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자본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를 차단하고 나섰다. 늘 써먹는 수법이지만, 기업 내부에 머무르는 노동조합운동을 적극 권장하는 대신, 노동운동의 활동가들과 함께 기업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노동조합운동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노동3권은 곧 좌경폭력세력의 권리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국가와 자본은 1989년 1월부터 억압적이고 폭압적인 공안권력기구와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 장치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와 자본은 이러한 힘을 토대로, 1989년 초 풍산금속 노동조합의 투쟁, 3월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투쟁, 4월의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의 투쟁 등에 공권력을 투입하였다. 대규모 공권력 투입은 청와대를 비롯한 안기부, 보안사, 내무부, 법무부 등의 사전협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들 기관의 유기적 협력 아래 실시되었다. 특히 공안합동수사본부의 발족은 이 시기 노동정책의 결정 및 실행의 주체가 어떤 부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좌경폭력세력’의 당당한 연대
김영수(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노동자들은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1988년 11월 노동법 개정투쟁으로 모아내면서 자신들만의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헌법이나 법률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이 국가와 자본의 입맛대로 요리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러한 요리의 재료로 취급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와 자본을 음식재료로 삼아 자기 스스로 요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한 것이다. 그 요릿집은 바로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는 것이다. 1990년 1월에 결성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바로 그 집이었다. 그런데 그 요릿집을 만드는 것은 노동자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노동운동단체의 활동가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설계하고 집행해서 만들었다. 계급적인 연대가 일상이었고 자연스러웠기에 노동자들의 요릿집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를 차단하고 나섰다. 늘 써먹는 수법이지만, 기업 내부에 머무르는 노동조합운동을 적극 권장하는 대신, 노동운동의 활동가들과 함께 기업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노동조합운동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노동3권은 곧 좌경폭력세력의 권리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국가와 자본은 1989년 1월부터 억압적이고 폭압적인 공안권력기구와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 장치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와 자본은 이러한 힘을 토대로, 1989년 초 풍산금속 노동조합의 투쟁, 3월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투쟁, 4월의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의 투쟁 등에 공권력을 투입하였다. 대규모 공권력 투입은 청와대를 비롯한 안기부, 보안사, 내무부, 법무부 등의 사전협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들 기관의 유기적 협력 아래 실시되었다. 특히 공안합동수사본부의 발족은 이 시기 노동정책의 결정 및 실행의 주체가 어떤 부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경찰병력은 노동자 파업 현장 침탈을 서슴지 않았다. (사진_서울지하철노조)
1989년 3월 22일 대통령이 ‘좌경폭력세력 척결’을 위한 상설대책기구를 설치할 것을 지시함에 따라 4월 3일 구성되었다. 공안합동수사본부 참여기관은 안기부, 보안사, 검찰, 경찰, 문교부, 노동부, 문화공보부 등이었으며, 전국 12개 지역에 지역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국가와 자본은 1989년 4월 18일 당시 ‘5월 총파업’ 논의에 대한 대책으로 불법 노사분규 및 배후조종자 신고센터’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158개 노사분규 중점관리업체를 선정하였다. 이를 A B C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긴급조정권 발동, 공권력 투입, 중재명령 발동 등의 대책을 실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노동쟁의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노동자에 대한 구속이 크게 증가하였다. 1988년 말부터 1989년 6월 27일까지 구속된 시국관련 구속자 645명 중 구속노동자의 수는 266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은 ‘산업평화 조기정착과 임금안정,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통제정책의 기조를 설정하고, 각 종의 언론매체와 활자화된 홍보매체를 통해 ‘급진노동세력 척결’의 필요성을 여론화하였다. 국가와 자본은 ‘TV토론, 신문의 사설, 정부의 담화, 산업평화 포스터, 급진노동세력의 실체 등의 홍보책자 5종 25만 권 배포’ 등의 수단으로, 혹은 경제위기 이데올로기와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유포하는 장치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계급적 연대를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려 하였다.
1990년 5월 말 당시에 구속 노동자 361명중 325명이 전노협 중앙위원, 지노협 및 단위 노동조합의 간부, 해고자 및 노동단체의 활동가들이었다. 1988년 3월 1일부터 1991년 7월 31일까지 구속되었던 노동자는 총 2,348명이었으며, 구속사유의 범위도 업무방해와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확대되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이런 탄압의 산고를 겪으면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노동자들이 국가와 자본을 상대로 ‘내가 좌경폭력세력이나 반체제세력으로 몰리더라도 너희들을 재료 삼아 요리할 것이다.’를 선언하고 활동하였던 것이다. 국가와 자본은 필요하다고 여기는 순간 민주노조운동을 각개격파의 방식으로 계급적 단결을 해체하려 하였지만, 노동자들은 오히려 계급적 연대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고 실천하였다. 이러한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을 성찰하고, 계급적인 연대와 실천을 새롭게 재-현(re-presentation)하려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포착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