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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구성과 노동법개정투쟁
⦁ 시기 : 1988년 10월 ~ 1988년 12월
1988년 노동법개정 투쟁 경과
노동법개정 투쟁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상반기 임금인상 투쟁이 중반을 넘어선 5월경부터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1987년 11월에 개정된 노동법은 7~8월 노동자대투쟁의 영향으로 노조설립 및 노동쟁의의 조건을 다소 완화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이었다. 실제 1988년 들어 10월 18일까지 발생한 노동쟁의 1,657건 가운데 합법적인 것은 314건에 불과하며 81.1%에 달하는 1,343건이 법을 지킬 수 없는 쟁의로 진행됐다. 노동자들은 3~4월 임금인상투쟁 초기에는 그간의 조직적 기반에 근거하여 준법투쟁 등 법적 절차를 많이 의식했지만, 자본가들과의 힘겨루기가 치열해지고 신규노조 및 어용노조 내 민주세력의 투쟁이 확산되기 시작함에 따라 법을 지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5월로 넘어서며 경고장 발급, 연행과 구속 등 노동자 탄압이 급증했으며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투쟁, 노조탄압 저지투쟁 등 당면의 직접적인 문제를 내건 투쟁을 넘어서서 탄압의 수단이 되고 있는 노동법의 개정을 위한 투쟁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됐다. 1988년 5월 1일 연세대에서 열린 ‘세계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3권쟁취 수도권 노동자 대회’는 노동법개정 투쟁의 서막이었다.
노동법 개정안 작성과정은 노동악법 개정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대중적·실천적 요구들을 집약해 나감으로써 노동법개정 투쟁의 대중적 출발의 계기로 활용해야 했다. 그러나 전 지역 및 업종에 걸친 대중적·실천적 요구가 수렴되지 못하고 법조항에 대한 전문가들의 감리에 매달리게 되면서 그 본말이 전도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더군다나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조합특별위원회’와 전국노운협이 각각 독자적으로 개정안을 만들어 공청회까지 이중으로 개최함으로써 양측의 개정안을 7월 28일 통일시켜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러한 작업들이 7월 29일 ‘야권 3당 노동법개정 공청회’를 견인해 내고 노동법개정 운동의 기선을 잡았지만 몇 가지 쟁점에 가려 노동대중이 현실적으로 항상 불안감을 갖게 되는 위장폐업과 해고문제는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1988년 7월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승한 상반기 임금인상투쟁이 정리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벌써 자본과 권력측은 임금인상투쟁의 성과들을 파괴하기 위해 ‘무노동무임금 지침’과 ‘71개 주요방산업체 지정’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이미 자신들의 힘을 자각한 노동계급은 이러한 책동에 굴하지 않고 가열찬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7월 10일 ‘노동운동 탄압분쇄, 노동악법 개정, 노동부 장관 퇴진 촉구 전국노동자대회’, 7월 17일 ‘수도권대회’, 7월 23일 ‘매국 직장 폭력단 추방 및 마창노련 간부 구출투쟁’을 연속적으로 진행시키고 그 열기가 최고조에 올라가자 대중적 투쟁에 노동악법개정 투쟁을 결합시키려는 의식적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가 마침내 7월 29일 ‘야권 3당 공청회’를 개최하게끔 만들었다.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의 구성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전국투본)는 1988년 10월 6일 노동법개정전국노동조합특별위원회와 전국노운협의 노동법개정특별위원회가 참여한 가운데 대전에서 열린 ‘제3차 노동법개정 전국대표자회의’에서 구성됐다. 이 회의에서 전국투본 의장에 이흥석 마창노련 의장, 집행위원장에 이상학 서노협 부의장, 상황실장에 최한배 전국노운협 사무국장, 대변인에 전국노운협 신철영을 각각 선임하고 실무부서로 홍보선전부, 투쟁기획부, 연대사업부를 설치했다.
주요한 사업방침으로 △11월 13일 서울에서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 노동자대회’ 개최 △10월 9일부터 전국적 서명운동 개시, 지역조건에 맞게 웅변대회, 결의대회 등의 집회 개최 △정기국회 중 노동법이 개정될 수 있도록 야3당 총재와의 연석회의 주최 △제반 반민주악법 개폐투쟁을 위해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추진 △이상의 사항을 힘 있게 추진하기 위해 단일한 실무체계를 갖는 전국투본 구성을 결정했다.
노동법개정 투쟁을 위한 전국노동자등반대회
1988년 10월 9일 수도권은 북한산, 영남권은 화왕산, 중부호남권은 대둔산에서 각각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해 전국노동자등반대회를 열었다. 등반대회를 기점으로 노동법개정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전국적인 서명운동에 돌입함으로써 노동법개정을 위한 대중투쟁이 시작되었다. 등반대회는 권역별로 이루어졌지만, 오후 2시에 3개 권역이 모두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 노동자 결의대회’를 개최했고, 이어서 서명운동 출정식을 가짐으로써 대회의 통일성을 높여냈다.
‘노동법개정을 위한 수도권 노동자 결의대회’는 ‘청와대를 향해 고함지르기’를 끝으로 하산하고 도로를 행진한 후 해산했다. 이 등반대회는 전국 노동법개정 투쟁의 계획과 일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지역과 단체별로 10월과 11월 사업이 계획되고 진행 중이었다는 점에서 권역을 단위로 한 전국 투쟁을 묶어세우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서명운동은 11월 13일과 21일에 집중해서 10만 명을 돌파했다.
1988년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는 11월 12일 밤 연세대에서 전야제가 개최되면서 시작됐다. 저녁 8시에는 ‘전태일 노동상’ 시상식이 열려, 수상자인 권용목을 대신해 권처홍 아버님이 수상했다. 밤 11시에는 조합원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악법 개정 전국 노동자 웅변대회’를 열었다. 서울, 인천, 부산, 울산, 부천, 전북 등 전국에서 선발된 9명의 연사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는 인천지역의 허재호(인천일용공노조)가 1등 ‘노동해방상’을 수상했다.
동시에 밤 11시에는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에 전국 100여 곳의 단위사업장 위원장들과 20여 명의 노동운동단체 대표가 참여해 11월 13일 대회전술과 투쟁방침을 확정지었으며, 11월 13일 새벽 2시에는 선봉대 발대식이 진행됐다. 또한 지방에서 상경한 대오가 계속해서 도착했는데, 새벽 3시경에는 마창지역 노동자들 800여 명이, 다음날 아침 7시경에는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 600여 명이 도착하는 등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연세대로 속속 집결했다. 13일 본대회에 앞서 오전 10시에는 사전결의대회로 ‘노조탄압분쇄 전국노동자대회’가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5,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됐다.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본대회 입장식은 한시간 이상 소요됐으며 연세대 노천극장을 완전히 메웠다. 4만 명의 조합원들은 일사분란하게 “노동악법 철폐하여 노동해방 앞당기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에 걸친 집회를 마쳤다. 집회를 마친 뒤 녹십자병원을 비롯한 ‘위장폐업분쇄 공동투쟁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이라는 혈서를 쓰고, 그 혈서를 앞에 들고 여의도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30분부터 시작된 행진은 “악법철폐” “민주쟁취”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끝장내자”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해체 전경련, 타도 민정당” “악법철폐 노동해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2시간 동안 계속됐다.
오후 6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 개정 촉구대회’에는 대오가 더욱 불어나 5만여 명이 참가했다. 오후 8시에는 전경련 앞에서 각 대오별로 ‘노동악법 개정 반대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열었고, 귀가하던 노동자들에 대한 백골단의 폭행에 맞서 영등포역 앞에서 가두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노동법개정 요구 민주당사 농성투쟁
1988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는 노동자들에게 확실한 자신감과 투쟁열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11월 28일, 500여 명으로 구성된 ‘전국 노동법개정 투쟁 선봉대’와 각 지노협, 전국노운협 대표 등이 민주당의 확실한 당론 제시를 요구하며 민주당사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11월 30일에는 민주당 청년당원의 농성장 난입과 두 차례의 폭력이 자행됐지만 농성 5일째인 12월 1일, 김영삼 총재의 당원 폭력에 대한 사과와 보상 약속, 상부 연합단체의 복수노조 허용 등의 당론과 12월 5일까지 법안을 상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농성을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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