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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전국노동자대회(1994년 11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94-11-13 조회 115

1994년 전국노동자대회(199411)


전국노동자대회 기조와 주요 요구

1994년 전국노동자대회는 민주노총 건설사업의 성과와 방침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대회 이후 민주노총 건설사업을 더욱 대중적으로 힘있게 전개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민주노총 건설 준비위원회로 모든 민주노조 진영을 조직·결속하도록 대회를 조직하고,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조직·투쟁 등 제반 사업과 계획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결의할 수 있도록 하며, 노동법개정과 사회개혁 등 전체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기하기로 했다.

1994년 전국노동자대회의 주요 요구는 민주노총 건설 산별노조 건설 노동법개정 구속·수배·해고자 원상회복 세제개혁 등 경제·사회 개혁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임금가이드라인 철폐 전국노동자 총단결로 민주노총 건설 민주노총 건설로 자주적 단결권 쟁취 등이다.

대회는 민주노총건설추진위원회 주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후원으로 해서 명칭은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로 정했다. 1113일 경희대 대운동장에서 진행하고 청량리역까지 행진하기로 했으며 전날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전야제를 열기로 했다.

 

전국노동자대회 조직화 활동

1994년도 전국노동자대회는 예년보다 준비가 늦어졌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실천주간을 설정했다. 선전홍보사업으로 민주노총 건설에 대한 조직 내외의 인식을 높이고 전국노동자대회의 사전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실천주간은 115~13일로 설정했다. ‘선전의 날에는 지역·단사별로 민주노총 건설과 노동자대회 참가를 알리는 선전물을 공단지역 등지에서 배포했다.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조합원 11소깃발 서명운동으로 조합원들이 자신의 요구와 결의를 담을 소깃발을 만들어 본대회장 입구와 주변에 전시했고, 본대회 문화행사 때 조합원 결의를 상징하는 의미로 활용했다. 이밖에도 민주노총 건설의 필요성을 알리는 교육을 배치하고 노래를 보급하는 등의 실천사업을 펼쳤다.

전국노동자대회에 앞서 전태일열사 추도식과 묘소참배도 진행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노동자들이 1113일 오전에 집단적으로 묘소를 참배하기로 했지만 차량이 준비되지 않아 200여 명만 참석했다. 추도식은 1113일 오전 11시에 청계피복노조원과 전태일열사 기념사업회 및 내빈을 중심으로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했고, 추도식 참여자들은 당일 노동자대회에 늦게 결합해 행진에 함께 했다.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노래판굿 꽃다지 모여드세공연도 기획했다. 1156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민예총 주최, 전노대 후원으로 공연이 열렸다. 사업장별로 조합원 단체관람을 통해 민주노총 건설에 대한 조합원들의 공유와 토론을 유도하는 한편 전국노동자대회 참여를 결의하게 했다.

 

전국노동자대회 준비

노래문선대 108, 율동문선대 13, 풍물문선대 131명 등 총 252명으로 구성한 문화선동대가 대회 전반의 문화행사를 담당했다.

노래문선대는 서노협 50(서부 13, 중동부 12, 구로 2, 지하철 4, 서야협 9), 인노협 13, 경기노련 9, 병원노련 8, 사무노련 13, 현총련 15명 등)으로 구성했으며 연출은 노래선언 최도은, 꽃다지 박미영이 맡았다. 율동문선대는 총 13명으로 구성해 사전에 율동을 선정, 율동비디오를 만들어 연습하고 12일에 총연습을 했다.

풍물문선대는 서노협 28, 인노협 35, 부노협 9, 경기노련 16, 마창노련 4, 건설노련 5, 전문노련 6, 병원노련 5, 언론노련 5, 기아지동차 10, 현총련 8명 등으로 구성했으며 터울림 정순남과 그루터기 배지용이 연출을 담당했다.

전야제 문화선동 프로그램은 노동자문예교육협회 김자영이 연출했고 본대회 식전행사는 노동자문예교육협회 장기호가 담당했으며 대회 전체 반주는 꽃다지 반주단이 맡았다. 또 류금신, 정태춘, 박은옥, 노래선언, 꽃다지가 문화공연을 펼쳤다.

1994년 전국노동자대회 질서유지반은 노동자 100명과 학생 50명 등 총 150명으로 구성돼 전야제 때 노점상 단속과 주차 안내, 본대회 때 출입구 질서유지, 연단통제, 대회장 중앙통로 질서유지 등을 담당했으며 해산까지 선두에서 대오를 통솔했다.

 

전국노동자대회 진행

전야제(1112, 1만여 명 참여)

식전행사(19:05) : 풍물패 길놀이 및 판굿, 율동배우기

개막식(19:40~20:40) : 개회선언, 민중의례, 개회사(권영길 공동대표), 민족무예 경당 공연, 민중가수 류금신과 노래배우기

발표 1(20:40~23:00) : 전지협(투쟁사례 비디오극), 전문노련( 사랑의전화노조 투쟁), 보험노련(AHA노조 투쟁), 병원노련(부천제일병원노조, 의보법개정문제), 외국인노동자, 전농(UR 연설), 업종연합(사무·전문·병원·건설) ‘춤바람’, 전해투(슬라이드 투쟁극), 부노협(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풍물굿)

발표 2(23:00~02:00) : 경희대 총학생회장 환영사와 학생문선대 공연, 전태일 영화 소개(문성근·윤명선), 서울지역야학협의회, 포항지역(콩트), 마창노련·원진레이온비대위(산안법개정을 위한 노래극), 노동법 개정연설(정경화 서노협 나우정밀노조 부위원장), 현총련(소개와 투쟁 보고), 대구지역(노래극), 진주지역(철의 노동자 노래), 전북지역, 한국통신노조, 충북지역, 전기협 비대위, 성남지역(민주노총 건설 박터트리기), 서울·인천·경기남부지역 연합공연, 현총련 공연

본대회(1113)

사전행사 : 전태일 열사 묘소 참배, 산재추방 결의대회, 각 대오 결의대회

식전행사(12:20~14:15) : 풍물패 길놀이, 노래배우기 및 율동배우기, 축하공연(정태춘박은옥, 노래선언, 꽃다지), 전체가 함께하는 시간(이준용 서노협 문화부장 진행), 문선대 공연

본대회(14:30~16:00) - 개회선언 및 깃발 입장, 민중의례, 참여조직 및 내빈 소개, 대회사(양규헌 공동대표), 축사(윤영규 전국연합 공동의장), 연설(서울지하철노조 쟁의부장 박정규, KBS노조 부위원장 전영일),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대합창, 대회 결의문 낭독(최은석 공동대표), 폐회선언

행진(16:10~) - 경희대에서 청량리까지

 

전국노동자대회 평가

1994년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는 총노동 전선을 대중적으로 구축해 내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는 1994년 총노동 대 총자본 전선의 성격과 그간 전국노동자대회가 가졌던 위상과 의미 속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1994년 대회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대중적으로 선포됐다는 점에서 조합원들도 기대가 컸기 때문에 선전·홍보·조직화 사업이 부족했음에도 많은 조합원이 참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적 중요성이 대중적으로 확인되고 결의되는 데는 매우 부족했으며 민주노총 준비위원회의 출범만을 선언하는 것에 머물렀다.

첫째, 민주노총은 투쟁을 통해 건설한다는 원칙 아래 노동법개정 투쟁과 전태일 열사의 투쟁 정신을 대회기조 속에 올바로 살려야 했다.

둘째, 대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민주노총 건설에 대한 결의를 다질 수 있는 분명한 주장과 요구내용이 부족했다. 제반 사회개혁과 관련해서는 슬로건과 현수막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특히 정기국회에서 거론되고 있던 산업안전보건법 개악, 고용보험법 제정 등 노동자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내용이 대회 내용으로 반영되지 못했다.

셋째, 행진 기조에서 경찰의 원천 봉쇄에 대한 대응투쟁만 생각하고 시민의 불편을 고려하지 않아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참여 조합원에게 1994년 전국노동자대회가 민주노총 건설을 실질적으로 선포하는 대회라는 총괄적인 상을 부여하지 못했고, 노동자의 결의와 요구를 힘있게 전달하는 거리행진이 되지 못했다.

여러 한계 속에서도 조합원 대중이 가진 민주노총 건설의 열망을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발족으로 연결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큰 대회였다. 그리고 한국통신노조, 전기협, 그밖에 민주노조운동 진영에 동참하고 있는 많은 노조의 참여는 민주노조 총단결을 가시화시켜주는 알찬 성과였다. 또 신규노조의 조합원과 신임 집행부가 참가한 많은 노조가 민주노총 건설과 전국적 연대라는 감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국노동자대회 준비체계에 대한 평가]

대회 준비체계 구성과 관련 민주노총추진위 회의에서 대회 준비와 집행을 전노대 집행위원회가 수행한다고 결정해 치밀한 계획과 조직적 집행을 담보하기가 어려웠다. 전노대 집행위원의 대부분은 민주노총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회를 조직적으로 준비하기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민주노총추진위 집행위원회의 사업으로 대회 준비가 추가됐지만 추진위 사업과 대회 준비를 동시에 병행하기는 어려웠다.

대회의 행사준비반 구성과 운영에서도 책임있는 활동이 부족했다. 본대회 무대 설치에 전국건설일용노조 조합원이 철야 작업을 하면서 이전 대회보다 나아진 점은 있었으나 전야제 장소 시설철수와 본 대회장으로의 철야 이동설치 작업에는 담당했던 조직에서 책임을 지지 않아 자원봉사 학생들만 일을 떠맡았다.

[대회 조직화에 대한 평가]

대회 조직화 현황이 사전에 파악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가입 노조나 신규가입 조직의 참여는 많이 늘어났으나 기존 조직의 참여율은 저조했으며 노동조합 외의 대중 참여도 저조했다.

경기남부지역은 각급 단위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노동법개정 투쟁으로 조합원 11요구안 갖기, 대형 글자판 제작, 구호공모 등 다양한 현장실천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대회의 기조와 상에 대한 교육·선전을 목적 의식적으로 배치하지 못했다.

조합원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대중사업으로 기획한 조합원 소깃발 서명사업은 많은 지역에서 추진했다. 그러나 대회 준비팀에 전달이 늦어져 일부 지역의 소깃발은 대회장에 나부끼지 못했다. 마창노련은 조합원 서명 깃발을 참가 대오의 상징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외에 민주노총 준비위원회 특보가 늦게 나와서 배포할 여유가 없었으며, 대회 주최측의 공식 유인물이 준비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1994년 전국노동자대회에는 전야제 4,805(서울 500, 인천 500, 부천 90, 경기 450, 성남 80, 대구 180, 부양 100, 진주 100, 마창 600, 거제 125, 포항 80, 경주 56, 구미 49, 울산 850(현총련 750), 광주 450, 전북 200, 청주 70, 순천 55, 목포 20, 대전 120, 천안 130, 본대회 8,066(서울 1,200, 인천 1,200, 부천 350, 경기 900, 성남 250, 대구 250, 부양 500, 진주 100, 마창 600, 거제 125, 포항 80, 경주 92, 구미 49, 울산 1,200(현총련 1,100), 광주 450, 전북 200, 청주 100, 순천 55, 목포 55. 대전 180, 천안 130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진행과 관련한 평가]

전야제는 각 지역·업종·그룹 등 조직단위가 예년에 비해 간결하고 각 조직의 절실한 문제 또는 투쟁을 소개해 사실적이고 진지했다. 사전행사로 계획했던 전태일 열사 묘소참배는 차량 문제로 취소돼 아쉬움을 남겼다. 본대회는 대회사를 통해 민주노총준비위 건설을 선포한다는 것에 중심을 두고 기획했으나 선포에서 그치고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는 데는 부족했다. 행진은 기조 설정 과정에서 논란을 벌이다가 경희대에서 청량리로타리 입구까지 행진하고 대오별로 마무리하되 지도부가 최선두에 서서 행진하기로 정했으나 행진 대오 편성에서 지도부가 빠졌고 대오가 길어서 청량리역까지 가지 못하고 해산한 조직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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