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한국전쟁 (6) 이영민(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1951년 2월 12일, 서북 각 민족의 인민들이 항미원조 대표 회의를 서안에서 성대하게 개막하였다. 한족,회족,몽고족,위구르족,카자흐족,우즈벡족등 14개 민족 대표 451명이 회의에 출석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많은 민족대표가 참가하여 단결하고 성대한 회의를 여는 모습에 고무되었다. 그날 회신 전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참가한 이번 대표대회가 한 결정은 매우 훌륭하다. 각 민족의 인민들이 단결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 생산을 증가시키며, 절약에 힘쓰고, 해국주의에 입각한 선전공작을 전개하며 중국 인민지원군을 지지하는 결정은 훌륭한 것이다. 제국주의가 과거에 중국을 업신여긴 이유중 하나가 중국 각민족이 단결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이미 영원한 과거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그날부터 중국 의 각 민족은 단결하여 우애를 나누고 함께 대가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어떤 제국주의 침략에도 우리는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조국을 변영하고 강성한 국가로 건설할 수 있다.”(주1) 두 개의 전선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작전한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원군은 조선 인민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했다. 함께 UN군 23만명을 섬멸했으며 UN군을 압록강변에서 삼팔선으로 돌아가게 했다. 전선을 삼팔선 부근으로 안정시켰으며 서로 대치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마침내 미국을 압박하여 정전담판을 하도록 한 것이다. 5차 전역에서 거듭된 힘겨루기는 미국의 의도를 증명하였다. 북한을 병탄하려는 것과 전쟁을 중국대륙으로 옮기려는 전략적 의도가 그것이다. 미국은 그것을 이미 불법적으로 실현하고 있었다. 미국 통치집단은 이미 그 점을 보고 있었다. 1951년 6월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와 외무위원회는 청문회를 열었다. 청문회에서 웨더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1897-1989 미국의 군인이자 실업가. 역자주)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한국전쟁은 끝이 없는 동굴이다. UN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주2) 다른 한 쪽 지원군과 인민군도 UN군을 신속히 패배시켜 한반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1951년 6월부터 한국전쟁은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북한을 침략한 첫해, 미국은 8만 8천명이 죽고 다치는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것은 제 2차 세계대전기간 입었던 피해의 삼분의 일에 이르는 규모였다. 북한을 침략한 미국과 그 우방국들에게 가져다 준 최대손실은 전략적인 것이었다. 본래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중점은 유럽에 두고 있었다. 냉전에서 최종 전략적 목표는 소련이었다. 하지만 북한 침략전쟁중 미국은 육군 총병력의 삼분의 일을 써야 했으며 공군 총병력의 오분의 일을 썼다. 해군 총병력의 이분의 일을 써야 했다. 영국, 프랑스등 유럽국가의 일부 병력도 동원해야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병력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의 전략 예비대는 국내에 6.5개 사단과 일본의 2개 사단에 불과했다. 이동시킬 수 있는 병력은 사실상 없었다. 미국 병력의 어려움은 한국전쟁이 교착국면으로 들어가게 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북한 침략 전쟁중 미국의 물자소모는 매월 평균 85만톤에 이르렀는데 당시 미국이 북대서양에 원조하기로 약속했던 물자의 1년반치와 맞먹었다. 전략적으로 주객이 전도된 이런 상황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손해를 입었을뿐 아니라 동맹국과의 관계에도 직접 영향을 주었다. 전쟁 초기에 미국을 적극 지지하던 영국, 프랑스등도 미국이 한국전쟁에 빠져들게 된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럽을 중심으로 하던 냉전정책도 손해를 입게 되었다.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매우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미국의 중요한 적이 크렘린 궁안에 단정히 앉아있다. ..... 이 적은 아직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 막후에서 주선만 하고 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힘을 다시 동원해서 낭비할 수 없다.”(주3) 이전에 전쟁을 압록강으로 옮기자고 하던 오만한 미국 침략자들이 정전회담을 도모하고 있었다. 1951년 5월, 미국 국가안전위원회는 트루먼에게 담판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의했다. 트루먼은 이 건의를 신속하게 비준했다. 5월 31일, 미국 국무원 고문이자 전 소련 주재대사인 케넌(George Kennan)은 소련의 UN주재대사인 말리크(Yakov·A·Maiik)를 비공식 예방했다. 그는 미국정부가 중국과 담판하여 한국전쟁을 끝낼 준비를 하고 있으며 전쟁전 상태로 회복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주4) 모택동은 예민하게 이 기회를 잡아챘다. 그는 장차 다가올 정전회담에 대하여 다방면의 준비를 마쳤다. 1951년 6월 3일, 모택동은 전선에서 일부러 북경에 찾아온 김일성을 회견하고 다가올 정전회담에 대한 방침과 방안을 의논했다. 김일성은 북경에 머물던 6월 5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지금 스탈린과 문제들을 상의해서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제의한 것이다. “우리는 조선이 진행하고 있는 전쟁에 엄중한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재정문제, 정면작전의 문제, 적이 후방 해안선에 상륙할 가능성에 대한 위협등이 모두 드러나고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는 며칠내 고강 동지를 비행기로 모스크바에 보내 당신에게 보고하게 하려고 한다. 또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에 대한 답장을 요청한다. 지금 김일성 동지가 북경에 와 있다. 그는 고강 동지와 함께 가서 당신하고 문제들을 상의하길 원한다.” (주5) 6월 9일, 스탈린에게 보낸 다른 한통의 전문에서 그는 무기와 다른 군사물자를 더 보내달라는 주문서와 전쟁문제, 그리고 지원군이 소련 군사고문을 초빙하는 문제에 대하여 상의하자고 제의했다. 스탈린의 동의를 얻은 뒤 6월 10일, 고강과 김일성이 스탈린이 보낸 전용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6월 13일, 스탈린과 그들간에 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 상황을 알게 된 뒤 모택동은 그날 고강,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문에서 그는 어떻게 정전회담을 건의할 것인지 자신의 착상을 말하였다. “평화회담을 어떻게 제기할 것인지, 두 달 안에 조중 군대가 수세를 취했을 때 조중 양국이 제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1)적이 제기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2)소련이 캐넌과 말리크와 회담에 따라 미국에 표명했을 때, 이 방법은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즉 소련이 미국에게 표명했을 때, 그리고 적이 제의했을 때 조중 양국은 자기 태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당신들과 필리포프(스탈린의 가명이다. 역주) 동지가 상의해서 결정해 주기 바란다.”(주6) 오래지 않아 스탈린은 모택동의 두 번째 건의를 채택했다. 소련이 나서 미국의 반응을 탐색한 것이다. 모택동은 미국 침략자와 담판을 진행하리라는 것과 평화에 대한 가능성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실력의 배경없이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는 약간의 소홀이나 약세를 보이면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고 담판중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5차 전역의 승리를 공고히 할 것인가, 어떻게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방에서 작전 지속능력을 제고할 것인지가 모택동의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6월 11일, 제 5차 전역이 끝난 후 이튿날이었다.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전보를 보내 지시했다. “6월과 7월 두달안에 상륙등 의외의 변화가 발생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 각항을 완성해야 한다. 첫째, 적극방어로 철원(铁原),평강(平康),이천(伊川)의 세갈래 방어선을 지켜야 한다. 적이 이천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3병단 및 19병단 병력을 각 4만 5천명까지 신속히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셋째, 13병단 각 군은 휴식과 정돈을 완비해야 한다. 넷째, 각군 화력을 보강하고 특히 대전차, 대공 포화를 강화해야 한다. 다섯째, 희천에서 영원, 덕천까지 공로를 최소한 한 개는 신속히 보수해야 한다. 두 개면 더욱 좋다. 희천,덕천,맹산 지역에 상당한 양의 양식을 저장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의 경우에 쓰도록 해야 한다.”(주7) 이때 모택동 앞에 두 개의 전선이 있었다. 군사전선과 정치전선이었는데 하나는 전쟁이었고 하나는 회담이었다. 6월 중순이 되자 새로운 지도방침이 모택동의 머릿속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즉시 그것을 꺼내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지구전과 평화회담을 충분히 준비하여 전쟁종결에 이르러야 한다.”(주8) 군사적으로도 한걸음 더 나아가 개괄하였다. “지구전과 적극방어”의 방침이었다. 북한의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한편으로는 적극방어 수단으로 적의 병력을 대량으로 살상한다. 한편으로는 장비를 적극 개선하고 훈련을 강화하여 자신의 역량을 부단히 강화한다. 적과 아군의 역량대비를 개선하여 최후에 적에게 승리하도록 한다. 아니면 적이 물러가도록 압박한다.(주9) 당시 지원군 부사령원겸 부정치위원 등화 일행 5명이 북경에 있었다. 모택동은 위에 쓴 의견을 등화에게 설명하고 그가 책임지고 전달하게 하였다. 모택동의 방침은 중국과 북한 군대가 한국전쟁에서 향후 2년이 넘는 군사투쟁과 정치투쟁이 교착된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에서 회담하고, 전투와 회담이 되풀이 되는 국면에서 주도권을 확실히 쥐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두 개의 전선에서 모택동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능한 조수가 있었다. 군사면에서 팽덕회였으며 정치면- 즉 담판지도에서- 에서는 주은래였다. 담판의 대문을 열다. 1951년 6월 하순부터 한국전쟁 정전회담에 대한 각측의 시작전 접촉은 비공식 막후대화에서 공개적으로 제안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6월 23일 소련 주UN대사 말리크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건의했다. 또한 교전 쌍방이 전투 중지와 휴전을 담판하고 군대를 삼팔선에서 철수하자고 주장했다.(주10) 6월 30일,UN군 총사령관 리지웨이가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아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조선 인민지원군및 중국 인민지원군과 정전담판 진행을 원한다고 표명했다. 그리고 회담장소로 원산항에 정박해 있던 덴마크 병원선에서 하자고 제안했다.(주11) 7월 1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팽덕회가 연명으로 리지웨이에게 회신 전문을 보냈다. 전문에서 정전회담 진행에 동의를 선언하고 삼팔선 남쪽 개성을 회담장소로 하자고 건의했다.(주12) 북한과 중국쪽 성명이 발표되고 모택동과 주은래는 바로 긴장하여 담판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등화및 해방을 팽덕회의 대표로 담판회의에 출석시키기로 했다. 그와 함께 국내에서 외교부 부부장 이극농(李克农)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극농이 외교부 국제신문국 국장인 교관화(乔冠华)와 정전담판 공작조를 인솔, 즉시 북한에 들어가 담판공작을 지도 및 협조하게 하였다.(주13) 당시 미국쪽이 담판에 임하는 태도는 담판은 무의미하며 즉시 휴전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하기 전에는 적대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정부는 리지웨이에게 권한을 주어 정전담판 기간에 육지, 해병, 공중, 공중강하 및 해상작전을 진행하여 담판을 지원하게 하였다.(주14) 미국의 이 한수에 대하여 모택동은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다. UN군이 정전담판 기회를 빌려 반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그는 7월 2일 팽덕회 등에게 전문을 보냈다. 그는 중국과 북한 군대가 삼팔선에서 즉시 중요부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정면방어진지 병력을 강화하여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측후방 병력을 강화, 적이 한반도의 잘룩한 허리부분 동서 양안에 갑자기 상륙하는 것에 대비하도록 했다.(주15) 이것은 담판을 준비하는데 채택하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 절차였다. 7월 5일, 이극농이 인솔하는 정전담판 공작조가 북경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떠나기 전에 모택동은 이극농, 교관화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정전담판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각종 상황을 분석하고 소수 정예의 공작반을 조직하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7월 7일, 북한과 중국의 정전담판 대표단이 개성에 도착했다. 조선 인민군 총참모장 남일 대장이 북한과 중국쪽 수석대표가 되었으며 중국 인민지원군 대표는 부사령원겸 부정치위원 등화였다. 그 외 중국측 대표는 참모장 해방이었고 조선 인민군 대표로 이상조, 장평산이 있었다.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이극농이 제 2선에서 담판을 지도했으며 교관화등이 그에게 협력했다. 이들도 모두 개성에 도착한 것이다. UN군 담판 수석대표는 미국 극동 해군사령관 터너(Charls Turner Joy) 중장이었으며 성원으로 미국 극동해군 부참모장 알레이 버크(Arleigh Albert Burke) 소장, 미국 국동 공군 부사령관 로렌스 크레이기(L·C·Craigie) 소장, 미국 제 8집단군 부참모장 헨리 호드스 (Henli·I·Hodes) 소장과 한국군 제 1군단장 백선엽 소장이었다. 정전담판이 곧 시작되려할 때 모택동은 담판준비 작업을 지도하는데 모든 정력을 쏟았다. 그는 UN군 총사령관 리지웨이에게 보내는 회신을 여러차례 직접 기초했다. 또 담판준비와 관련한 새로운 뉴스의 원고를 심사하거나 직접 고쳤다. 중국과 북한쪽의 정전협정 초안을 직접 기초하고 김일성 및 팽덕회, 그리고 스탈린의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준비작업, 예컨대 담판 회의장소나 상대측 대표단의 숙소나 우리쪽 대표단의 숙소배치, 각종 용구나 설비와 식품의 준비까지 모택동은 여러 가지에 개입하였다. 이극농, 교관화와 우리쪽 대표단 성원이 담판지점인 개성에 도착할 구체적인 시간까지 지도한 것이다. 개성은 삼팔선 남쪽에 있었다. 중국과 북한군의 통제구역이었으며 새로운 해방구였다. 이곳의 정황은 복잡했으며 전쟁중 쌍방이 적지않은 지뢰를 묻어 두었다. 어떤 한쪽에 안전문제가 생기면 그 결과는 심각할 것이었다. 그래서 모택동은 특히 안전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7월 2일 새벽 4시, 그는 팽덕회등 전방 동지들에게 전문을 보내 경계를 건실하게 세우도록 당부했다. “회의시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안된다.”(주16) 하지만 모택동은 안심할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난 4일 새벽 4시, 그는 다시 팽덕회등에게 전문에 오십자를 써서 보냈다. “개성지구는 지뢰가 묻혀 있다. 반드시 제거하도록 해라. 특히 리지웨이 대표의 비행기가 착륙할 곳, 자동차 통행로나 회의장 부근은 깨끗하게 제거해야 한다. 안전이 보장되도록 하고 어떤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주17) 정전회담 시작전 관련 기관에서 공군부대를 북한 각 비행장에 진주시킬 것을 고려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적에게 구실을 줄 필요없다. 가지 마라.”(주18)고 지시하였다. 7월 9일, 정전담판이 정식으로 시작하기 전날이었다. 모택동은 남일,등화가 첫번째 회의를 위해 준비한 발언 원고를 자세히 심사하였다. 그는 이극농에게 주어 김일성,팽덕회에게 보고하게 했다. 그 전문에서 모택동은 “남일, 등화 두 동지의 발언은 모두 좋다. 다만 남일의 원고중 ‘소련 UN주재 대표 말리크 선생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를 희망하며 정전담판을 진행하자.’고 했는데 ‘정전담판 진행을 희망한다.’로 바꾸자. ‘소련...받아들이자’다음의 이십여 자를 삭제한 것이다. 리지웨이의 성명 문장중 말리크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남일이 그렇게 말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쓸데없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등화발언 원고중 말리크 제의 관련 부분은 좋다. 비판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들이 남일 발언 원고 가운데 말리크 제의의 부분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다른 장소에서 하면 된다.”(주19) 모택동은 참으로 철저한 사람이었다. 정전담판에서 중국과 북한대표단의 영도를 통일시키기 위해 김일성의 동의를 구했다. 그 후 조중 대표단 성원 및 이극농, 교관화가 소조를 구성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극농이 주재하였다.(주20) 모택동은 전쟁을 지휘하는데 가장 중요시한게 “초전필승” “준비없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담판탁자위에서 상대방과 서로 논쟁하는데 모택동은 “초전필승”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싸우기 전에 충분하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해서 상대방에게 어떤 기회나 어떤 이용할 구실도 주지 않으려 했다. 모택동은 이미 천군만마를 지휘한 적이 있으며 기세가 산하를 삼킬듯한 재능과 계략을 가지고 있었다. 또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세밀하고 정교한 업무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는 사례이다. 주1) 1951년 12월 14일 ‘인민일보’ 주2) 미국신문처(USIS) 워싱턴 1951년 6월 12일 전신 주3)‘트루먼 회고록’ 제 2권, 세계지식출판사, 1965년 1월판, 534쪽 주4) 배견장(裴坚章) 편집, ‘중화인민공화국 외교사(1949-1956) 세계지식출판사 1994년 7월판, 198쪽. 자중균(资中筠) 편집 ’전후 미국외교사-트루먼에서 레이건까지) 상권,세계지식출판사 1994년 5월판, 225-226쪽 주5)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1951년 6월 5일 주6) 모택동이 고강,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 1951년 6월 13일 주7)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6월 11일 주8)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에서 재인용, 1951년 7월 1일 주9) 군사과학원 군역사 연구부 편저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전사’ 군사과학출판사, 1990년 12월 제2판, 118쪽 주10) 1951년 6월 25일 ‘인민일보’ 주11) 1951년 7월 2일 ‘인민일보’ 주12) 1951년 7월 2일 ‘인민일보’ 주13)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2일 2시 주14) 미국 Walter·G·Helms '한국전쟁중 미국육군‘ 제 1권, 국방대학출판사 1988년 8월판, 22쪽 주15) 모택동이 팽덕회등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2일 24시 주16) 모택동이 팽덕회등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2일 4시 주17)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4일 주18) 모택동이 공군 사령부의 지시요청 보고서에 대한 회시, 1951년 7월 7일 주19) 모택동이 이극능과 김일성,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9일 주20) 모택동이 김일성,이극농 및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1951년 7월 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