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가보는 내 나라
기억 속의 인천 연안부두
서동석 (통일문제연구소 회원)
살아 온 자국들은 지워지지 않나 봅니다. 아주 잊어버렸다 싶은 일이 어떤 때를 맞닥뜨리면 그 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꿈으로도 나타납니다. 흔히 나이 들어가면서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푸념을 합니다. 어릴 때 겪었던 일들이 근래 일보다 더 생생하다고 말입니다. 가까운 날의 기억보다는 먼, 그것도 꼬맹이 시절의 일들이 왜 나이 먹으면서 더 또렷이 되살아 나냐고 되묻습니다.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지난 일을 잊지 않고 외워 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외워 둔다고 했습니다만,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기억의 상체기는 머릿속 어느 방에 남게 됩니다. 많이 쓰는 표현으로 ‘기억의 저편’이라고 합니다. 저편은 머릿속 어느 방을 가리키지 않을까요. 기억을 빛깔로 치자면 대체로 어두울 것 같습니다. 그럼 머릿속에 남은, 살아 온 자국은 저마다 저 어두운 방에 남아 있다가 필요에 따라 밝은 바깥으로 나오는 거군요.
기억과 비슷한 말로는 추억이 있습니다. 추억의 사전적 정의는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입니다. 기억이 흔적이라면 추억은 그 상체기를 밖으로 불러내는 짓거리입니다. 빗대자면, 잠잠한 물에 바람이 불어 몰개(파도)가 이는 모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즐겁고 좋은 기억이라면 마땅히 추억도 그러하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괜스레 골치 아픈 추억에 한동안 마음이 내둘려야 합니다. 때로는 그 추억을 혼자만 간직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좋은 추억일지 모르지만 남에게는 아픈 상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인천에 갔습니다. 인천과 어우러진 기억이 있습니다. 1986년, 5월 3일 한낮부터 저녁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던 ‘인천민중항쟁’의 기억, 그보다 앞서 1983년 초, 한밤중에 부평5공단에서 서울 경계까지 터덜터덜 걸어야 했던 일, 또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1973년이던가, 아무튼 그 무렵에 뱃사람이 되기 위해 인천 연안부두에서 서성였던 기억 따위가 그렇습니다. 그때 뱃사람이 되었다면 그 뒤의 나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삶이란 그런 모퉁이에서 약간이라도 비껴가게 되면 뒷날에는 정말 가늠하기 어렵게 멀리 벌어집니다.

<인천 연안부두_사진 서동석>
뱃사람이 되려던 사연은 이렇습니다. 고등학교 때 일입니다. 그때 거의 매일 어울려 지내던 동무가 있었습니다. 오섭이랑 수진이 입니다. 둘은 같은 학교 다녔습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른 학교였지만 어쩌다보니 무척 친해졌습니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중반 무렵부터 그들과 어울렸던 것 같습니다. 나랑 같은 학교 벗인 경호가 그들과 친한 사이라서 나도 자연스레 친해졌습니다. 나는 구로동에 살았고 걔네들은 신당동에 살았습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파하면 그 동네로 갔습니다. 그 동네엔 나랑 같은 학교 동무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 동네가 구로동보다 더 편했습니다. 어떤 때는 거기 오섭이네 집에서 자고 학교에 가기도 했습니다. 일본식 집구조였던 오섭이네 집은 2층이 다다미방이었습니다. 아래층은 국밥집이었습니다. 오섭이가 모임을 이끌었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오섭이의 권유로 읽었습니다. 제임스 딘의 영화도 오섭이가 얘기해줘서 왕십리 어느 극장에서 봤습니다. 무식했던 내가 조금씩 ‘유식’해지는 데에는 오섭이의 도움이 컸습니다.
수진이는 기타를 무척 잘 쳤습니다. 그저 잘 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의 형은 미군부대에서 뛰는 밴드의 기타리스트였습니다. 그때 미군부대의 밴드경연에서 상도 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수진이도 형 못잖은 ‘직업선수’였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수더분한 성격이라 더 멋져 보였습니다. 수진이네는 한강 건너에 무척 넓은 과수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당동에서 제3한강교, 지금의 한남대교를 건너 가다보면 왼편으로 수진이네 배밭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섰습니다. 박정희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던 무렵, 60년대 말에 팔당댐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73년에 완공합니다. 그리곤 곧 서울의 한강변 양쪽 둑(제방)을 재정비합니다. 수진이네 밭은 한강둑정비사업으로 강제수용 당합니다. 헐값으로 징수된 땅은 얼마 뒤 아파트단지로 변합니다. 강남의 신화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던 무렵의 수진이네 배밭자리에 들어선 현대아파트는 부자의 상징이 됩니다. 그 아파트 몇 채는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게 바쳐졌답니다.
오섭, 수진이랑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바다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 무렵 불란서 배우 아랑드롱이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 탓이었을까요, 우린 바다가 그리웠습니다. 원양선을 타고 바다를 누비다 어느 낯선 나라 항구에 내려 진탕 놀아나는 ‘마도로스’를 그렸겠지요. 지금이야 외국을 드나드는 게 제주도 가는 것보다 쉽다면 쉬운 시절이지만 그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원양선의 선원은 그래서 더 부러웠습니다.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그 해 여름 오섭이랑 수진이는 부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개기다 보면 요행으로 선원이 되지 않겠나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정말 1년도 되지 않아 오섭이는 어느 원양선을 타고 떠났습니다. 수진이는 그냥 부산에 눌러 살게 되었습니다. 부산 구포의 가구공장에 취직이 되었는데 부산이 살기 좋아 선원 대신 가구공장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몇 년 뒤 수진이는 그 공장의 기계톱에 왼손 검지를 잃었습니다. 차라리 오른손이라면 나았을지 모릅니다. 이젠 수진이는 기타를 칠 수 없습니다.
동무들이 떠나고 난 뒤 좀 지나서 나는 인천으로 갔습니다. 연안어선을 타려 했습니다.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탔고 인천역에 내려 물어물어 연안부두에 가서 서성였습니다. 꼭 출가하려고 절에 올라와서는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모양새였을 겁니다. 고기잡이배가 연신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서른일곱 해 전의 일입니다. 그때도 무척 더운 여름이었죠. 살기 어려운 집안형편이라 내 주머니엔 돌아 갈 찻삯만 있었을 겁니다. 점심이나 제대로 먹었을까. 서성이다 어느 건장한 아저씨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러저러해서 고기잡이배를 타려한다, 어떻게 하면 되냐, 뭐 이런 말을 건넸는데 그 이가 선장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선장을 알려주었는지 드디어 선장을 만났습니다. 너 고기잡이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 한번 바다에 나가면 어떤 때는 여섯 달 동안 뭍에 내리지 못할 때도 있다, 조기잡이철에는 ‘파시’라는 게 바다 한 복판에 선다, 또 제 철 고기를 잡으려고 동해까지 가기도 한다, 그럴 때 흙냄새는 먼 바람에 실려 올 뿐이란다, 그런데 정말 뱃놈이 될래? 네, 전 배를 타야 되요.

<수협 공판장 앞 바다에 빼곡히 들어선 어선들. 배끼리 촘촘하게 붙어 맨끝의 선원은
그냥 걸어서 부두로 내려온다. 부두엔 배를 수선하는 작업장도 있다. _사진 서동석>
그이가 탄다는 배도 보여 주었습니다. 거의 합의를 보았습니다. 문제는 그때 내가 미성년자였던 겁니다.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답니다. “집에 가서 상의하고 보호자랑 다시 와라.”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사실을 말했습니다. 반대했습니다. 공장엘 가지 왜 뱃놈이 되려 하느냐 이겁니다. 간신히 설득해서 이틀 뒤인가 모시고 인천 연안부두엘 다시 갔습니다. 그 선장을 만났습니다. 얘기는 끝났습니다. 짐 챙겨서 며칟날 어디로 오라 했습니다. 그때 오고가는 기차 안에서 어머니 마음은 얼마나 쓰리셨을까. 말없이 오고 갔었나 봅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땐 전철 개통 전이었습니다. 차창에 스쳐 지나는 바깥 풍경만 쳐다봤습니다. 땅바닥에 발붙이고 살 팔자였을까요, 그때 마침 시골에서 할머니가 올라오셨습니다. 내가 고기잡이배를 타려 한다니까 할머니가 노발대발하셨습니다. 결국 분란만 일으키고 주저앉았습니다. 얼마 뒤 염산 만드는 공장에서 날일을 하다 그 뒤 구로2공단의 어느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오섭이는 한 7년 뒤 쯤 귀국해서 공무원이 되었고 오섭이가 공무원이 될 즈음 수진이는 경기도 부천에 목공장을 차렸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습니다.
다시 찾은 연안부두엔 여전히 고깃배가 가득합니다. 경매가 끝나 텅 빈 수협공판장 앞 부두에 늘어 선 고깃배들의 깃발과 쇠줄로 눈앞이 어지럽습니다. 그 너머엔 중국으로 가는 국제여객선이 출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연안부두에 드나드는 사람들마다 숱한 사연을 갖고 있겠지요. 바다 위를 떠도는 이들의 무수한 사연을 모두 합치면 짙푸른 바다색이 되지 않을까요.
인천역 앞 중국인마을(차이나타운)의 식당에서 자장면 곱빼기를 사먹었습니다. 그 옛날 내가 연안부두를 찾았을 때 점심 먹을 돈도 없었기에 이곳에 들르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그때 여기에 그런 마을이 있었나... 모든 게 흐릿합니다. 다만 그때 연안부두를 서성이던 모습만은 눈에 선합니다. 어머니랑 이곳을 찾아 왔다 돌아가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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