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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지역 1987년 노동자대투쟁
1987년 당시 구미지역의 산업구조는 전자산업이 전체 고용인의 50%, 사업체 수는 약 40%를 차지하고 있었고, 섬유산업이 전체 고용인의 40%, 사업체 수로는 50%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독점자본의 집결지로서 지역 내 노동자 가운데 대기업 노동자의 비중이 대구보다 오히려 높았으나, 낮은 노조 조직률은 대구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전자업체를 중심으로 대략 20여 개 업체에서 쟁의가 발생했는데, 이 투쟁은 독점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남성 중심의 기계 및 운수업에서 출발하여 남녀 비율이 비슷한 전자로, 그리고 여성 중심의 섬유업종으로 확산됐다. 노조 조직률이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직결성과 어용노조의 민주화가 중심 요구로 등장했고, 조직결성 시도와 성공률은 대구지역보다 높았다.
구미 전자공단의 투쟁은 금성전선 노동자들에 의해서 처음 터져 나왔다. 노동자대투쟁이 공단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던 추세와 달리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고 여겨졌던 구미 전자공단 노동자들이 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8월 11일, 금성전선 노동자 500여 명은 저녁 9시15분부터 공장후문 광장과 정문에서 △기본급 인상 △상여금 실수령액 기준 지급 △퇴직금 누진제 실시 △가족수당 신설 △구정보너스 지급 등 12개항의 요구를 내걸고 농성에 돌입했다. 한편 회사측은 11일 밤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자 이날 야근조부터 16일까지 임시로 유급휴무키로 결정·공고했으나 야간근무조가 퇴근하지 않았고 12일 출근한 300여 명의 노동자들까지 합세해 대규모 농성투쟁으로 확대되었다. 농성 노동자들은 12일 밤 7시30분까지 박원근 부사장이 나타나지 않자 회사 밖으로 진출하여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다 저녁 9시쯤 경찰 100여 명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공장으로 후퇴했다. 노동자들은 회사 안에서 농성을 벌이다 “현재 문사장이 서독에 있으므로 사장 귀국 후인 22일부터 협상을 시작하자”는 회사측의 설득을 받아들여 13일 새벽 1시에 농성을 자진해산했다.
8월 12일, 금성사 구미공장도 아침 8시 노동자 300여 명이 회사 후문 앞에 모여 △상여금 100% 인상 △가족수당·장기근속수당 지급 △연장근무 단축 등 6개 항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 회사측이 “개별 공장단위에서 해결할 수 없으며 그룹차원에서 일괄처리할 예정”이라며 “휴무기간 중 개선내용을 노동자들에게 통보하겠다”고 설득해 이날 낮 10시쯤 해산했다. 한편 회사측은 투쟁이 시작되자 12일에서 16일까지 임시휴무키로 결정하여 현장노동자들이 출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업은 16일까지 이어졌다.
8월 12일, 오리온전기노조는 오전 11시 회사측에 △상여금 50% 인상 △회사주식 공평분배 △식대개선 등 7개항을 요구하며 노사협의에 들어갔으나 조업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아리드선(전자부품) 노동자 100여 명은 △봉급 20% 인상 △상여금의 실수령액 기준 지급 △가족수당·근속수당 지급 등 8개항을 요구하며 지게차로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농성을 벌이다 이날 밤 11시에 ‘임금 15% 인상’ ‘가족수당 지급’ 등에 합의하고 농성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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