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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대구 택시노동자 투쟁
⦁ 시기 : 1984년 5월 25일
⦁ 요약 : 1984년 대구지역 택시노동자들이 사납금 인하 등을 요구하며 지역 차원에서 투쟁을 벌여내 요구조건을 관철한 투쟁으로, 경산, 대전, 서울, 강릉 등 전국으로 퍼졌다.
1984년 5월 25일 새벽 5시경 대구 시가지 중심 중앙주유소, 태평지하도, 대구역 일대에 택시노동자들이 500여 대의 택시를 몰고 나와 농성을 시작했다. 6시 30분경 경찰과 조합장들의 설득으로 해산할 것 같던 이들은 8시에 이르러 오히려 9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택시노동자들은 주요 지점마다 50~100여 명씩 농성하며 대구 시내 교통을 사실상 마비시켰고, 경찰 100여 명이 해산을 시도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중도 포기하고 대치했다.
이날 오전 8시 30분경, ‘사납금 인하’ ‘부제 완화’ ‘노조결성 방해 중지’ ‘LPG 자유 급유’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900여 명이 대구시청에 집결해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유경호 부시장이 부재중인 시장을 대신해 면담하며 중재를 자청했지만, 택시노동자 대표들은 이를 거부하고 대구택시운송사업조합 이사장 최용찬과의 직접 면담을 요구했다. 한편 대구택시운송사업조합은 긴급이사회를 열어 △사납금 4,000원 인하 △토·일요일 추가 사납금 철폐 △10부제에서 6부제로 완화 △예비군 훈련 시 기본급 지급 등 택시 운전기사들의 요구조건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최용찬 이사장은 대구시청 앞에서 결정사항을 발표하다가 이를 듣기 위해 노동자들이 몰려오자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정오 경에는 한전 대구지점, 칠성시장 등지에서 시위를 벌이던 택시노동자들이 시내로 행진해 시청에서 농성하던 대오와 합세함으로써 본격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그렇게 해서 오후 3시 30분경 △최용찬 이사장에 대한 중부경찰서장의 수사 약속 △사납금 8,000~10,000원 인하 △월급 적립금과 LPG값 제외한 순수 사납금 25,000원 보장 △LPG 충전 자율화 등 모든 조건이 받아들여지고, 이날 시위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유경호 부시장의 약속을 받은 후에야 해산하기 시작했다.
한편 시청 앞에서 본 대오가 해산하고 있던 오후 5시경 시내의 다른 주요 도로에서 시위를 벌이던 택시노동자 1,000여 명은 반월동 로터리에 집결해 시내 중심도로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 대오는 최용찬 이사장의 확실한 약속을 받기 위해 그가 사주인 제일택시로 몰려가 택시 19대를 뒤집어엎고 부숴버리는 등 격렬하게 투쟁하다 오후 8시경 경찰에 65명이 연행되면서 흩어지게 되었다. 5월 26일 연행자 중 9명이 구속되자 5월 26일과 27일 구속노동자 석방을 위한 파업과 시위, 서명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구지역 택시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산으로 파급됐다. 열흘 뒤인 6월 4일 새벽 1시 20분부터 부산 택시노동자 1,000여 명이 ‘택시미터기에 의한 일일 협정거리 하향 조정’ ‘LPG 주입 자율화’ ‘사납금 인하’ 등 5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서면 로터리 부근에서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시위하다 부산시 당국과 교섭을 벌인 뒤 새벽 6시 20분경 자진 해산했는데, 부산시장을 비롯한 시청 간부들과 협의 끝에 △사납금 5,000원 인하 △상여금 월별 지급 △LPG 주입 자율화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부산 택시사업주들이 간담회에서 사납금 5,000원 인하만 받아들이고 나머지 사항은 노사협의 후 결정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부산시장이 택시노동자들에게 보장한 5개 합의사항이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부산 택시노동자 400여 명은 나머지 4개 요구조건의 이행을 촉구하며 부전동 서면 로터리에서 택시를 집결해 놓고 5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택시노동자들의 집단투쟁이 아침 6시 30분까지 계속되자 긴급 출동한 기동경찰 500여 명은 노동자들을 강제해산하고 해산에 불응한 노동자 10여 명을 연행했다. 그러나 6월 5일 택시노동자 1천여 명은 사업주들에게 나머지 4개 항 이행을 요구하며 시위와 농성을 전개해 부산시경과 부산시 당국으로부터 다시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사항을 택시사업주들이 또다시 거부하자 6월 6일 400여 명이 재집결해 합의사항 이행을 촉구하며 투쟁을 전개했다.
대구지역 택시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전국의 택시노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984년 5월 26일에는 경북 경산, 5월 30일에는 대전, 서울의 세한콜택시, 강릉 택시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산됐다. 특히 서울, 광주, 영주 등에서는 사납금 인하를 요구해, 직접 행동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노사협의에서 사납금이 재조정되기도 했다.
1984년 5~6월 택시노동자들의 투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첫째, 단위사업장을 넘어 한 도시 전체의 여러 사업장 노동자들이 동시에 투쟁에 참여했고, 이러한 양상이 전국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투쟁 양상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전례가 됐다. 둘째, 택시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신규노동조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는 점이다. 대구지역의 경우 파업 이전 12개에서 4배나 증가한 50여 개의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부산에서는 1983년 말 108개였던 노동조합이 1984년 6월 말에는 122개 업체로 6개월 동안 14개 업체가 늘어났다. 셋째, 이들의 투쟁은 처음부터 노동쟁의조정법이라는 악법을 무시한 채 투쟁을 전개하고, 이후 법에 따른 제재를 힘으로 막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노동악법의 한계와 어용노조들이 준법투쟁이라는 미명 아래 감춰온 노사협력주의를 여지없이 박살 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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