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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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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인정받은 직업병 - 고 김봉환씨의 직업병 인정을 위한 137일 장례투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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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05-30 |
조회 |
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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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창간준비 제2호 (2008년 4월 29일)
■ 이달의 노동자 역사
죽어서 인정받은 직업병 - 고 김봉환씨의 직업병 인정을 위한 137일 장례투쟁
1991년 5월 21일.
구리시 원진레이온 공장 앞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8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원진레이온 직업병환자, 고 김봉환 산업재해 노동자장’이었다. 노제가 원진레이온 공장 앞 4차선 도로에서 1시간 동안 진행됐고, 이어 남양주군청 앞까지 약 3백m 상여 행진을 한 뒤 마석 모란공원으로 움직였다.
김봉환씨는 원진레이온에 1977년 12월 22일 입사해 손발 저림과 마비증세로 1983년 퇴사했다. 1989년에는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1990년 9월 7일 다시 쓰러져 언어장애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및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고 산재요양신청을 했으나 회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과 동료들이 수차례 노동부를 항의 방문해 산재요양신청을 하다가 1991년 1월 5일에야 노동부 직권으로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됐으나, 김봉환씨는 이날 외동딸의 등록금을 내고 오다 쓰러져 사망했다.
이날부터 유가족과 지원세력은 시신을 재세병원에 안치시켜 놓고 ‘김봉환씨 직업병인정’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사람들이 지쳐갔고, 병원에는 미망인과 지원세력 몇 사람만이 있을 때가 많았다. 시체가 썩어가면서 여기 저기 ‘펑’, ‘펑’ 터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지켜보는 미망인의 마음은 찢겨져 나갔고, 사춘기 여고생인 딸은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방황했다. 그럼에도 회사 측은 경찰과 관리자들을 보내 미망인을 돈으로 매수하려는 작태를 보이면서 직업병인정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87일째인 3월 31일 지칠 대로 지친 유가족과 지원세력은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고 김봉환씨의 한이 서린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노제를 지내려 했다. 이날 때늦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 졌다. 그러나 회사 측이 관리자를 동원해 장례식조차 못하게 하자, 참석자들 사이에 ‘도저히 이렇게 개죽음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분노의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참석자들은 “직업병이 인정될 때까지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며 공장 정문 앞에 시신을 모셔놓고, 농성을 시작했다. 매일 저녁 공장 앞에서 ‘산업재해추방대회’가 열렸다. 연대투쟁도 활발했고 직업병에 대한 선전도 활발히 이뤄졌다. 회사측 의사와 노동자측 의사로 구성된 6인 특별위원회가 열렸으나 ‘직업병 판정불가’라는 결론을 냈다. 이에 원진레이온 해고자가 항의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뒤이어 미망인도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투쟁 분위기가 흔들렸다.
상황을 해결할 실마리는 장례투쟁이 아닌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자본 측이 은폐하던 직업병환자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집단적으로 직업병환자가 판명됐고, 김장수, 박수일은 쓰러졌고, 권경용이 자살을 했다. 원진레이온은 말 그대로 ‘직업병 제조공장’이었다. 이때부터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직업병 문제는 연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다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노동자들도 “어제는 산업역군이라더니, 오늘은 산업쓰레기냐”며 울분을 토했다.
사회 여러 세력의 관심과 지원을 받으면서 다시 투쟁의 분위기가 높아갔다. 당황한 노동부가 특별검사반을 원진레이온에 파견했으나, 때늦은 조치에 조합원들의 분노를 자극해 노조는 파업을 선언했다. 성난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노동부는 ‘직업병종합대책’을 발표했고, 국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 마침내 국회에서 ‘김봉환씨의 직업병 가능성’을 인정했다. 사망 후 137일 만에야 김봉환씨의 장례식이 가능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3년 법정에서 김봉환씨는 직업병을 인정받았다.
김봉환씨 같은 원진레이온 출신 이황화탄소중독 환자는 현재 913명이나 된다. 피해자들과 지원세력이 연대해 1988년 시작한 직업병투쟁은 1991년 김봉환씨 장례투쟁을 거쳐, 1993년 폐업반대와 직업병대책마련 투쟁, 1997년 직업병전문병원건립투쟁까지 10년이나 걸렸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직업병투쟁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은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무시하고 적은 투자로 최대 이윤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 이제는 직업병,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에서, 한발 나아가 ‘건강하게 노동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만들어 ‘일하면서 건강을 지켜내는’ 투쟁이 필요하다. 그것이 원진레이온 직업병투쟁이 남긴 교훈이며, 김봉환씨 죽음이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장 유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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