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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창원지역 1987년 노동자대투쟁
울산 현대계열사의 투쟁 열기가 부산지역에 옮겨 붙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마산창원지역에도 노동자대투쟁의 불길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울산과 가까운 지리적 영향도 있었지만, 현대그룹 산하 창원 현대정공의 영향이 지대했다. 창원 현대정공은 울산지역 현대그룹 소속사들의 노조결성에 자극받아 울산 현대정공에 앞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7월 30일 노조결성 투쟁에 이어, 7월 31일 노조결성, 8월 3일 노조결성 보고대회와 농성을 통해 마산과 창원지역의 대투쟁에 불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어 한국중공업이 현대정공과 거의 동시에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어용노조 퇴진투쟁을 전개했다. 7월 31일에는 효성중공업, 8월 1일에는 세신실업, 그리고 8월 7일 통일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7·8·9월 노동자대투쟁의 확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마창지역 노동자대투쟁은 초기인 7월 한 달간은 대부분 사내농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금성과 통일중공업 노동자들이 본격적으로 투쟁에 뛰어들면서 가두투쟁으로 양상이 바뀌게 된다. 8월 중순 이후에는 정부의 개입이 본격화되어 전국에서 최초로 노동운동가들에 대한 구속·수배가 광범위하게 시도된다. ‘외부 불순세력’ ‘노동자 선동’을 이유로, 마산과 창원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소식지 발간 등 지원 활동을 벌여온 ‘경남지역노동자협의회’ 회장 황창호와 한국중공업 해고자 김찬근 등 두 사람이 노동쟁의조정법상 ‘제3자개입금지 위반’ 혐의로 8월 20일 구속됐고, 그 외 2명이 같은 혐의로 수배됐다. 또한 노사간 합의로 투쟁이 마무리되었던 한국중공업, 한일합섬 노동자 중에서 각 3명과 2명이 그간의 투쟁을 이유로 구속되는 등 자본측의 탄압이 거세게 몰아쳤고, 이에 맞서 마창지역 노동자들의 연대투쟁 또한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산과 창원지역이야말로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한 성과를 가장 온전하게 발전시켜낸 지역일 것이다.
먼저 마산수출자유지역을 중심으로 한 여성 중심의 사업장들과 창원기계공단을 중심으로 한 남성 중심의 사업장들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하나의 대오로 묶이게 된다. 이후 마산과 창원이 아닌 ‘마창’으로 통칭되며 노동조합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둘째, (주)통일의 투쟁을 통해 볼 수 있듯이 해고자들이 직접 투쟁현장에 결합함으로써 현장노동자들의 투쟁의지가 더욱 강화됐으며, 구사대의 폭력을 자체 노동자들의 물리력으로 돌파해낸 것도 인상적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마창지역 투쟁의 성과는 기업별 투쟁의 한계를 한꺼번에 넘어서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힘이 마창노련으로, 그리고 전국조직 건설의 힘으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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