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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제주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 _ 송시우 (46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10-12 조회 1336
 

제주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첫째
, 반역자구락부와 신인회의 태동

1920년대 이전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이념 아래에서의 투쟁이라 하면, 그 이후에는 독립운동의 책략이 다변화되고 이념이 다양화되었다. 이는 소련에서 혁명이 성공하여 사회주의 사상이 도쿄 및 상해를 거쳐 새로운 물결로 젊은 청년층에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사회주의 운동의 형태로 반역자 구락부1921년 제주시 용연 주변에서 비밀리에 조직되었다. 이 급진적인 단체의 구성원은 20세 전후 지식인으로서 오인(吾人)은 무산자를 본위로 하는 신사회 건설을 함이라는 강령으로 출발하였다. 1925년 이 구락부의 우파(右派)를 제외시켜 새롭게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으니, 이들이 송종현, 강창보, 김정로, 윤석원, 김택수, 고경흠, 김민화 등이다. 이들은 해방될 때까지 꾸준히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들의 원류는 조천 출신 송산 김명식, 죽암 고순흠, 목우 김문준 등에 의해 선도되고 있었다. 김명식은 19222월의 러시아 혁명이란 논문으로 우리나라의 첫 사회주의 재판을 받았다. 김문준은 일본 공산당에 가입하여, 한국 민족의 해방은 공산주의 사상이란 극약으로 처방하는 길만이 유일 최선이라고 보았으며, 이에 이성태, 강창보, 강문석, 김시용 등 많은 재사(才士)들이 속출되었다. 그리고 고순흠은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일제를 무력화 시키는 길이 최고의 선택으로 간주했다.


<강창보의 출소 직전 모습 _ 1930.12.15. 사진출처 제주의 소리>

 
<송종현과 김택수 _사진출처 제주의 소리>

둘째, 무정부주의 운동과 여타 활동

192710우리계(宇利契)’라는 소비조합을 조직, 일본상품의 불매운동을 전개하였다. 고병희와 조대수 등이 주도하던 이 멤버들은 무정부주의 사상을 파급시켜국권회복을 기약하고자 하였다. 실행 방법으로 독서회 조직, 야학활동 지원, 문고 설치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주동 동지 5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사회변혁 운동은 1920년대 초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노출되었다. 1923년 제주노동회, 1924년 제주청년회, 1925년 신인회, 제주청년연합회, 1926년 제주소년연맹, 1927년 제주공산당 야체이카, 1928년 제주청년동맹, 1930년 혁우동맹, 노동야학, 1931년 부정호세 불납운동, 재건야체이카 등 여러 운동을 일으켜 일제를 긴장시켰다.

셋째, 4차 공산당의 항일운동

1927년 이전에 송종현(신촌)은 이미 조선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다. 19272월에 오대진(모슬포), 3월에 이익우(한림) 등을 입당하게 하였다. 동년 9월까지 강창보, 김택수, 윤석원, 한상호, 김정로 등에게 권유하여 입단시켰다. 동년 725일과 26일 양일간에 걸쳐 광주에서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전라남도당 대회에 제주대표로 송종현이 참가하여, 제주야체이카 활동을 보고한 바 있었다.
19288월부터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제주의 당원과 공산청년동맹 맹원들이 체포되었다. 19301212일 경성지법에서 제주출신 송종현이 3년형이라는 최고형이 내려졌다. 이때 김택수, 김정로, 한상호, 윤석원, 강창보, 경기도에서 검거된 최일봉 등 모두 실형을 언도 받았다. 이 사건의 변론을 맡은 사람이 이인, 김병로, 이창휘, 정구영 등인데, 이창휘는 제주도 고산 출신으로 헌신적인 변론을 하여 유명했다.

넷째, 1929년 산지 항만 노동자 운동

제주도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된 후, 그들에 의해 주도된 최초의 항일운동은 항만 노동자에 대한 일본인 감독의 폭행사건을 계기로 1929년에 발생한 산지 항만 노동자 운동이었다.
일제는 제주도를 강점한 후,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필요에 의해 도로의 신설과 확장, 각 항만의 축조 및 개수 공사를 적극 추진하였는데, 도사(島司) 마에다는 제주도에 부임하여 오자 제주도의 해상교통의 요지인 산지항을 개수, 확장할 것을 결정하고, 60만원의 자금과 100여명의 노동자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동원된 노동자 중의 일부는 독서회 등을 통하여 사회주의사상을 학습하고 있었던 관계로 반일의식이 높았으며, 이때 일본인 감독이 노동자에 대한 폭행이 발생하자, 마침내 100여명의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 김두경 등의 지도하에, 구타반대, 최저생활 보장, 임금 인상, 조합 조직, 시간 단축 등의 경제적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하여 수십일 간 투쟁한 결과, 요구를 관철하는데 성공하였다.

참고 : 제주도지 제2. 2006 제주도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
제주도 4?3 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 양한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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