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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자 고 김봉환열사 장례투쟁(1991년 1월)
한국은 산업재해 발생률 세계 1위로 ‘산업재해 왕국’, ‘직업병 박물관’으로 불려왔다.
원진레이온의 직업병 집단발병 사태는 경제개발을 위해 모든 희생을 강요해온 20여 년간의 축적된 모순이 중점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것으로 한국 직업병 문제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 원진레이온은 이황화탄소, 황화수소 등 각종 유해 산업폐기물을 대기 중으로 방출할 뿐 아니라 유해폐수를 방출하여 주민들에게 각종 신체적·재산적 피해를 주고 있었다.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피해자들은 이미 1981년부터 보상요구 투쟁을 벌여왔고 1988년 들어서는 노동자건강 단체들과 함께 진상조사 및 직업병 규탄 투쟁을 벌여왔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정부 산업재해 직업병 정책의 일대 전환 △원진레이온 직업병 참사에 대한 제도적 개선책 강구 △원진레이온 직업병 참사 재발 방지 근본대책 수립 등을 요구했다. 그리고 ‘원진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 청원에 즈음한 기자회견’을 열어 “원진 직업병 참사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근본적인 직업병 예방대책 수립 △국내 인견사 제조의 안정화와 작업장 문제의 근본대책을 위해 민영화가 불가피하다면 반드시 ‘노동자가 추천하는 전문팀에 의한 시설조사 및 연구’, ‘방사 시설 자동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직업병 문제로 다른 사업장 취업이 불가능하므로 현직 노동자에 대한 고용보장 및 승계대책 마련’ △개악된 직업병 인정 기준을 실질적인 치료가 보장되도록 즉각 개정 △원진레이온 노동자들 이직 시 평생 건강관리 수첩 제도 시행 △객관적이고 공정한 직업병 판정을 위해 회사측과 피해자들이 추천하는 동수의 의사로 구성된 ‘직업병 판정위원회’ 부활이 필요하다고 제기했다.
이들은 앞서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진레이온 노동자들과 직업병 환자, 그리고 보건의료인을 중심으로 1991년 들어서만도 3차에 걸친 ‘산업재해 추방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했고, 노동부와 법정관리인인 산업은행 등을 수차례 항의방문 하는 등 줄기찬 노력을 경주해왔다. 또 5월 15일부터 6월 말까지는 직업병 환자들이 중심이 되어 탑골공원, 청량리 역전 및 전국의 산업현장에서 원진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서명 작업도 진행해 서명자 수가 한 달 남짓 만에 115,200명에 이르러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1992년 7월 22일)
원진레이온에서 1977년부터 일하다 1983년 직업병 증상이 나타나 사직한 김봉환씨(1938년생)가 1991년 1월 5일 사망했다. 1977년 12월 22일 원진레이온(원액2과 근무)에 입사한 김 씨는 6년만인 1983년 9월 20일 고혈압과 말더듬 등으로 몸이 약해져 퇴사했다. 이후 1984년 10월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했으나 1986년 말 직업병 증상이 나타나 경비직마저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90년 9월에 쓰러져서 말을 더듬기 시작, 한의원 등에서 치료를 받았다. 10월경 직업병으로 의심해서 검진을 시작하고 ‘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원노협)’에 가입했다. 그해 11월 26일 사당의원에서 CS2 중독의증과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다음날 산업재해 요양 신청을 하려 했지만 회사는 유해하지 않은 부서에서 근무했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노동부 역시 계속 승인을 미뤘다.
그러던 중 1991년 1월 5일 노동부에서 직권으로 요양신청서를 발급하겠다고 경력증명서, 소견서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그날 외동딸의 고등학교 입학 등록금을 내고 온 뒤에 쓰러져 밤 10시 30분경 사망하고 말았다. 직접사인은 뇌출혈이었다.
고 김봉환 산업재해 열사가 사망한 다음 날인 1991년 1월 6일 원노협, ‘원진레이온 직업병피해자 및 가족협의회(원가협)’, 구리노동상담소를 중심으로 전노협, 노동과건강연구회 등 10개 단체는 곧바로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망 사건 대책위원회(대책위)’를 구성했다.
대책위에 참여하는 단체는 최소한 대표자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서 홍보 선전과 집회 동원에 적극 결합하고, 가능한 실무역량을 파견할 수 있도록 했다. 대외협력위원회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국민연합, 조직위원회와 홍보위원회는 전노협과 서노협, 상황실은 서울노동운동단체연합이 맡았고, 상근 실무역량을 거의 파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노협, 서노협,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서울노동운동단체연합 등이 반상근 역량을 파견했다.
대책위는 1991년 3월 31일 장례투쟁을 전개하면서 4월 중순 원진레이온 고 김봉환 산업재해 열사의 직업병 인정 투쟁에 힘을 모으기 위해 장례위원회로 확대하기로 함에 따라 국민연합, 전민련, 학생 등 광범위하게 32개 민주사회단체 등을 포괄했다.
장례위원회는 성명서 5회 발표, 소식지 11회 제작·배포, 전단·포스터 제작·배포, 스티커 제작·배포, 기자회견 3회, 21회 집회를 벌이며 투쟁사례 발표, 명동성당 앞 가두선전전 등을 실시했다. 매일 저녁 7시 원진레이온 정문 앞에서 평균 3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정기 규탄 집회와 7차에 걸친 국민대회도 개최했다. 1991년 5월 1일에는 고 강경대 폭력 살인 규탄과 원진레이온 독가스살인 규탄대회, 5월 11일에도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대회 등 규탄 집회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이러한 다양한 투쟁과 선전활동을 통해 직업병 문제가 전체 노동자 삶의 환경에 대한 문제로 제기되었고 직업병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장례위원회는 7차에 걸친 집회 등을 공세적으로 주도하면서 회사를 부분적으로 제압해 최종합의를 끌어내는 데 큰 힘을 발휘했다. 이밖에도 회사 항의방문 세 차례, 의정부 지방노동사무소 항의방문을 두 차례 진행했다. 고 김봉환의 죽음을 알리며 ‘회사측의 성실한 해결 자세 촉구, 작업환경 개선 및 공해 추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도 전개했는데, 도농·미금지역 13명, 구리․미금․남양주 지역 222명, 기타 135명 등 총 490명이 동참했다.
1991년 3월 31일 장례투쟁이 몇몇 일간지에 보도된 것 말고는 원진레이온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다가 적극적인 언론홍보 활동의 결과로 1991년 4월 25일 이후 모든 일간지와 주간지 등에 원진레이온 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는 강경대 열사 사건 이후 사회적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직업병 피해자 고 김봉환 산업재해 노동자장’은 1991년 5월 21일 오후 1시 30분 원진레이온 정문 앞에서 발인식, 오후 4시 30분 구리시 시민체육공원에서 노제를 진행한 뒤 오후 6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하관식을 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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