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6월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해고노동자, 전 노조위원장, 노조간부 등 총 11명이 민중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고, 각 지역 및 지구의 자율적인 결정과 역량에 따라 전노협의 독자후보도 존재하였다. 또한 전노협의 활동가나 간부들은 이와 같이 후보로 참여하는 것 이외에 당원으로도 참여하였다. 민중당의 경우, 1990년 6월 당시 창당발기인 1,143명중 500여 명이 학출 활동가 중심의 노동자였고, 당원은 약 2,000여 명이었다.
그 때 그 시절, 노동현장의 정치적 주체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김영수(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최소한의 자유권과 참여권이 보장되는 사회체제라고 한다면, 노동자들은 대부분 두 가지 형태의 자기조직인 노동조합이나 혹은 노동자계급정당과 상호 호응적인 관계를 맺은 채, 자신의 노동공간과 일상 생활공간에서 다양한 이해를 확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계급정당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힘이 덜 들겠지만, 노동조합이든 노동자계급정당이든,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할 경우, 혹은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적 지배전략에서 노동자들을 해방시키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은 위기상황을 맞이하곤 했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거의 사라진 것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것은 나만의 우문일까? 누군가가 현답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노동자들이나 노동자계급운동의 활동가들은 늘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자정당운동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그러한 운동과 긴밀하게 호응하는 노동자들을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노동조합운동의 선진적인 활동가나 간부들은 노동현장이나 생활현장의 노동자들과 일상적인 ‘관계 맺기’가 가능하기 때문이고, 노동자들에게 끼치는 그들의 의식과 행동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적인 관계 맺기의 보편적인 형식과 내용은 정당을 중심으로 선거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노동자·민중들의 진보정당 혹은 노동자계급정당의 명멸 과정을 뒤집어 보면, 그러한 정당에 참여했던 노동현장의 정치적 주체들이 형성되었다가 소멸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부르주아지들은 선거정치를 매개로 자신의 지배적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있고, 그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거나 무너뜨리지 않는 한, 노동자들도 선거정치만을 노동자 계급정치의 노른자위로 간주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동자들의 진보정당운동이나 계급정당운동이 대부분 부르주아 정치의 선거 시기를 계기로 힘차게 일어났다가, 선거에서 뭔가 큰 결과를 얻어낼 것처럼 부풀어 있다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던 그 결과가 명운을 좌우했던 경험이 즐비한 이유이다.
전노협도 1991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선거정치 및 정당운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 정치운동을 담당하는 대중조직으로 존재하였다. 31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는 1991년 3월에 기초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6월에 광역의원 선거를 치렀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다양한 간부들은 당시 선거정치에 대한 정파주의적 운동주체들의 전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지만, 지방선거에서 독자후보전술과 범민주후보전술을 독자적으로 채택하고, 지방선거에 참여하였다.
1991년 6월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해고노동자, 전 노조위원장, 노조간부 등 총 11명이 민중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고, 각 지역 및 지구의 자율적인 결정과 역량에 따라 전노협의 독자후보도 존재하였다. 또한 전노협의 활동가나 간부들은 이와 같이 후보로 참여하는 것 이외에 당원으로도 참여하였다. 민중당의 경우, 1990년 6월 당시 창당발기인 1,143명중 500여 명이 학출 활동가 중심의 노동자였고, 당원은 약 2,000여 명이었다. 특히 민중당은 전국 17개 도시에서 결성된 ‘민중당 건설 전국노동자추진위원회’를 당의 기간조직으로 편재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성격을 강화하는 구조도 마련하였다. 민중당은 상층 중심의 정당 건설방식을 지양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선진노동자들을 합법적 민중정당운동의 핵심주체로 조직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민주노조진영의 선진노동자나 간부들은 민중당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노동자당의 경우, 1991년 12월 15일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켜 1992년 1월 19일 발기인대회를 마쳤다. 총 29개 지부 3,520명의 발기인 대부분이 노동운동의 주체들이었으며, 1991년 12월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 발족 당시 당원은 약 4,000여 명에 달했다.
전노협의 중앙위원의 다수가 개별적인 차원에서 민중당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현대중공업의 선진적 활동가들 약 60여 명이 민중당의 현장조직원들이었다. 또한 1991년 12월 15일에 개최된 한국노동당의 추진위원회 발족식에 다수의 민주노조운동의 지도자들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예를 들면 박종현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한경석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김기자 인천지역노동조합협회 의장직대, 김길용 구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 김경은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부의장, 백순환 대우조선 노동조합 위원장 등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들이 참여하였다.
물론 이름만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노협 간부들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이런 간부들과 함께 했던 조합원들도 상당했다. 민중당과 한국노동당에 참여한 전노협의 정치적 주체들은 아니 노동현장의 정치적 선진 활동가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은 꼭 선거정치만이 아닐진대, 선거결과만으로 흥망성쇠를 논했던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선거정치가 ‘일그러진 권력의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절차이기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실질적 주체들의 몸과 마음을 일그러뜨리고, 동시에 권력을 위임하거나 위임된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절차이면서도, 권력집행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수단이자 주기적(週期的)인 권력위임의 수단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권력의 주체들을 ‘정치적으로 소외시키고 대상화’하는 절차여서, 노동현장의 정치적 주체들이 선거정치에 매몰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때 그 시절의 정치적 주체들은 노동자 정치운동의 주체로 활동했던 기억을 어떻게 불러낼지 궁금하다. 상처만이 남아있을까, 아니면 알싸한 연민으로, 약간은 덧씌워지는 무용담으로, 또는 젊음의 행복으로 다가올까. 노동자 계급정치가 사유와 실천의 행복감을 충만하게 했던 그 옛날 ‘젊음’이라도 불러내, 제도정치나 선거정치의 헤게모니만 관철되고 있는 노동자 정치현장의 답답함을 뚫어보면 어떨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