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동운동사건
..... 원풍모방 민주노조 사수투쟁(1982년 3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2-03-27 조회 331

원풍모방 민주노조 사수투쟁

 

⦁ 시기 : 1982327~ 101

 

 

 

1982101일 새벽 5, 그날은 마침 추석이었다. 국제그룹 원풍모방 1공장이 있는 대림동은 폭풍전야의 적막에 휩싸였다. 그리고 잠시 후 삐이익~” 하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새벽을 가르자 끌어 내!” 하는 커다란 한마디가 떨어졌다.

 

농성장에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남성인 이재호 부조합장이 1시간 전에 끌려가 50여 명의 여성만이 남아있었다. 폭력배들은 추석 명절을 잡친 분풀이를 하려는 듯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여성노동자들도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탈진할 대로 탈진해 있었지만 몽둥이로 짓이겨지면서도 폭력배의 허벅다리를 물어뜯는 조합원도 있었고, 핏물이 벌겋게 고인 바닥에 엎어져 폭력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끌려가는 조합원도 있었다. 그들은 이 무자비한 폭력 앞에 서있는 자신들이 민주노조운동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자비한 탄압에 맞선 지 10, 민주노조로서의 원풍모방을 마지막으로 사수하는 일이자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무수한 노동자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엄숙한 일전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새벽길에 내몰려 맨발에 피투성이가 된 여성노동자들이 추석날 새벽 6차선 차도 위를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이 구석, 저 구석 심지어는 대로 한가운데서 한 떼의 폭력배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고, 끌려가고, 병원으로 실려 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서럽고 정든 작업장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갔다. 날이 밝았다. 작전 종료와 함께 농성도 끝났다. 노동운동 침체기의 마지막 등불마저 이렇게 꺼져 버린 것이다.

1982년 이날까지 원풍모방노조의 발자취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다. 그 끈질긴 투쟁 중에도 회사가 부도났을 때는 노동조합에서 수습대책위를 구성해 경영하기도 했고 노사공동경영제를 시도해 마침내 회사를 살려냈지만, 결국 이들은 처참하게 길바닥으로 내몰린 것이다.

 

1982101일 폭력사건은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1982327일 노동부 관악지방사무소 근로감독과장 김용권은 정선순 위원장에게 원풍모방의 현안인 단체협약 개정, 임금인상, 정상가동과 기숙사 입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운영조항에 도시산업선교회 출입금지조항을 명시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노동조합에 대한 간섭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노동조합에서는 47단체협약 준수하라는 리본을 일제히 다는 등 단체협약 준수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419일에는 검찰, 안기부, 보안사, 경찰, 구청, 노동부 간부들이 모여 동작구 지역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원풍산업 모방공장 노사분규 해결방안을 논의했지만 노동부는 일방적으로 회사편만 들었다.

 

회사는 53일 재차 노동쟁의 발생신고서를 노동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512일에 노조에서 채용한 사무원 김인숙마저 회사 정문 출입을 못 하도록 봉쇄하고, 남부경찰서 정보과 이상인 형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에 항의하는 위원장과 노동조합 간부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이에 노동조합은 회사쪽의 이러한 만행을 알리기 위해 원풍모방노동조합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유인물 10만 장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고, 이 유인물을 배포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돼 맞거나, 벌금 또는 구류를 받는 등 탄압을 받았다.

한편 중앙노동위원회에서는 회사가 제출한 노동쟁의 발생신고에 따라 조정위원회를 소집하고, 노동조합 대표의 참석을 요구했으나 노동조합은 회사측의 노동쟁의 신고와 행정관청의 적법판정이 위법 부당하고 지금은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신중하고 성실한 교섭을 하는 기간일 뿐 노동쟁의라고 하는 급박한 분쟁상태가 아니다는 등의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노동부는 72일에 원풍산업 노사분규 처리방안을 마련하고 79일에는 동작구청장실에서 원풍모방 대책위원회 특별동향에 따른 대책토의를 위하여 확대 지역 노동대책회의를 소집하는 등 노동조합에 대한 파괴 음모가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콘트랄데이타 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관제언론들은 도산(都産)은 도산(倒産)을 책동했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침투요원의 파업, 연좌데모 책동” “죽음 등 극단 용어의 명찰 달고 다녀등 악의에 찬 보도를 하기도 했다. 926일 오후 3, 회사 게시판에 박순희 부지부장과 이옥순 총무, 가공과 조합원 박혜숙, 김영희 등 4명에 대한 해고조치가 나붙었다. 이에 927일 대의원 등 30여 명이 모여 회사가 취한 해고조치의 부당함에 공감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경비실에 집결해 있던 남성 담임 등 40여 명이 총무과 사무실에 들어간 지 30여 분이 지난 1시경 우르르 몰려나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회의 중이던 노조사무실 문을 부수고 한꺼번에 들이닥쳐 집기를 때려 부수고 정선순 위원장과 김인숙 사무원을 안에 둔 채 출입문에 못을 박아 봉쇄했다. 이 소식을 듣고 작업 중이던 조합원들이 달려왔지만 폭력배에게 밀려났다. 또한 오후 3시경에 소식을 들은 조합원들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으나 맨몸으로 항거하는 여성조합원들이 폭력배를 당할 수는 없었다. 이에 오후 3시경 긴급 상임집행위원회의를 소집하여 조합원 전원이 노동조합을 되찾을 때까지 퇴근을 중지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조합원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단식을 하며 농성을 진행했으나 회사측은 농성장에 물 공급마저 끊고 사내방송과 가족동원으로 농성을 해산시키려 했다.

 

930일 농성 넷째 날 오후 5시부터 농성장을 에워싸고 있던 폭력배들의 작전이 시작됐다. 200여 명의 폭력배는 각목을 휘두르며 농성장으로 난입해 조합원들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작전 시 1시간 만에 250여 명의 조합원을 끌어냈다. 그러나 회사 안에 남겨진 조합원 50여 명은 회사 경비실 쪽에 앉아 101일 새벽까지 농성을 계속했다. 회사 안에는 주로 조합 간부들이 남아있었는데, 회사 쪽에서 간부들을 먼저 끌어낼 경우 밖에서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에 대비하여 남겨둔 것이다.

 

101일 새벽 5, 수백 명의 폭력배가 달려들어 조합원들을 끌어내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농성장은 전쟁터가 돼버렸다. 하지만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하여 45일간의 굶주림을 참아가며 진행한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 후 조합간부들은 102일 상임집행위원회의를 소집해 탄압 실상을 폭로하는 문건을 작성해 배포하고, 107일부터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회사와 경찰측에서는 이를 저지하고자 상임집행 간부 전원을 지명 수배했다. 107일과 13일 두 차례의 출근투쟁은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무산됐다.

 

927일 이후 언론의 왜곡 보도, 노동부의 조합원 성분 분석에 따른 각 경찰서와 행정관서까지 동원된 사표 강요, 강제 귀향, 연행 등으로 조합간부 8명이 구속되고 55명이 구류선고를 받았으며, 39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또한 농성과정에서 약 200여 명 이상이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500명 이상의 조합원이 강제 해고당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인명진 목사는 산업선교회관에 원풍조합원들을 더 이상 있게 할 수 없으니 정리하라고 압력을 가해왔고, 결국 1983119100여 명의 조합원들이 회의를 열어 조합원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구속된 간부들 뒷바라지를 할 사람 몇 명만을 선출한 채 그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관에서 기숙하던 전 조합원 농성을 해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감옥에 있던 조합간부들이 세 차례의 단식투쟁을 벌이고 구속자 가족과 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동조 단식농성이 확산되려 하자 경찰은 농성장소에 난입, 강제 연행해 각 관할 경찰서로 분산시킨 뒤 가택 연금시켰다. 이후 원풍모방노동조합은 법외노조 활동을 결의하고 회보 발행, 노동부 장관 인책 요구 국회청원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농성과정에서 적지 않은 갈등이 나타난 영등포산업선교회측과 원풍노조는 결별하게 된다. 결별의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 운동권 내에서 일어난 세대교체 움직임과 관련하여 앞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이끌어갈 실무진이 원풍모방을 더는 지도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104일 자로 10여 년 동안 깊은 유대를 맺어왔던 영등포산업선교회측과 일체의 관계를 청산하게 된다.

 

⦁ 참고자료 원풍모방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 <민주노조 10년>(풀빛, 1988)

 

이전글 전두환정권 노동계 블랙리스트 철폐투쟁(1983년 6월)
다음글 청계피복노동자들 아프리사무실 점거농성(1981년 1월)
목록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