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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차 양봉수열사 분신과 노동자투쟁(1995년 5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5-05-12 조회 241

현대자동차노조 양봉수 대의원 분신과 노동자들의 투쟁(19955)


해고노동자 양봉수의 분신투쟁

양봉수 열사는 196743일 전남 무안군 봉타면 사창리 954번지에서 2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목포 인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제대한 양봉수는 장남으로서 책임감과 동생들을 보살피겠다는 마음으로 19901015일 현대자동차 승용 2공장 의장2부에 입사했다. 입사와 동시에 동기들과 함께 턱없이 낮은 시급의 재조정을 요구하며 투쟁했고, ‘저시급자 동지회승용 2공장 대표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91년 부서 소위원으로 활동하다 그해 말 성과급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199221차로 해고됐다. 당시 어려웠던 노동조합 활동을 올바로 세우고자 동분서주했던 양봉수는 해고자 신분으로 구속·수배·해고자 가족들로 구성된 현대자동차 가족협의회총무를 맡으면서 궂은일도 마다치 않고 앞장서 활동했다.

고된 투쟁의 결과 199311일 의장2부에 원직 복직해 소위원으로 활동하다 1994년 초부터 의장2부 소위원회 부의장이 됐고, 같은 해 98대 대의원으로 당선됐다.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952월 신차 마르샤 개발에 따른 사업부 노사 간 M/H(Man/Hour) 협상(컨베이어 작업 속도를 조정하기 위한 협상으로 현장에서는 짭수 조정이라 함)을 하던 중 회사측이 사전 합의사항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신차 투입을 강행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생산라인을 중단했다. 이 일로 216일 징계위원회에서 두 번째 해고를 당했다.

양 대의원은 해고당한 뒤 223일부터 23일간 승용 2공장 본관 건물 앞에 천막을 치고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하지만 회사는 329, 해고를 철회하기는커녕 경비 20여 명을 동원해 대의원 자격으로 승용 2공장 M/H 협상장에 있던 양봉수를 폭력적으로 끌어내 정문 밖으로 내몰았다.

이에 맞서 양 대의원은 지속해서 현장 출입을 시도했지만, 경비들이 물리력을 동원해 가로막았다. 그러다가 512일 공동소위원회연합 2기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정문 출입을 시도했다. 경비들이 이를 저지하고 동료 해고노동자들을 집단 폭행하자 양 대의원은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내 몸에 손대지 말라. 손대면 불을 붙이겠다고 저항했다. 그러나 경비들의 저지는 계속됐고, 결국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분신 후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중에도 양 대의원은 “3만 조합원을 사랑합니다. 동지들을 믿습니다. 다시 돌아가 함께 하겠습니다라며 강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나는 3만 조합원을 사랑하고 노동조합을 사랑합니다. 빨리 회복되어 3만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3만 조합원 동지들의 건승을 빕니다……” (양봉수 열사의 마지막 음성, 1995515)

 

분신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

양 대의원이 분신한 뒤 오후 510, 분신한 장소인 정문 주변에 현대자동차노조 조합원 500여 명이 모여 항의농성을 전개했다. 535분 해성병원으로 이송된 양 대의원은 전신 3도 화상으로 위독한 상황이어서 해성병원측에서 회생 가능성을 10%로 진단, 치료 불가 판정을 내려 대구 동산병원으로 이동했다.

이 소식이 현장에 알려지자 분노한 승용 1·2·3공장과 상용 4공장 조합원들이 13일 오후부터 16일 오전까지 속속 전면파업에 들어갔고, 현대자동차노조 조합원들과 울산은 물론 전국에서 몰려든 노동자들의 항의집회가 정문 앞과 본관 앞 잔디밭에서 연일 계속됐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50여 명은 513양봉수 동지 분신 대책위원회(분신대책위)’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전직 위원장 3, 2공장 대의원 3, 공동소위원 연합 의장단 3,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3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됐다. 대책위 공동대표는 이상범, 이헌구, 윤성근 등 전직 위원장들이 맡았고 상황 업무는 최용탁, 박래정, 이상용, 재정업무는 박상준, 대외협력업무는 송두익, 이진윤, 조직업무는 김갑식, 김화식, 홍보업무는 2공장에서 1명이 맡았다.

분신대책위는 13일 정오 조합원과 지역노동자 4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상 보고 및 규탄대회를 열었다. 대책위는 이날 투쟁결의문을 통해 부당노동행위 즉각 중지 정당한 조합활동 보장 사건의 최고책임자 처벌 부당해고자 복직 노조 집행부의 비민주적 집행 중지와 규약 준수 적정 노동강도 유지대책 수립 등 6가지 요구를 발표하고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강력히 싸워나가겠다고 밝혔다. 15일 저녁 집회에는 5천여 명의 조합원이 모였다. 그러나 노조 집행부(위원장 이영복)14일에야 대책위(진상조사단)를 구성하고 조사를 벌인 뒤 대책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전노협은 13일 즉각 성명서를 내 회사의 현장통제 강화,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 이영복 집행부의 방조가 양봉수 대의원을 분신으로 내몰았다며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 중지, 이영복 집행부 사퇴 등을 촉구했다. 민주노총준비위원회도 16일 오전 과천 노동부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부당해고자 즉각 복직 부당노동행위 중지 최고책임자 처벌 이영복 위원장의 공개사과 등 7개 항을 촉구한 뒤 100여 명이 참가해 현대그룹 본사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었다.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도 사건을 접하고 곧바로 대책위원회를 구성, 전면적 지원·지지 투쟁을 선언했다. 현총련과 함께 울산지역 노조·노동·사회단체들도 회사 정문 앞 농성을 계속했으며 영남지역노조대표자회의도 16일 대표자회의를 열어 적극적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노동자들의 간절한 요구에도 정부는 519일 새벽, 전면파업 중이던 현대자동차에 공권력을 투입해 분신대책위 지도부를 연행·구속했다. 이와 함께 민주노총준비위원회, 현총련,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 마창노련 등 9개 조직을 지목해 3자 개입등의 혐의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예상치 못한 공권력 투입으로 농성장에 있던 노동자 250여 명이 연행됐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회사 주변에서 격렬한 거리시위를 벌였고, 현대정공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비롯한 울산지역 노동자들도 곳곳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현대자동차 파업과 관련해 분신대책위 공동의장인 이헌구·이상범·윤성근 등 11명을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연행했고, 현대자동차노조 2공장 대의원 대표 김광식 등 조합원 5명에게 긴급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공권력의 탄압에 민주노총준비위원회를 비롯한 민주노조 진영은 탄압분쇄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민주노총준비위원회는 523당면 노동상황에 대한 설명회를 열어 학계·노동계 등 각계인사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범국민대책위(가칭)’를 구성해 대국민 활동을 전개했다.

현총련은 522일 조합원 1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노동운동 탄압분쇄와 1995 임단투 승리 결의대회를 열어 강력 대응을 결의했다. 현총련 윤재건 의장은 이날 대회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에 맞서 임금인상 투쟁 일정을 전면 재조정해 앞당길 것이며, 지도부와 산하 노조에 대한 침탈이 자행된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총력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현총련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정부에 대해 울산에 배치된 경찰병력을 즉각 철수하고 구속된 현대자동차 조합원을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현대그룹에는 양봉수 조합원의 회생과 보상을 위해 대책위와 협상 현대그룹 해고자 전원복직 현총련과 공동교섭 등을 요구했다.

부산양산지역공동투쟁본부는 현대자동차 농성장에 경찰력이 투입된 519, 이에 항의해 밤샘농성을 벌였다. 공투본 소속 노동자 30여 명은 부양노련 교육관에서 연행노동자 전원 석방 해고자 복직 폭압적 노무관리 철회 이영복 집행부 사퇴 노동운동 탄압 중지 3자개입금지 등 악법 철폐를 촉구하며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대구지역에서는 양봉수 대의원이 동산병원으로 후송되자 상황실을 설치하고 사수대를 조직해 병원 주변을 지켰으며 지역노동자들은 연일 항의집회와 선전전을 수행했다.

 

열사의 죽음과 현대자동차 민주노조 결성

613일 오전 745, 현대자동차의 부당해고와 집단폭행에 분신으로 항거했던 양봉수 대의원이 분신한 지 32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양 대의원이 사망하자 경찰병력이 계속 증가돼 병원 출입문에 병력이 배치되고 사복경찰들이 중환자실을 원천 봉쇄했다. 경찰은 양봉수 열사의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병실 안에 있던 대구노련 의장 박용선, 동산병원노조 위원장 이을숙, 현대자동차 해고자 이정호, 징계자 박우석 등 4명을 대구 중부경찰서로 연행했다.

양 열사의 시신은 영안실로 옮겨진 뒤 검시를 거쳐 오후 310분경 입관을 완료했다. 한편 유족들은 123분경 기자회견을 열었다. 양 열사의 여동생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가족 공식 대변인은 KNCC(기독교 인권위원회) 오규섭 목사와 현대자동차 대의원 채규정으로 한다. 보상 절차는 회사와 합의한 후 가족과 협의하여 결정한다. 양봉수 형제의 죽음이 절대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 가족들에게 혐오감을 조성하는 공권력을 즉각 병원 밖으로 철수시키라고 밝혔다.

13일 밤늦은 시간에도 영안실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현대자동차 노동자와 대구지역 노동자 200여 명이 밤을 새웠다. 한편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이을숙 위원장과 박용선 대구노련 의장은 오후에 석방됐고, 현대자동차의 이정호·박우석은 구류 3일 처분을 받았다. 1850분 국제금속연맹 일본협의회에서 지지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왔으며, 권처홍·김말룡 등 각계인사와 민주노총준비위원회, 인천노동조합대표자회의 등에서 추모 행렬이 도착했다. 대구지역에서는 노조·단체 대책회의를 열어 양봉수 동지 사망 대책위를 결성하고 14일 오후 7시 병원 영안실 앞에서 추모집회를 했다.

619일 오후 6양봉수 열사 추모제가 현대자동차 조합원 1천여 명을 비롯해 현총련 조합원 4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됐다. 현대자동차 양봉수 열사 정신 계승 실천투쟁위원회(실투위)’의 이해민 위원은 경과보고를 통해 191230분경 경산화장터에 폭력경찰이 난입해 열사의 유골을 탈취하고 유가족을 납치한 만행을 규탄했다. “폭력경찰은 열사를 화장한 유가족과 추모위원회가 열사를 양산 솥발산 공원에 안치하기로 합의하자마자 열사의 유골을 탈취하고 유가족을 납치해 닭장차에 싣고 고향인 전남 무안으로 도망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고한 뒤 반인륜적인 만행까지 서슴지 않는 정권과 회사쪽에 맞서 현대자동차 3만 조합원은 열사의 바람인 민주노조를 반드시 쟁취할 것이라고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한편 전국적으로도 양봉수 열사를 추모하는 집회가 잇따랐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추진위원회는 17일 탑골공원에서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노동운동 탄압분쇄와 양봉수 열사 추모대회를 열고 투쟁 결의를 다졌다. 참가자들 19일까지를 추모기간으로 정하고 분향소 설치, 리본 달기 등을 통해 열사 정신을 계승하기로 결의했으며 집회 후 양봉수 열사의 영정을 들고 종묘공원까지 행진하며 거리홍보전을 펼쳤다. 616일에는 경기남부지역과 마창지역에서, 17일에는 대구지역과 인천지역에서 양봉수 열사 추모집회가 열려 열사 정신 계승 노동운동 탄압분쇄 1995년 임단투 승리를 다짐했다.

9196대 위원장 선거에서 민주파가 승리했다. 양봉수 열사 분신대책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전개했던 현장 민주파들의 단일 후보 정갑득이 5대 위원장 이영복을 누르고 위원장에 당선돼 양봉수 열사의 염원이었던 민주노조의 깃발을 힘있게 꽂게 되었다. 이날 투표에는 조합원 32,688명 중 31,895(96.3%)이 참가, 정갑득 후보가 19,298(61.3%)를 얻어 11,871표를 얻은 이영복을 7,427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정갑득 후보와 조를 이루어 출마한 주용관은 수석부위원장에, 이영희, 이성건은 부위원장, 하후영은 사무장에 각각 당선됐다. 한 조합원은 “920일 양봉수 열사 100일제에 맞추어 선거에 승리, 현대자동차에 민주노조의 깃발을 올릴 수 있게 돼 양봉수 열사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린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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