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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다 이룬 꿈 다시 피어나리라 : 좀녀 투쟁 _ 송시우 (38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2-02-09 조회 1412
 
못 다 이룬 꿈 다시 피어나리라.
- 임신년(壬申年) 제주좀녀투쟁(濟州潛女鬪爭)-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1931 ~ 1932, 횟수로는 2년이지만, 한 겨울에 걸쳐서 제주도 구좌, 우도(牛島), 성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항일투쟁을 해녀항일운동, 혹은 구좌해녀항일투쟁등으로 불리는데,  ‘임신년(壬申年) 제주좀녀투쟁(濟州潛女鬪爭)’이라 함이 어떨까 싶다. 일제의 폭압에 대항한 민초들의 항거였고, 본토와의 왕래가 드물었지만 공동체적 질서 속에서, 1920년대 유입된 신사상(新思想)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처지 조건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벌인 자주적 투쟁이었기에 해녀(海女)라는 말보다 제주 고유어인 좀녀, 좀란 단어를 사용해야 할 것 같고, 단순한 경제투쟁으로 여기는 것보다 일제강점기 준비(準備)된 항일투쟁으로 정치투쟁으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의 어떻게 보면 예비투쟁(豫備鬪爭)이었지 않았나 싶다.

당시 거사 이전, 19311220일 좀녀(潛女)들의 합의한 요구사항을 보면(현상호, 1931년 제주도 해녀투쟁의 사실. 1950.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 재인용)
1) 모든 어획물은 현품으로 판매하고 생산자의 의사에 따라 입찰, 경매하라.
2) 전복의 지정상인 고평호(高平浩)를 즉시 파면, 처벌하고, 건복(乾鰒)은 즉시 조합의 책임하에 판매하라.
3) 1931년도의 하도리에서 생산된 전복 가격 전액을 1930년도의 생산액에 준하여 보상하라.
4) 감태(甘苔)에 대한 재평가 판매를 즉시 실시하라.
5) 악질상인과 결탁한 조합서기를 즉시 파면, 처벌하라.
6) 조합원을 기만하는 관제조합을 반대한다.
였는데, 이러한 요구사항이 193217일 세화 오일장 날에 봉기 후, 해녀어업조합장직을 겸임한 구좌면장 강공칠(康共七)과의 면담에서는 감태(7), 생복(6), 조합(5)에 대한 요구조건으로 18개항으로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조선일보 1932. 1. 14).
그런데 2차 봉기(1932112)에서 도사(島司) 다꾸치(田口禎熹)와의 담판에서의 요구사항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박찬식.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1995.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 재인용)
1) 일체의 지정판매를 절대 반대한다.
2) 일체의 계약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하도록 하라.
3) 미성년자와 40세 이상의 해녀들에게는 해녀조합비를 면제하도록 하라.
4)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입어를 못하는 자에게는 조합비를 면제시켜라.
5) 출가(出稼)증은 무료로 내어 주어라.
6) 총대(總代)는 마을별로 선출하도록 하라.
7) 조합의 재정을 공개하라.
8) 악덕상인을 옹호한 마스다(升田)서기를 즉시 면직시켜라.

이러한 1, 2차 봉기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이때 봉기를 주도했던 김옥련 독립운동가의 회고록 해녀항일 투쟁의 진상에 의하면, ‘해녀사건 후 보상금도 어느 정도 받고 해녀들의 채취한 물건들도 제값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해녀사건은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응한다!’의 결연한 의지가 요구사항 몇 개를 수용한다고 꺼지겠는가? 고양된 민권(民權)의식과 자주적 사상이 삶의 지표로 자리 잡았음은 물론이요, 우도투쟁과 이후 불어 닥친 검거 선풍에서 투쟁의 주역인 ‘좀들이 항의하고 격렬 저지투쟁을 벌인다.


현재 향토사학가들은 일제강점기 3대 항일투쟁으로 위의 투쟁을 꼽고 있는데 그 이유는
1) 여성집단에서 주도한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었다는 점. - 우리나라 민족운동사상 여성집단에 의해 연인원 17천여명이 줄기차게 투쟁을 벌인 사례가 없다.
2) 역사상 국내 최대 규모의 어민투쟁이었다는 점. - 우리나라 어민투쟁사에 있어서 그들의 이해 요구를 걸고 대규모 투쟁을 벌인 사례가 없다.
3)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서 발발했던 3대 항일운동의 하나였다는 점. - 무오년(1918) 법정사 항일항쟁과 기미년(1919) 조천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투쟁이다.
4) 193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고 추정된다는 점. - 1929년 원산노동자총파업투쟁 이후, 항일투쟁에 있어서 1930년대 이후 대중적인 투쟁을 찾아보기 어렵다.
위의 네 가지 이유로 재조명(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되는 것은 바람직하나, 의도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거리를 두고 순수한 ‘좀들의 경제투쟁으로 혹은 항일운동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역사의 굴곡(屈曲)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더구나 1930년대 대규모 투쟁을 할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단순한 경제투쟁이라 할지라도 대규모로 진행(연인원 17천여명, 집회 및 시위가 238회 등)된 연원들을 어업과 관련된 이유로만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또한 일제는 이 ‘좀녀들의 투쟁배후를 캔다는 이유로 100여 명을 검속시키는데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치안유지법 위반이었고, ‘좀녀투쟁으로 실형을 받은 사람은 없다 한다(등영장(藤永壯). 1932년 제주도 해녀의 투쟁. <조선민족운동사연구. 6. 1989.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 재인용).
자료의 불비속에서도 제주의 ‘좀녀투쟁을 고비로 하여, 결국 일제는 제주도 항일운동의 세력들을 공산당 재건운동을 시도한 것으로 몰아붙여, 그것을 구실로 항일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하였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박찬식. 제주해녀의 항일운동. <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1995.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 재인용).
또한 ‘ 19308월에 구좌면 세화리 해안에서 김순종, 김시곤, 오문규 등 혁우동맹원(革友同盟員)들이 집합하여 소년 교양에 관한 비밀협의를 하였다. 신재홍, 오문규, 김순종, 김시곤, 한향택은 모여 농촌청년 해녀의 획득 운동과 방법에 대하여 협의하였고, 193010월에 신재홍, 한향택, 채재오 등과 같이 한향택 방에서 집합하여, 당시 문제 중에 있던 성산포 해녀 사건에 비판하고 해녀 자신의 노력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선동할 것을 협의하고, 동년 11월 초순에 구좌면 세화리 하도리 사이 모래밭에서 신재홍, 문도배, 강관순, 김순종, 김시곤 등이 모여 그후 주의 선전의 방법에 대해 협의하였다(19321214일 동아일보. 이영권 제주역사기행 2004 재인용).’
'좀들의 요구조건이나, ‘좀녀수가(潛女歌, 해녀노래)’의 탄생 과정 등을 종합해 보면 혁우동맹의 활동 내용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혁우동맹(革友同盟)193031일 세화리의 문도배의 집에서 결성되었고, 1930920일 농촌청년, 해녀의 획득과 해녀 본위의 조합설립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해녀와의 관계수립을 목표로 한 방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혁우동맹은 동년 10월 성산포 해녀 사건에 격문을 살포하며 해녀쪽에 접근해 나갔었으며, 19311월 하순에 당시 전도(全島)적으로 공산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관계로 해체 협의가 진행되어, 혁우동맹은 결국 <조선 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가 결성된 후 얼마되지 않아 해산된다. 혁우동맹은 이에 따라 해산되었지만 전도적인 조직에 앞서 구좌면에서 좌익청년들의 결사가 존재(‘우리는 사회진화의 필연적 법칙에 순응하여 대중을 본위로 한 신사회 건설을 기함등의 강령을 가진 1920년 후반의 각종 청년회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음)하고 있었고, 혁우동맹의 활동은 그대로 구좌면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인계(引繼)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임신년(壬申年) 제주좀녀투쟁(濟州潛女鬪爭) 또한 연장선(延長線)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글 쓰면서 참고한 책>
제주도지 제2. 2006 제주도
제주항일독립운동사. 1996 제주도
제주역사기행. 2004 한겨레신문사
 
* 제주 고유어로는 '해녀'라는 말을 안 쓰고, 아래아 표기하고 '좀녀', '좀수'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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