 동지들에 비하면 상당히(?) 후한 임금과 복지를 누리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헌신적이었고 열정적이었던, 내가 잊지 못하는 한 동지가 있다.
그는 바로 전공련과 공무원노조 초창기 가장 조직적이며 투쟁적이었던 공무원노조 경남지역본부에서 활동했던 고 하영일 동지이다.
하영일 동지는 2001년 경남공무원직장협의회연합(경공련)에 사무차장으로 들어와 2006년까지 지역본부에서 묵묵히 활동하던 동지이자 두 아이의 아빠였다. 연배도 나와 비슷하고 학생운동의 경험도 비슷하여 내게는 형 같은 동지였다.

묵묵히 지역운동에 함께하며 동지들과 소통하고 운동의 신념을 몸으로 실천해 주었던 동지, 그런 동지가 2006년 9월 느닷없이 심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투병중이라는 소식에 많이 놀랐었다. 한 번도 맘 편하게 둘이서 술잔을 기울인 적도 없고, 서로의 활동고충을 나누며 힘이 되어 주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그는 허망하게 2007년 1월 22일 우리 곁을 떠나갔다.
어찌 보면 하영일 동지에게 나는, 함께한 동지라기보다는 먼발치에서 서로 바라보며 말없이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온 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공무원노조의 과정 순간순간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떠한 판단을 해왔는지는 말하지 않았어도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나도 참 무심해서 그런 하영일 동지의 무덤을 찾아가 보지 못하였다.
이런 동지들을 부끄럽게 다시 한번 그리워하며 이 글을 보는 공무원노조 동지들도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잊지 말아야 할 동지들, 보이지 않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우리의 동지들이 지금도 어딘가에 묵묵히 일하고 있다. 상근 활동가든, 현장 간부들이든,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의 조합원이든 그들과 함께 운동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대중이고 그들이 바로 민주노조인 공무원노조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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