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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우리의 도전도 끝나지 않았다: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 이야기_이재성 (46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10-12 조회 1703
 

1994년에 결성되었던 대한마이크로의 세 번째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노조 위원장 후보로 추대된 김명숙 교육부장을 해고하고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명숙 위원장은 1996612일에 제초제를 마시고 음독 자살을 기도하며 대한마이크로의 노조 파괴 공작을 저지하고자 했다.


  우리의 도전도 끝나지 않았다 -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이야기(1)

  이재성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951023일 오후 330. 인천 부평의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사무실이 강제 철거되기 시작했다. 대한마이크로의 세 번째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사측은 노조 위원장 후보로 추대된 김명숙 교육부장을 해고하고 노동조합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장기 투쟁 끝에 결국 김명숙 위원장은 1996612일에 제초제를 마시고 음독 자살을 기도하며 대한마이크로의 노조 파괴 공작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천지역 민주노조들은 대한마이크로를 상대로 한 연대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한마이크로의 경영자 최만립은 최근 자신의 스포츠 외교에 대한 자서전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생각의 나무, 2010)를 출간했다. 그는 1970년에 반도체회사인 대한마이크로전자를 설립했고, 1980년에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명예총무로 활동하면서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유치에 공을 세웠다. 2002 월드컵유치위원회 위원도 하고,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과 특별고문을 역임할 정도로 스포츠계에 애정이 크다. 전자산업과 스포츠 외교 분야에서 활약한 최만립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동생이기도 하다.

끝나지 않은 도전은 그들만의 테마가 아니다.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의 조합원들 역시 노동자로서의 도전을 멈추지 않아 왔다. 1996년 노조파괴에 맞서며 음독 자살까지 시도하였던 김명숙 씨는 대한마이크로의 세 번째 노동조합의 제 2대 위원장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1984년에 처음으로 민주노조가 결성되었다가 깨졌고,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며 두 번째 민주노조가 결성되었으나 역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1994년에 세 번째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특이한 사례가 바로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이었다.

대한마이크로 김명숙 위원장의 음독 자살기도 소식이 알려지자 1996617일부터 김은영 사무국장과 최정진 교육부장이 삭발을 하고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20일 동안 지속하였다. 지역이 움직였다. ‘대한마이크로노조탄압분쇄 및 김명숙위원장 원직복직 추진 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민주노총이 출범한 후 인천본부에 있어서는 처음 벌어지는 지역 수준의 연대투쟁이었다. 최소 1백 명에서 1천여 명이 모이는 집회가 매일같이 벌어졌다. 집회가 거듭되면서 199675일 현재 16명이 연행되고 2명이 구속, 8명이 불구속 입건, 22명이 즉결 처분을 받는 등 대결의 양상도 심각했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후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했던 노동자들이 바로 이전 1984년 결성된 첫 번째 민주노조 조합원 선배들이었다. 이들은 <대한마이크로 후배들에게 드립니다>라는 유인물을 직접 만들었다. “후배 여러분! 현재의 탄탄한 회사와 최만립 회장의 사회적인 명성은 우리들 모두의 피땀어린 노력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노조를 지키는 일은 우리들의 양심을 지키는 것이고 권리와 이익을 찾는 것과 우리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입니다라며 비조합원들의 동참을 독려했다.

  특히 첫 번째 민주노조 당시 위원장이었던 곽순복 씨는 집회 현장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곽순복 전 위원장은 회사 정문에 매달려 쫓겨 날 때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그 때 내가 죽기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며 울부짖었다. 다니던 직장도 포기하고 매일매일을 대한마이크로 앞 농성장에 나와 함께 싸우며 대를 이은 노조 탄압, 대를 이어 끝장내자라는 구호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앞서 언급된 유인물도 곽순복 전 위원장의 친필 편지였다. 다른 조합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이들의 엄마가 된 1차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아이들과 함께 나와 후배들을 격려하고 연대했다.


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 곽순복 전 위원장_사진 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 자료집 편찬위원회
 

곽순복 위원장은 원래 수녀가 되고 싶었다. 부평 산곡동성당에 다니면서 네 시간도 못 자면서 대입시험 준비도 했다. 그러나 야근을 하면서 학원을 다니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실과 희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곽순복 위원장은 성당의 인간개발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 대한마이크로 동료인 조현숙(이후 사무장 겸 총무부장 역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모임을 시작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1984417일에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그리고 지역 활동가, 조직, 한국노총, 부천 YMCA 등의 다양한 자양분을 받으며 단단한 조직력을 갖춰 나갔다.
  그러나 1985년 구로동맹파업과 인천 부평 대우자동차 파업 등과 함께 대한마이크로 노조에도 큰 시련이 닥쳐왔다. 사측은 일부러 싸움을 걸 듯 일방적으로 단체협약을 어기고 교대근무제 변경을 통고했다. 비조합원들은 사측의 방침에 그대로 따랐지만, 조합원들은 이를 노조에 대한 의도적 탄압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서울에서는 622일에 구로동 대우어페럴 위원장과 사무장, 그리고 조합원 3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언론보도, 한국노총과 노동운동단체 등을 통해서 이런 소식은 대한마이크로 노동자들에게 신속히 전달되었다. 서울 구로지역의 민주노조와 대한마이크로 노동자들은 교육이나 연대활동 등을 통해서 서로 알고 있던 관계이기도 했다.



1985년 6월. 회사 출입을 막고 있는 구사대에 맞서 연좌한 조합원들
_ 사진 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 자료집 편찬위원회


   회사는 6월 말 경 위원장, 총무부장, 교선부장, 법규부 차장 등에 대해 징계위에 회부했다. 그리고 정문을 폐쇄하고 조합 사무실에 있는 조합간부들을 남자사원들이 욕을 하면서 폭력적으로 끌어내는 등의 물리적 탄압을 가했다. 비조합원들로 구성된 구사대책위원회를 동원, 곽순복 위원장 등 간부 조합원들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내고, 밀어내기도 했다. 회사와 경찰들은 조합원들의 출근을 완벽히 저지했다. 조합원들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역에 민주노조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회사 앞 출근투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들은 논쟁 끝에 한국노총 위원장실 점거투쟁을 결정했다.
   
198578일 노조원 71명이 여의도에 있는 한국노총 위원장실로 뛰어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밖에 남기로 했던 나머지 조합원 약 30여 명은 노총 주변과 회사 주변에서 계속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은 통근버스 운행 징계자들 징계 해제 임금 인상 농성에 대한 보복 조치 중단 등을 요구했다. 결국 노총 위원장과 최만립 대한마이크로 사장과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716임금 문제는 기본급 60% 인상’, ‘징계문제는 없었던 것으로하기로 하고 통근버스 운행과 이후 보복행위 금지하기로 약속하고 9일간의 점거농성을 마쳤다. 대다수 조합원들은 믿기지 않는 승리에 기뻐했으나 이것이 비열한 노조파괴 공작의 시작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1985년 7월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한 노동자들_사진 대한마이크로노동조합 자료집 편찬위원회
 

농성자들은 전경차에 실려 부평경찰서에 수감되었다. 71명 중 8명이 불구속 입건, 10명이 5~7일간 즉결처분을 받고 나머지는 훈방되었다. 717일 훈방된 45명 조합원들은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서에서 바로 회사로 넘겨졌고, 회사 측은 조합원들을 강제로 남자 기숙사, 기계실, 공작실 등에 분산 수용한 후 밖에서 망치로 두드리고 욕을 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직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온갖 폭력과 협박을 이기고 출근하는 조합원들에게 구사대책위원회에서 사직서를 들고 와 욕설을 하며 출근을 저지하는 일은 매일 지속되었고, 이미 불구속 입건이 확정되었던 4(곽순복, 조현숙, 이희례, 박순이)은 다시 경찰에 실려가 728일 구속 수감되었다.

즉결처분을 받은 조합원들은 무단결근으로 자동 사직으로 처리되었다. 간부들을 모두 잃은 조합원들에게는 강력한 사직 압박이 몰아쳤다. 조합원들을 작업 공간에서 분리시켜 사직서를 강요하는 일은 11월까지 계속되면서 강제 사직자는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856월부터 계속된 탄압과 이에 맞선 출근 투쟁은 862월까지 계속되다가 조합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켰던 불굴의 조합원들은 신흥희, 김경숙, 유순옥 그리고 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송경남이었다.

끝내 노동조합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간부와 조합원들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노동조합을 통해 성장한 조합원들은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대한마이크로 민주노조의 역사는 2차 노조, 3차 노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들의 헌신과 열정 뿐 만 아니라 그들의 미숙함과 결점까지도 같이 말이다. (계속)


  * 1984년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20077월에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심사를 신청했다. 그리고 20081201일 제255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의 본회의에서 명예회복이 결정되었다. 이에 앞서 구속되었던 곽순복 외 3인은 2004년에 이미 명예회복이 결정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사회적 인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대한마이크로 사례를 몇 차례에 나누어 연재하고자 한다.    

 
 
1985년 7월 한국노총 위원장실 점거농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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