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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태제과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1979년 7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79-07-17 조회 403

해태제과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

 

⦁ 시기 : 1979717~ 1980229

⦁ 요약 : 1979년 해태제과 노동자들이 18시간 곱빼기 노동 철폐 투쟁, 30분 휴식시간 추가, 도급제 폐지 투쟁을 거쳐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을 벌여내 승리함으로써 당시 전 식품업계의 장시간 노동 관행에 파열구를 냈다. 

 

 

1979717일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산업선교회관에서 18시간 곱빼기 노동 철폐 투쟁, 30분 휴식시간을 위한 서명운동, 도급제 폐지 투쟁을 거쳐 마침내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의 막을 올렸다.

이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599일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노동청 지방사무소에 18시간 곱빼기 노동과 휴일 근무를 바로잡아 달라고 진정하고 19763월까지 서명운동 등을 전개했다. 이들의 투쟁은 세계의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알려져 국제자유노련에서는 한국노총이 이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도록 요청했다. 제과업계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국내외에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마침내 19763월에는 18시간 노동에서 12시간 노동으로, 7부제 작업에서 휴일근무제로, 식사시간 30분에 휴식시간 30분을 더하는 데 성공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전면화는 앞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에 맞선 투쟁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1979717일에 산업선교회관에 모여 8시간 노동제 쟁취를 결의한 다음 이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않고 8시간 노동 후 퇴근을 계속했다. 이들의 요구는 즉각적인 8시간 노동제 쟁취라기보다는 언제부터 8시간 노동을 할 것인지 확답을 듣는 것이었다. 생산부장 진중배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8시간 노동제를 시켜 주겠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안 되고 언젠가 불황을 넘기고 실시하자며 회유했지만, 비스킷부에서 시작된 ‘8시간 노동 후 퇴근 투쟁은 캔디부와 캐러멜부로 퍼졌다. 회사에서도 남성 기사들을 동원해 퇴근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7983, 노동자들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사태를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동청장 앞으로 24명이 연서한 탄원서를 발송했다. 이날 오후 4시경 20여 명의 남성 기사들이 대의원 이숙자 한 명을 감금한 채 회유와 협박을 계속했다. 그러나 회유와 협박이 통하지 않자 회사는 직접적인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984일 새벽 330분경, 비스킷부 A조 야간 퇴근 현장에 남성 기사 15명이 나타나 “8시간 일하고 나가는 년들 모가지를 비틀겠다” “씹어 먹겠다” “밟아 죽이겠다며 폭력을 행사하고, 대의원 이숙자를 협박해 84일 아무것도 모르고 출근한 비스킷부 B조 노동자들에게 회유성 발언을 강요했다. 발언 중 이를 제지한 김금순 등 많은 노동자가 무차별 구타를 당했고, 회사는 완전히 파업상태로 바뀌었다. 86일부터 노동자들은 다시 8시간 노동만 하고 퇴근하기 시작했고, 매일매일 남성들의 폭행이 이어졌지만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갔다. 87일에는 껌부에서도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며 투쟁에 동참했다. 88일 껌부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끝내고 퇴근하려 하자 남성 기사들이 몰려와 냉장고 20여 개로 가로막고 그 안에 쇳덩이를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노동을 강요했다. 심지어 껌부 작업장 밖에 회사제품 수송 트럭, 자가용, 철조망까지 둘러쳐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게 감금했다.

  

1979810, 노동조합은 갑자기 임시 대의원대회를 소집해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는 대의원(52명 중 5)을 협박하고 공갈하고자 결의하기도 했으며, 이숙자 대의원을 영등포경찰서 정보과장, 사촌형부, 아버지까지 동원해 시골집으로 끌고 가 3일 만에 사표를 내게 했다. 김순례, 김고만은 폭행을 당해 실신한 채 신문지에 덮여 있다가 동료들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긴 후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지기까지 하는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1979816일에는 대통령의 특별명령으로 구성된 산업체 등에 대한 외부세력 침투실태 특별조사반(조사반대검공안부장 박준양)’이 해태제과를 조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폭행을 당하면서도 8시간 노동을 계속했다.

 

마침내 912, 전국화학노조 정동호 위원장, 정길태 사무국장, 사용자측이 12시간 연장근로를 실시하고 있는 농심, 대일유업, 동양제과, 롯데제과, 삼립식품, 삼양식품, 크라운제과, 한국콘티넨탈식품 등 9개 업체(해태제과와 서울식품은 불참)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연내에 12시간 노동문제를 바로잡고 이로 인해 줄어드는 노동자들의 임금 보전에 합의하고 그 방법을 논의하기로 했다. 104일자 신문에는 뜻밖의 추석 선물이었다는 제목의 “925일 해태제과 신정차 대표이사가 임금은 현 수준을 유지하면서 현재의 112시간 노동을 8시간으로 낮추는 시간을 3월로 앞당기겠다고 밝혔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보도는 8시간 노동제 쟁취투쟁 중에 강제 사직당한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중 이숙자, 이희덕, 김순례, 나미숙, 박영미, 김양순, 모춘자, 오영숙, 박막내 등 9명이 복직 투쟁을 시작했다. 해고자들에게도 엄청난 탄압이 가해졌고, 현장에서 8시간 근무하는 동지들의 숫자도 가공할 폭력 앞에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쉼 없이 투쟁을 계속해 갔다. 7월 비스킷부의 도급폐지 투쟁에서 8시간 노동 준법투쟁에 8600700명의 동참자가 9월 초에는 15, 921일부터는 18, 1015일에는 20명으로 점차 줄었지만 무려 9개월간 쉼 없는 투쟁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다 해가 바뀌고 사장이 언론을 통해 약속한 3월이 돌아왔다. 2월 마지막 날, 각 현장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을 모아놓고 “31일은 휴일이므로 32일부터 8시간 노동제를 시행한다는 내용으로 조회를 했다. 노동시간은 4시간 단축됐음에도 임금은 10% 인상됐다.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해태제과의 8시간 노동제 투쟁의 승리에 힘입어 전 식품업계가 비로소 이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참고자료

순점순, <8시간 노동을 위하여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기록>(풀빛,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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