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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아온 길
..... 4.19묘지의 단상(斷想)
첨부파일 -- 작성일 2009-04-27 조회 949
 

4.19묘지의 단상(斷想)

이승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4.19혁명 49주년이 얼마 전 지났다.

이제는 4.19국립묘지라고 명칭이 바뀌었지만, 나에게는 4.19묘지가 더 익숙하고 4.19의 의미도 묘지라 불릴 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 내가 4.19묘지를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인 8살 때 우리 집이 4.19묘지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으로 이사 하면서부터였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벽산아파트가 들어섰지만, 1970년 그 시절에 그 동네는 개미굴(한번 들어가면 길을 찾기 어려운 미로 같은 지역)이라 불렸다. 여름이면 부엌에 들어찬 물을 밤새 퍼내야 했고, 마땅한 놀이터 하나 없었던 꼬마들에게 4.19묘지는 입구에는 내가 흐르고 연못과 나무들 그리고 탑과 상징물들이 많은 천혜의 요새였다.
 

그 당시 내 기억 속의 4.19묘지는 입구에는 다리가 있어 내를 건너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원혼 때문에 매년 한사람씩 죽어 나간다는 연못이 있었고, 입구와 연못부터 상징탑이 있는 계단까지는 굵은 자갈이 깔려 있었다. 어린 시절에 의미도 몰랐던 상징탑은 높기만 했고 까만 사람의 형상을 한 조형물은 무섭기만 했었다. 이를 지나면 4.19영령들이 누워 있고 맨 위로는 봉안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철없던 시절 나와 친구들은 4.19묘지를 진지 삼아 북한산 일대를 뛰어 다니며 놀았고, 겨울이면 연못에서 스케이트와 썰매를 타고, 한여름에는 야밤에 봉안소로 와서 서로의 담력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그 시절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연못부터 깔려 있던 자갈이었다. 걷고 뛰기도 힘들었지만 걸을 때 나는 소리 때문에 관리소 아저씨에게 들켜 쫓겨나기가 일쑤였다. 왜 자갈을 깔았을까 궁금했던 나는 아버님께 묻게 되었고, 휴일 날 내 손을 잡고 4.19묘지에 가신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승원아 자갈을 밟으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게 되고, 자신이 밟은 자갈의 소리 때문에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게 된단다. 이곳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분들이 계신 곳이란다. 어떤 누구도 이들 앞에서는 겸손하고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란다.”

그 당시 초등학교 4학년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다만 4월이 오면 대학생들이 시낭송회도 하고 데모도 하곤 했는데, 한번은 쫓겨 달아나는 대학생들에게 정릉으로 넘어 가는 길을 안내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자갈의 진정한 용도를 알게 되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박정희가 죽고 80년 봄이 왔을 때 난 아직 고등학생이었지만 세상이 변하는 줄 알았다. 그것은 박정희가 죽었다는 것과 그해 4월 4.19묘지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며 세상은 바뀌어 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지 않고 광주대학살이 일어났다. 80년대 초반부터 4.19가 되면 그 지역 사람들은 가게 문을 닫고 외출을 금지해야 했고, 4.19묘지에 가면 집이 바로 앞인데도 집에 갈 수 없는 상황들이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 전두환은 4.19묘지의 자갈들을 걷어내고 시멘트로 발라 버렸다. 학생들이 자갈로 투석을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전두환은 자갈의 경건함이 싫었고, 4.19의 영령들이 싫었던 것 같다.

1985년 나의 7개월간의 실업시절, 4.19묘지는 독서실이었고, 휴식처였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출근해서 책도 보고 무명 노동자의 묘비도 보며, 잠도 잘 수 있는 평화로움이 나를 아주 평안하게 해 주던 장소였다. 자갈도 없어졌지만 등나무는 남아 나에게 그늘과 평화로움을 주던 장소였다.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을 생각하며 노동조합의 동지들과 4.19기념 참배와 등산도 하며 내가 느꼈던 어린 시절의 느낌을 전해 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서 4.19묘지의 국립묘지화가 진행되었고, 주차장을 만들고, 연못은 없어지고 대리석에 땡볕이 내리쬐는 곳으로 만들고 산책로를 만들었다. 물론 기념관도 만들었다. 외형은 화려해졌으나 그 정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명소가 되었다.

49주년 4.19에 명박이도 다녀(참배만 하고 감)가고 각 정당대표들도 참석하는 기념식도 진행되고 구청이 주관하는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 되었다. 더 이상 4.19는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가 되고 있다. 혁명의 정신은 박제화되고 4.19국립묘지의 기념관에 모셔진 먼지 쌓인 유품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4.19도 5.18도 화려한 외형의 기념, 추모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정신으로 세상을 바꿀 원동력이 되길 바라는 건 너무 과한 생각인가? 노동자의 투쟁도 과거형으로 바뀌고 있지 않는지 심히 우려스럽다. 과거를 통해 당면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실천하는 운동이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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