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 3.1운동
- 3.1운동에 참가한 노동자들 -
박준성(역사학연구소, 노동자교육센터, 노동자역사 한내)
우리 근현대사를 보면 세상을 뒤엎을 뻔한 항쟁들이 주기적으로 계속되었다. 1894년 농민전쟁, 1919년 ‘3.1운동’, 1946년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 1960년 4월혁명, 1979.80년 부마.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투쟁 들이 그러한 사건이었다. 1996.97 노동법개정투쟁이나 2008년 촛불항쟁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러한 사건들은 항쟁과정에 직간접으로 참가한 사람들의 이후 삶 뿐 아니라 사회운동, 노동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1운동이 특히 그렇다.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2개월 동안에 200만명이 넘는 민중이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전국 232개 부.군가운데 229개 부.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에 참가했던 조선 민중들은 169여 개의 주재소, 면사무소같은 식민지 지배기구를 파괴하였다. 격렬한 반일항쟁 뒤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전국에서 학살된 사람이 8천여 명, 부상자가 1만 5천여 명, 검거된 사람이 4만 7천명에 이를 정도였다.
3.1운동 당시 노동자 계급은 전체 인구 가운데 머리수가 많지도 않았고,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따로 내세우지는 못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3.1운동 초기 단계부터 노동자들끼리 또는 시민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나섰으며 파업 투쟁으로 3.1운동의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시위에 나선 것은 3월 2일 0시 20분 종로에서였다. 4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종로 네거리에서 종로경찰서 앞까지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3월 5일 서울역과 남대문에서 거행된 시위에도 노동자들이 합세하였다. 3월 8일 오후 7시 40분 무렵에는 용산에 있는 조선총독부 총무국 인쇄소에서 야간 작업을 하던 노동자 200명이 식당에서 시위를 결의하고 사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를 계기로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전차차장과 운전수, 수선공들이 잇따라 파업에 들어갔다.
3월 9일 오전에 시작한 전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3월 29일까지 20일 동안 계속되었다. 서울의 전차교통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회사측과 일본 경무당국은 회유와 협박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분열시켰다. 3월 10일 종로 4가에서 300여 명의 시위대가 동료들을 배신하고 파업에서 빠져나가 전차를 몰던 운전수를 폭행하였다. 그들은 “왜놈에게 혹사되면서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하루 속히 자살하라”는 선전문을 뿌리며 곳곳에서 전차에 돌을 던지고 운행을 방해하였다. 서울에서 평상시 58대가 운행되던 전차가 겨우 19대만이 운행되었다. 그것도 무장한 일본군이 함께 타고 경호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26일에는 20량의 전차가 시위대에 의해 대파되었다.
일본군이 시위 군중에게 총을 쏘면서 진압함에 따라 일반 시민들의 시위가 거의 중단되었을 때도 노동자들은 공장 단위로 분산적인 동맹파업을 벌이면서 줄기차게 투쟁을 계속하였다. 3월 10일 이후 서울에서는 노동자가 평상시의 10% 정도밖에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3.1운동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벌인 대표되는 시위는 3월 22일 철도기관수 차금봉이 잡역노동자와 부근의 전차차장, 공장직공 등 700-800여 명을 이끌고 만리동에서 독립문까지 행진하면서 벌인 만세시위였다. 철도노동자들의 시위행진은 한동안 잠잠하던 시위운동에 불을 붙였다. 23일에는 새벽부터 훈련원, 동소문, 미생동, 원효로, 창덕궁 등 시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차금봉은 27일에도 만철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노동자 800여 명이 서울역 부근에서 ‘조선노동자대회’ ‘조선독립’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시위를 벌였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만철경성관리국의 조선인 노동자 900명 가운데 85명의 탈락자를 빼고 800여명이 시위에 참가하여 3월 31일까지 5일간의 파업을 감행하였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었던 차금봉은 뒤에 1928년 노동자 출신으로 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가 1929년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지방에서도 노동자들의 만세 시위에 나섰다. 3월 7일 평북 운산군 북진에 있는 동양합동광업회사 노동자 시위, 3월 15일에는 평북 의주군 고창면의 조선총독부 광무과 출장소 노동자 시위, 3월 20일 회령 지역의 노동자 시위, 3월 20일 28일 4월 3일 천안군 직산금광회사의 광산노동자 시위, 4월 1일 충남 아산군 둔포면 운룡리 일본인 광산노동자 시위, 4월 5일 강원 통천군 고성의 노동자와 농민 시위, 4월 8일 10일 경남 동래군 기장의 노동자와 가족 시위들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은 만세 시위운동 뿐 아니라 공장을 멈추는 파업 투쟁으로 3.1운동에 동참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노동자들은 84건의 파업을 벌였으며 9011명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들은 92%인 8,283명이었다. 업종별 파업건수를 보면 인쇄공 13, 제화공 12, 정미소노동자 9, 담배공장노동자 8, 운수노동자 4, 부두노동자가 4, 철공소직공 4, 전기관계 노동자 3, 토건노동자와 광산노동자 각 3건이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중심되는 요구는 임금인상으로서 전체의 83%를 차지한다. 건수로는 적으나 8시간 노동제 요구도 이미 1919년 노동자 파업투쟁에서 나타났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공장 기계시설 파괴, 일본인에 대한 폭력행사, 항의 연설회, 시가행진, 동맹파업, 태업, 진정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요구가 바로 3.1운동의 한쪽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으며 투쟁을 이어나갔던 힘이었다.
3.1운동은 그 이후 운동의 방향과 주체가 바뀌고 나뉘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정치라는 개량의 공간 한편에서는 “무식한 대중이 2백만 3백만이 들고일어났는데도 결국 실패하고 말지 않았나, 얻은 것이 뭐냐, 주어진 조건을 활용하면서 힘을 기르고 필요하면 들어가서 입지를 넓히는 것도 운동의 방법 아니냐” 하면서 자신들의 좌절과 변절을 정당화하는 타협적 개량적 민족주의가 고개를 내밀며 목소리를 높여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 농민대중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교육하고 투쟁하는 것이 민족해방운동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인식한 활동가들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3.1운동 과정에서 억눌리고 빼앗기고 무시당하던 ‘무지렁이 백성’들이 뿜어내는 힘을 생생하게 보았다.
3.1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이 사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실천의 무기로 만드는 용광로이자 풀무였다.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자본주의 국가통합과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민족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노동자 농민대중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조직하고 함께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3.1운동을 겪고 난 뒤 1920년대 노동운동은 이러한 사회주의운동과 짝을 같이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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