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스레터
..... 이 달의 역사
..... 노동절, 피와 투쟁의 역사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4-27 조회 1314
 

노동절, 피와 투쟁의 역사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실장)


어서 오라, 함께 가세, 한국 노동자들!

억압이 있기에 저항이 있고, 착취가 있는 곳에 투쟁이 있습니다. 저들이 아무리 우리를 감시하고 짓밟는다 해도 모순에 찬 현실이 있는 한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 많은 동지들이 어두운 감방에 있지만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더 많은 노동형제들이 그분들의 뒤를 이어 투쟁의 대열에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의 단결 투쟁은 닫힌 감방 문을 열어젖히고, 그 동지들은 더욱 단련된 강철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증명하듯이 승리는 항상 옳은 자의 편입니다.

100년간의 노동절은 이 같은 교훈의 역사입니다. 수십만의 미국 노동자들은 1889년, 경찰의 기관단총을 파업투쟁으로 돌파하여 오만한 미국 자본가의 콧대를 꺾고 8시간 노동을 쟁취했습니다. 자유를 위해 쓰러져 간 선배 노동자들의 고귀한 정신은 저 아프리카 오지에서 유럽 대륙까지 모든 노동자의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올해에도 역시 5월의 거리를 노동해방 깃발로 덮어버릴 것입니다. 지금 소리칩니다. “어서 오라, 함께 가세, 한국 노동 형제들!” 

 


1989년 4월 30일 노동절 연세대 교문 출정식 사진

전국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투쟁본부에서 1989년 100회 세계 노동절을 맞아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단결을 호소한 글이다. 투쟁본부는 4월 30일에 열린 대회를 앞두고 5월 1일을 노동절로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절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왜 벌였을까?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하려네

1884년 미국노동총동맹은 연차 총회를 열고,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1886년 5월 1일에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전국에서 34만 명의 노동자가 시가행진에 참여했고, 19만 명이 파업을 했다. 노동자들은 어깨를 걸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도 이제 노동 일은 않을 테야
일해 봐도 보람도 없는 그런 일은 않을 테야
겨우 연명할 만큼 주면서 생각할 틈조차 안 주다니
진절머리가 난다네
우리도 햇빛을 보고 싶다네
꽃 내음도 맡아 보고 싶다네
하나님이 내려 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덞 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 왔다네
이제 우리 여덟 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세

5월 3일 파업 농성중인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총을 쏘아 6명이 죽었다. 다음날 헤이마켓 광장에서는 경찰 만행 규탄 집회가 열렸고, 경찰은 이 집회를 빌미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잡아들였다. 4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1명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로부터 7년 후 이들은 무죄임이 판명되었고 사형을 면한 8명은 석방되었다. 자본가들은 조직을 파괴하기 위한 제물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이용했다. 이 수법은 이후 노동운동 탄압에 되풀이되고 있다.

1889년 7월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투쟁했던 미국 노동자의 투쟁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5월 1일을 세계 노동절로 결정했다. 그리고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의 확립을 요구하는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1890년 세계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제1회 세계 노동절 대회를 치렀다.

이처럼 피와 투쟁으로 만든 노동절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단결과 투쟁을 다짐하는 날이며, 노동운동이 전체 운동의 요구를 수렴하고 그 운동을 조직해 정치투쟁으로 나가는 발판으로 활용되어 왔다. 

정치적 총파업으로 5.1 메이 데이를 맞이하자!

노동절을 둘러싼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싸움은 한국 노동운동 100년의 역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1923년 조선노동연맹회 주최로 노동절 행사를 처음으로 열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계획한 대로 총파업을 진행하진 못했지만 서울에서는 기념 강연을, 마산에서는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시위를, 진주와 대구 등에서도 기념식과 강연회를 열었다. 1930년대 탄압 속에서도 노동절을 기념했고, 활동가들은 “정치적 총파업으로 5.1 메이 데이를 맞이하자!”는 격문을 전국적으로 뿌리기도 했다. 해방 후 전평은 1946년 5월 1일 노동절 60주년 기념식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거행했다.

우리 조선 노동자의 당면 임무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민주주의 팟쇼 분자들의 민족 분열과 온갖 모략을 분쇄하고 삼천만 동포가 행복스럽고 부장하게 잘 살 수 잇는 강력한 민주주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지 안코서는 우리가 급히 갈망하는 쌀과 나무와 옷감과 직업에 대한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업는 것은 물론 60여년 전에 미국 노동자들이 완전히 전취한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노동운동의 자유, 언론 집회 시위 결사 출판의 자유를 얻기 위하야 또다시 투쟁하지 안으면 안 되겟습니다.

메―데―는 우리 노동자들의 전체의 힘을 합하야 이러한 요구를 전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대중적 위력을 보이는 날임으로 메―데―를 세계 노동자와 공통한 공휴일, 시위 행진의 날로 하지 안흐면 안 되겟습니다. 『전국노동자신문』 제16호 1946년 5월 1일자

미군정은 “정치운동을 하는 단체나 그 연합은 그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노동조합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전평을 탄압했고 대신 대한노총을 키웠다. 1957년 이승만은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을 ‘반공하는 노동자 조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노동절로 결정했다. 급기야 박정희는 이름도 근로자의 날로 바꿨다. 엄혹한 시절 경찰을 피해 기념식, 기념 강연 등으로 진행하던 노동절을 노동자대투쟁 이후 사회 전면에 등장한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조직의 운명과 투쟁 요구를 걸고 노동절을 다시 쟁취했다. 노동자는 1989년 4.30 대회로 되찾은 노동절을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왔다.     
 


1991년 전노협에서 주최한 세계노동절 포스터

 
민주노총은 올해 5.1절 연대총궐기 방침을 “MB와의 맞짱뜨기 투쟁 선포로 최저임금 및 비정규직법 개악 반대와 국민촛불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 “노동자, 서민등 각계각층과의 연대를 호소하는 민주노총의 ‘사회연대선언’을 발표하고 6월대투쟁을 결의하는 날”로 잡았다.
목숨 걸고 노동자의 요구를 외친 지 120년이 가까워 오지만 여전히 8시간 노동, 생계보장, 정치적 자유는 노동자의 구호다. 거리에서 현장에서 진정한 노동절 바람을 불러 일으켜보자. 단결과 연대라는 노동절 정신을 되살려보자. 

 
 
 
 
 
목록
 
이전글 119주년 노동절을 맞이하며
다음글 권용목과 ‘민주노총 충격보고서’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