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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항쟁의 길을 찾아서
노상규 (노동자역사 한내 회원)
잔인한 총성이 들린다.
총구는 누구를 향하는지… 어디를 향하는지… 왜 쏴야 하는지… 그 총을 든 자들은 알고 있는 걸까?
며칠 전 “지슬”이란 영화를 봤다. 이 영화도 불쌍하게 죽어간 제주인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동굴로 피신한 인민들은 왜 죽어야하는지 모르고 죽이는 이들도 그저 빨갱이라 하니 이유도 없이 죽인다. 그렇게 제주4.3은 기억되는 것 같다.
우리는 이번 기행을 통해 단지 불쌍한 인민들의 죽음으로만 기억되어지길 바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제주4.3의 태동부터 알려지지 않은 속살을 꺼내보고자 했던 것 같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고 알리려는 이와 알려는 이의 자세와 수준차이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그 시도와 의미는 내 가슴속 한켠에 아직도 잔잔히 일렁이고 있다.
2013년 3월 15일 바쁜 아침을 시작한다. 사는 곳이 충주인데 비행기는 김포에서 타야 한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분들이 와계신다.
제주도에 도착하여 관덕정으로 갔다.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송시우 동지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3일 동안 같이 4.3항쟁의 길을 찾아 나서자고 하신다.
옛 관덕정터는 너른터였다고 한다. 1947년 3월 1일 이곳에서부터 4.3항쟁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관덕정>
지금은 관덕정 정자와 기념관만 남아 있다. 너른터에는 이미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멀리 파출소자리가 보인다. 당시 어린아이가 순사의 말에 깔리는 사고가 있었고, 이를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를 하여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시민들이 대책을 수립하면서 4.3항쟁은 준비되었다.
관덕정 앞 오른쪽에 항쟁 사령관이었던 이덕구 시신이 십자가에 박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4.3항쟁의 시작이요, 토벌대에 의해 사실상 마무리되었음을 잔인하게 알리는 곳이 관덕정이었다. 그 자리 부근에 지금은 돌하루방이 서있다.
관덕정을 떠나 제주4.3평화공원으로 이동했다. 이 공원은 역사를 남기고자 하는 제주도민들의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정부차원의 [4.3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면서 4.3에 대한 ‘합법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8년 평화기념관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 4.3항쟁을 알리는 소설을 쓰거나 노래를 지어 불러 고초를 겪던 이들의 노력이 온전히 담기지는 못한 한계가 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게 아무것도 새기지 못한 비석이다.
기념관을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백비. 내게는 조금 충격이었다. 비석이 세워지지도 못한 채 눕혀 있고 비문 또한 없었다.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대통령의 사과까지 받기는 했지만 제주4.3의 진실을 밝히기에, 아직 제주인민들의 마음이 다스려지기에는 부족하다. 진실을 고스란히 밝히기에는 아직도 시기가 이른 건지, 많은 이들이 당시 항쟁을 ‘희생’이 아닌, ‘자신들의 역사’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기념관을 돌며 한내 기행에 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해설하느냐에 따라 진실에 접근하는 길이 다르다는 점 때문이었다. 기념관은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반영하여 전시의 방향을 화해와 상생으로 마무리하고 있는데, 제주 민중의 입장에서 일재 잔재 청산에 대한 열망, 새로운 국가의 상, 그 꿈을 짓밟은 국가권력과 미군정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을 역사로 복원하는 일이 먼저 필요한 것 같다.

<제주4.3평화기념관>
다음으로 간 곳은 이덕구 가족 묘였다. 2007년에 새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앞서 지나온 제주4.3평화공원에는 광주와 같이 4.3항쟁 당시 희생된 영령을 모시는 묘비가 있다. 그러나 이덕구의 묘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처음 위령제를 지낼 때는 무장대 위폐도 함께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무장대는 제외되었다. “학살을 몰고 온 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일부의 반발이 심해 이덕구 후손들이 따로 가족묘를 택했다고 한다. 아마도 정부 차원의 복원과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무장대(중산간지역에서 무장봉기를 하여 저항한 부대)의 사령관을 지낸 이덕구의 일가 친척은 거의 몰살당했다. 4·3진상규명운동에 앞장섰던 강실 재일본 4·3유족회장은 이덕구의 외조카이다.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상황을 눈물로 증언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군인들에게 어린 애들 둘이 뭘 알겠냐고 그 애들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두 살 된 막내는 그대로 업고 가셨단다. 어린 동생이 있으면 남은 애들도 살아갈 수 없다고.
이덕구 묘 설명은 한내 제주위원회 전우홍 동지가 해줬다. 그는 대학 다닐 때까지도 자신이 이덕구 친척인지도 몰랐단다. 전우홍 동지는 1987년 제주대학교에서 시위를 하다가 전경이 쏜 직격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그때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너도 덕구 삼촌처럼 되려고 하느냐”며 하염없이 우셨다고 한다. 그때서야 일가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단다.
숨죽여 살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이덕구 할머니 묘의 비석은 토벌대에 의해 부서진 채 가족묘역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무장대 가족들의 현실인 것 같다. 새로운 사회 건설의 꿈을 제일 앞에서 실천했던 이덕구와 그의 가족들은 찾는 이 없는 가족묘역에 묻혀 있다. 기행단에서 열심히 준비하여 영혼제 형식의 연주를 했다. 아직은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기타와 아코디언 그리고 색소폰 소리가 왠지 모를 쓸쓸함을 더했다.
 
<이덕구묘역을 설명해주는 전우홍 한내 제주위원회 전 부위원장. 이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쌀쌀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인민위원회 위원장 안세훈의 묘였다. 귤 농장 한가운데 비석도 없는 무덤이니, 안내자가 없었다면 누구의 묘인지도 모르고, 다음에 다시 찾기도 힘들 것 같다.

<제주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안세훈의 묘>
안세훈은 3.1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당일 대회에서 안세훈 위원장은 ‘3?1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요지의 개회사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고 출옥 후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단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으로 내려와 친척 집에 살다가 1953년 병사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제주항일기념관이다. 기념관 내부의 내용보다는 기념관 입구에 있는 비석들을 보기 위함이다. 항쟁 지도부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투쟁했던 이들의 흔적을 찾을 길이 무덤이나 비석에 한정되어 있어 안타깝다.
이곳 기념관 입구에는 다섯 분의 비석이 있는데 각각 흩어져 있던 것들을 기념관을 조성하며 한 곳에 모았다고 한다. 1919년 전국을 흔든 만세운동이 제주에서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분들의 묘비다. 그 중에서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 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일본화학노동조합 오사카지부를 조직해 활동하여 일본노동운동의 지도자로 꼽히는 김문준의 비가 눈을 끌었다. 그가 사망하자 일본 노동운동가들이 비석을 만들어 보냈단다.

<김연배, 김시성, 부생종, 김순탁, 김문준의 비석>
아침부터 서둘러 움직이고 하루 종일 버스 타고 걷고 돌아다녔더니 몸은 피곤했지만 제주 민중과 새롭게 만난 기분이었다. 저녁에는 제주4.3항쟁의 전개과정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를 해온 분의 강의를 들었다. 첫날 항쟁의 지도부를 만나러 돌았던 프로그램과 맞물리는 강의였다. 강의 내용은 그들이 어떻게 항쟁을 결심하고 준비하였는가, 규모, 전략, 정권과의 관계, 항쟁의 진행과정 등을 다루었다. 나의 고민은 줄곧 ‘제주 민중들은 왜 그들과 함께했는가?’ 라는 물음에 꽂혀 있었다. 나도 그때까지는 제주4.3항쟁을 단지 불쌍하게 죽어간 제주인민들 이야기로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게 이번 기행의 목적이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