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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전국노동자대회(1991년 11월)
1991년 ‘전태일열사 정신 계승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는 11월 10일 오후 2시 여의도 둔치 금성무대에서 열려 각 지역·업종 노동자 2만 8,000여 명을 비롯해 6만여 명이 참여했다. 전야제는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11월 9일 세종대학교에서 진행했다.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는 ‘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아래 ‘ILO공대위’) 주최로 진행했으며, 주요 요구는 △민주노조 총단결로 노동악법 철폐 △노동악법 철폐하고 구속노동자 석방 △단결의 자유 쟁취하여 민주노조 합법성 쟁취 △전태일 정신 계승하여 노동악법 철폐 등이다.
전국노동자대회의 조직
전노협은 11월 10일 전까지 각 지역과 업종 차원에서 교육 선전, 문화제, 체육대회, 등반대회, 대국민 선전 등을 수행해 전국노동자대회에 대중적 참가와 결의를 극대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각 지역에서는 지노협을 중심으로 업종, 대공장노조, 중간노조, 노동단체 등을 포괄하여 ‘지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민주노조의 단결을 확대하고, ILO공대위와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사업집행을 모색했다.
전노협은 11월 3일부터 9일까지를 ‘전태일열사 정신 계승과 노동법 개정을 위한 실천 주간’으로 선포하고 각 단위사업장에서 현수막 걸기, 전 조합원 리본 달기, 대국민 선전전 등을 진행했다. 11월 3일에는 수도권 모란공원, 호남권 망월동, 영남권 솥발산 등 권역별로 나누어 노동열사 묘소에 참배했다.
전노협은 본대회에서 담지 못하는 부문별 결의를 모으고 조합원들이 직접 참여해 전국노동자대회의 요구와 내용을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한다는 취지 아래 전야제를 기획, 추진했다. 1991년도에 전국노동자대회 본대회는 합법적으로 진행됐으나 전야제는 불허돼 경찰의 봉쇄를 뚫고 진행했다. 이 때문에 전야제에는 전노협을 중심으로 전국노련, 전국노운협이 결합했으며 업종회의는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회와 전야제 행사 준비
전노협은 문화 전문단체와 공동으로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각종 문화활동을 통해 노동악법개정 투쟁과 민주노조 총단결의 대의를 실현한다는 목표 아래 노래, 풍물, 율동 등 장르별로 전국노동자 문화선동대를 조직했다. 문화선동대는 대회의 개막식과 폐막식, 가두행진, 상징의식 등 문화행사를 기획·진행했고 노래와 풍물, 율동 등을 동원해 대회장 주변과 가두 문예선동을 전개했다.
또 전국노동자대회위원회는 대회를 평화적으로 치른다는 전술 기조에 입각해 질서유지대를 구성·운영하기도 했다. 질서유지대 산하에 선동대를 운영했는데, 전야제와 이후 본 대회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대시민 선동, 그리고 본대회장에서 모금 선동을 수행했다. 선동대는 11월 9일 전야제에서 5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질서유지대 발대식 이후 모임을 하고 대시민 선동에 대한 유의사항과 시민 선동문, 선동 지침서 등을 공유했다.
11월 10일에는 선동대를 2개 팀(4개조)으로 나눠 1팀은 부산, 거제, 서울 대오를 인솔해 영등포 방면으로, 2팀은 부천, 광주, 울산, 전국노련 대오를 이끌고 대방동으로 이동하면서 집회 홍보와 대시민 선동, 행진대오 선동 등을 수행했다. 이후 본 대회장에서는 모금 선동을 벌여 오후 4시까지 1백여만 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전국노동자대회 선동대에는 총 30명이 참여했다. 이는 전체 참여 노동자 수와 비교하면 절대적으로 부족해, 선동대를 보강하기 위해 질서유지대와 전체에 대한 선동훈련을 실시하기로 했으나 이 또한 집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선동 경험이 없는 대원도 있었고 선동문안이 대회 당일에 배포되는 바람에 대원들이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채 이동했기 때문에 선동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이처럼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 선동대는 조직과 운영 면에서 문제점을 낳기도 했으나 전국적 집회에서 최초로 별도의 선동대가 조직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전국노동자대회 진행
전야제가 진행된 9일 아침 9시부터 전국노동자 문화선동대 300여 명이 집결해 사전연습을 시작했다. 10시부터 경찰이 세종대 입구와 주변 검문검색을 벌이며 50여 명이 진입로를 차단했다. 오후 2시에 현장에 도착한 전술기획반은 경찰의 봉쇄로 전야제 장소를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을 논의했다. 오후 7시 경찰의 검문이 강화되자, 전술기획반은 세종대에 있는 대오는 원래대로 진행하고 나중에 도착하는 대규모 단위는 성균관대, 경희대, 한양대 등으로 집결시킨다는 전술 방침을 확정했다.
오후 7시 30분 풍물패 길놀이를 시작으로 정문에서 풍물을 치며 사기를 북돋우는 가운데 대회장에 1,500여 명이 봉쇄를 뚫고 집결했다. 저녁 9시경 3천여 명이 모이자 전야제가 시작됐다. 대회사와 연설, 여는마당을 이어가다 밤 10시 30분에 전국해고자 결의대회가 진행될 무렵에는 대회장에 4,500여 명이 집결했다. 자정에 이르러 부산, 광주, 구미 울산지역에서 올라온 참가자들까지 집결하면서 집체극으로 전야제가 마무리됐다.
다음 날 아침 8시 30분에 전야제 장소에서 대오별로 출정식을 하고 본대회 장소인 여의도 금성무대로 이동했다. 오전 11시에 현총련과 수도권 대오를 시작으로 전체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11시 30분부터 대오별 사전 결의대회에 이어 12시 10분에 문화선동대의 길놀이로 사전행사를 시작했다. 오후 1시 20분에 대오는 4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문화선동대 공연이 펼쳐졌다.
오후 2시, 권영길 업종회의 의장의 개회 선언으로 본대회가 시작됐다.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의 대회사와 이소선 어머니의 격려사, 연대사와 투쟁연설 등이 이어졌다. 상징의식으로 오후 4시 40분 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질서유지대의 인도에 따라 영등포역 방향과 대방역 방향으로 이동해 오후 7시에 영등포역 앞에서 정리 집회 후 해산했다.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의 총예산 2,300여만 원에서 후원금과 판매수익금 등 1천여만 원을 뺀 나머지는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절반씩 분담키로 했다.
전국노동자대회 평가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에는 1988년 11월 대회 이후 최대인 6만여 대중이 조직적으로 참여해 노동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었으며, 민주노조진영의 자신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90년에 비해 업종회의와의 실질적 연대, 즉 대중적 동참과 조직적 공동 준비, 재정 분담 등을 이루어냈다. 대공장, 지노협 미조직 지역에서 ILO공대위 미참여 민주노조들까지 대거 참여함으로써 이후 계속 전개해야 할 민주노조 총단결 투쟁과 조직발전 전망을 열어나가는 디딤돌이 되었다. 합법적인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대회 기조가 유지된 점도 성과였다.
다만 노동법 개악 기도를 규탄하고 개정의 요구와 결의를 집약시켜 대중투쟁을 선언하는 자리는 되지 못했다는 한계를 남겼다. 이는 노동법 개악 기도를 저지하기 위한 사전투쟁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지 못했고, ILO공대위 차원에서 이후 투쟁방침에 대한 사전결의가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평가됐다. 대회 조직화 과정에서도 참가자들이 사전에 대회의 의의를 공유하는 과정이 미흡했고 특히 합법적인 대회가 될 것이라는 점을 사전에 예상하지 못해 이에 걸맞는 조직사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성과와 한계에도 1991년 전국노동자대회는 예상을 뛰어넘는 다수 대중의 참여로 조합원 대중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고 민주노조 총단결을 가시화시켜 낸 점에서 성공적인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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