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상생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1월 17일에는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그러자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를 불태우고 주민 300여명을 집단 총살한 것이다. 또한 군인들은 살아남은 주민들 중 함덕리로 소개해 간 북촌리 주민 100여명을 또다시 총살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 당시 경찰로서 대대장 차량 운전수로 차출됐던 김병석은 놀랄만한 증언을 했다. 김병석은 “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할 대책이 없어 죽였으며, 군인 개개인에게 총살의 경험을 주기 위해 박격포 대신 총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P314)'
북촌초등학교는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인 북촌리 학살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새단장을 한 초등학교 모습. 이곳이 저승실의 시작이었다니....>
1949년 1월 17일 아침, 2연대 3대대 일부 병력이 월정 주둔 11중대를 시찰하고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초등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함덕 주둔3대대 군인들은 스스로 찾아간 10명의 연로한 주민 가운데 경찰가족 1명(이군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해버렸다. 그리고 2개 소대쯤의 병력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아침부터 주민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주민 모두에게 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북촌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갔으며 넋을 잃고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된채 공포에 떨었다.
학교 주변엔 이미 많은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하고 있었다. 군 지휘관이 민보단장을 불렀다. 민보단장은 함덕에 간 상태였다. 머뭇거리던 부단장 장윤관이 나오자 ‘민보단 운영을 이따위로 하니까 폭도를 양산시켰다.’며 운동장을 돌라고 했다. 몇 바퀴 도는데 갑자기 권총으로 사살했다. 집결했던 주민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어 학교 울타리에 설치됐던 기관총이 불을 뿜더니 주민 7∼8명이 쓰러졌다. 학교 운동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널브러진 시체를 한쪽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연고가 없는 부인의 시체는 군인들에 의해 서쪽 울타리 밖으로 던져졌다. 지휘관은 주민 몇몇 사람을 호출하여 군경가족과 민보단가족을 구분하라고 했다. 주민들은 직감적으로 군경가족 대열에 들어가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어떻게든 그 대열에 합류하려고 했다. 용케 들어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군인들의 제지로 합류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한경림씨가 군인의 총에 사살된다. 그녀의 아기는 죽은 어미의 젖무덤에 올라 젖을 빨려고 발버둥쳤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시간은 흘렀다.
월정주둔 11중대를 시찰하고 돌아오던 3대대장은 앞서가던 차량이 기습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부대를 출동시켰다. 그리고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집결한 북촌초등학교에 왔다. 하급 지휘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대대장과 휘하 장교들은 대대장이 임시로 타고 온 앰블런스 안에서 즉석 회의를 했다. 집결시킨 주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이었다. 당시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 경찰로써 그날 임시로 대대장이 승차한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남, 03년 74세)씨는 ‘앰블런스 안에서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들이 의논을 하는데, 기관총을 걸고 집중 사격을 가하자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다. 그런데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아 없는 군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서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이 됐다.’고 증언했다. 그때부터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일대 등으로 끌고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운동장에 있었던 김석보(남, 03년 68세)씨는 ‘어머니와 나는 용케 군경가족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이리저리 쏠리던 10살 미만의 동생 셋은 끝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쳐 죽음의 길로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너분숭이 돌무덤>
그때까지 넋을 잃고 총소리를 듣던 김병석씨가 대대장에게 호소했다. ‘대대장님 저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 친척도 있고 동창도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살리면 어디 가서 살게 하느냐?’ ‘함덕은 큰 마을입니다. 친척들도 있을 것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럼 가서 아는 사람을 선별하라!’ 이렇게 해서야 계속되는 총살은 우선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벌써 400여명 이상의 주민이 학교 주변 이 곳 저 곳에서 참혹하게 쓰러진 뒤였다. 또 초등학교 서쪽 너분숭이까지 끌려갔다가 어떤 지휘관의 사격중지 명령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죽은 자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시체는 살아남은 아녀자들에 의해 주변에 가매장했다가 사태가 진정된 후에 안장하였고,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나 연고가 없는 시체들은 눈이 덮인 채 오래도록 방치되었다가 나중에야 야산에 묻혔다. 당시 죽은 어린아이들은 너분숭이 일대에 임시 가매장한 채로 지금도 조그마한 애기무덤으로 있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은 도 하나의 역사적 장소이다. 북촌대학살이 있은 지 5년 후인 1954년 1월 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으로 다시 한 번 4?3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 것이다. 이날 전몰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제주의 전통풍습인 ‘꽃놀이’를 통하여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영혼을 학교 운동장에서 추도키로 했다. 당시 마을 이장이던 신승빈은 ‘이왕에 꽃놀이를 하는 바에는 4?3사태 때 죽어간 북촌리 주민들의 영혼을 함께 달래자’고 제안했다. 이에 주민들은 술을 올리고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 아이고’ 대성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황급히 달려온 지서 경찰에 의해 제지됐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제주경찰서는 ‘4?3 당시 형살자를 추모했다.’는 죄로 신승빈 이장 등 마을 주민들을 조사하여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4?3의 한을 더욱 덧칠하여 북촌주민들을 옥죄였다. 억울하게 죽어간 주민들의 혼을 달래려고 술 한 잔 올리고 통곡한 것도 죄가 되어 신승빈은 이장직을 놓게 된다.(제주4?3유적Ⅰ. 제주도/제주4?3연구소. 2003. P377)
한라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 마을
4·3 사태 때 군인 한 두 명 다쳤다고
마을 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뺏아 갔을까
돌무더기 속에 곱게 삭아 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 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양영길, '애기 돌무덤 앞에서' 전문)
섣달 열여드레 그날 해질녘이 다 되어서 군인들이 두 대의 스리쿼터에 분승해서 떠난 다음에도 마을사람들은 그대로 운동장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조회대 뒤 우익가족이 있는 데로 몰려 살아남은 가족끼리 서로 붙안고서 마을에서 들려오는 타죽는 소 울음보다 더 질긴 울음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내 입에서도 겁먹은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운동장의 진창흙은 함부로 내달린 스리쿼터 바퀴자죽으로 여기저기 무섭게 패어 있고, 벗겨진 만월표 고무신짝들이 수없이 널려 있었다. 그 위로 불타는 마을의 불빛이 밀려와 땅거죽이 붉게 물들었다. 교실 창이 이내 벌개졌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하늘 가득히 붉은 노을처럼 번져가는 불기운에 압도되어 더욱 서럽게 곡성을 올릴 뿐 누구 하나 울타리께로 가서 불타는 마을을 직접 내려다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현기영. 순이삼촌. 1978. 창작과 비평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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