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 만들기 : 어떤 백서를 만들 것인가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오래 전부터 노동자 스스로 자기 역사를 쓰자고 말했다. 그리고 역사를 스스로 쓰자는 운동을 하는 단체, 노동자역사 한내가 만들어졌다. 왜 노동자가 역사를 써야 하는 것일까. 역사를 둘러싼 계급투쟁은 오늘도 치열하기 때문이다. 가끔 한내로 문의가 온다. 조직의 역사는 어떻게 써야 하나. 그래서 그동안 백서를 제작하고 교육했던 경험을 정리해 몇 차례로 나눠 싣는다. 어떤 백서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 누가 만들 것인가 순으로. 많이 활용되기를 바란다.” - 정경원 (노동자역사 한내 자료실장)
노동자는 자신의 삶과 사회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투쟁해 왔다. 해고, 수배와 구속, 목숨까지 내놓으며 투쟁했다. 그러나 그 기록은 적다. 기록이 남았다 해도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되지 않고 있다. 지난 시기 조직 활동과 투쟁이 별 의미 없는 것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노동운동을 한국사회 발전을 위한 걸림돌로 치부되기도 있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반증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사의 틈을 누가 메워주겠는가. 노동자 스스로 자료를 정리하고 백서를 남기는 일은 노동자의 몫이다. 여기서 출발하여 계급적 역학관계에서 요구되는 전망을 밝혀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계급투쟁이 여전히 지속된다고 하는 것 같다.
조직은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조합원들의 의견과 자료를 모으고, 평가하면서 조직적 기반을 다지는 데 활용할 수 있다. 자신(조직)의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역사적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면, 노동자 투쟁의 역사가 결코 패배의 역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투쟁은 마무리되지만 그 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노동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노동자 스스로 자기 기록을 남기고 재구성해 역사를 바로잡아야한다는 문제의식은 운동의 흐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 면에서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역사를 쓰기는 것은 또 하나의 투쟁이다.
그동안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기록해왔는지 그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는 시기는 1970년대부터다. 당시의 노동조합이나 해고자모임의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과 노동자들이 쓴 수기가 있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아래서 노동자의 삶과 투쟁은 기록되지 못하였지만 유화국면에 접어들면서 당시대 기록이 시작되었다. 87년 대투쟁 이후에는 투쟁기가 많아졌다. 계급의식 연구도 활발해지면서 1차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해 당시에 나온 유인물, 노보의 글 등을 모아놓은 책들도 발간되었다. 노동자 스스로 곳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자기 경험과 주장을 알리고자 했다. 문학회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노동조합 활동이 틀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노보나 활동보고서가 제작되어 1차 자료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민주노총 건설을 전후로 노동조합 조직이 변화를 겪으면서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가장 방대한 작업으로는 전노협 해산 후 대의원대회 결의로 작업한 <전노협백서>다. 전노협백서는 지역노조협의회의 백서와 만나면서 그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마창노련사, 부노협백서, 전북노련10년사는 조직 해산과 동시에 지역의 노동운동을 기록했다는 의의가 크다. 최근 들어서는 노동조합에서 20년사, 투쟁백서 제작을 사업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투쟁주체들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조직적인 사업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방향성 정하기
백서는 밑으로부터의 기록임을 가장 큰 원칙으로 하고 조합원 스스로 자기 위치를 확인하도록 하는 데 의미를 둬야 한다. 자료 취사선택에서부터 구성, 내용에 이르기까지 이 방향성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백서 제작 과정에서 조합원, 간부 등 모두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특히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여러 의견이 고르게 실려 새롭게 평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한국사회 변화와 노동운동 흐름 속에서 자기 조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백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해온 노동운동 역사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반성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상 정하기
백서를 누가 읽을 것인가를 정해야 어떤 수준으로,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지가 결정된다.
조직에서 내는 백서는 현재 조합원 및 미래의 조합원을 대상으로 만들어지면 된다. 그래야 교육, 평가, 주체적 참여 등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거듭될수록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이다. 20년, 30년 된 조직의 역사를 잘 아는 조합원이 거의 없고 근속년수가 그리 되더라도 기억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보면 나중에는 신입 조합원에게 노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할 수도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조합원들에게 노조의 뿌리를, 노조를 만든 주역이 바로 조합원 자신이었음을, 그 자부심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필요하다.
백서는 쉽게 쓰는 게 좋다. 조합원들은 당시 자신들이 외쳤던 구호 하나로 사건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이지 복잡한 논리, 논쟁 속에서 사건을 기억하거나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건은 재현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한다면 딱딱하지 않아 기억이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1차 자료를 모아 자료집 형식으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다. 언제고 새롭게 구성되고 재평가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기반이 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자료 설명을 적어놓는 게 좋다. 자료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를 아느냐 아니냐에 따라 해석이 더 풍부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누가 보더라도 풍부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해제를 적는 친절함을 발휘하면 좋다.
형식 정하기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어떤 형식으로 만들 것인지 정해야 한다. 앞서 나온 사례들을 검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자료집 형식(전노협백서 자료편, 공익노련 10년사 등), 시기별·사건별·영역별로 사건의 발생원인 진행 결과 평가를 서술하고 해당 1차 자료를 싣는 백서 형식 (전노협 백서 등), 이야기 재구성 방식 (내사랑 마창노련, 한국통신계약직노조 투쟁백서, 발전노조 투쟁백서, 현자노조20년사, 해고는 살인이다 등), 경험자의 이야기 모음(이제는 주장할 때가 되었다, 어깨걸고 나가자, 다국적기업과 맞서 싸운 TC전자 노동조합운동사, 사라지는 깃발은 없다 등), 운동사 등 다양한 사례가 있다. 평가를 통해 우리 조직에 적합한 형식이 어떤 것인지 정하면 된다. 물론 여러 형식을 혼용하여 만들어도 문제되지 않는다. 에를 들어 이야기 서술과 자료집을 함께 내거나, 이야기 서술과 경험담 정리를 함께 할 수도 있다. 조합원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이야기 형식으로 엮는 게 좋겠다. 그리고 역사적 가치를 위해 1차 자료는 별도로 모아 자료집을 제작을 해놓으면 상호 보완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