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⑯ 노동자들의 정치적 진출 한국사회주의노동당과 민중당 인민노련 내부에는 기존의 지역 중심적 활동을 고수하는 〈노동자의 길〉 발간그룹과 사회주의 직접선동 및 전국적 전위조직 건설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 발간그룹 등 2개의 진영이 형성돼 있었다. 1989년에 조직사건으로 노회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지도부가 구속됐고 주대환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부(이른바 ‘신중앙’)가 구성됐다. 주대환의 신중앙은 전위당 건설을 명분으로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들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1991년 8월에 삼민동맹, 노동계급 등의 그룹들과 통합해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한사노당 창준위)를 구성했다. 유력한 비합법 조직 중에서는 사노맹과 제파PD그룹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규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곧 주대환의 ‘신노선’(또는 ‘신전략’)이 제출되면서 합법적 노동자정당 건설을 조직노선으로 결정, ‘노동자정당 추진위원회’(노정추)라는 이름으로 공개 공간에 나오게 된다. 어느 날 경기노련 사무처장이 토론을 요청했고 나를 포함해 2명이 토론 장소에 도착했는데, 김00, 홍00(만도기계에서 노조를 만든 장본인인 동시에 노조를 깬 당사자) 등 여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사노당을 추진하는 사람들이었다. 쟁점은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의 신노선은 공개적으로 당을 띄우는 것이었는데, 당시 합법정당을 추진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반대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사회주의 포기가 아니라 공개된 영역에서 당당하고 공개적으로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사노당 문제는 전노협 중앙위에서도 한차례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한사노당을 지지하는 동지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수준에서 논의를 마감한 것으로 기억한다. 구소련 붕괴와 사회주의 세력의 혼란 1991년 8월 소련 붕괴로 좌파운동진영은 근원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주대환의 신노선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신노선을 채택하고 공개 공간으로 올라온 노정추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규합해 1992년 1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한노당 창준위)를 결성했다. 기층의 좌파계열 지구당위원장들과 함께 소수 명망가 중심인 민중당 지도부를 당 안팎에서 압박하여 통합을 요구했다. 통합의 조건은 당명을 한국노동당으로 바꾸고 단일지도체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으며 사실상 흡수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이런 시도를 차단하려고 칼을 빼 들었고, 주대환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지도부를 안기부에서 구속한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한노당 창준위는 애초 목표와는 전혀 다른 조건으로 민중당과 통합하게 되었다. 당명과 지도부는 유지하는 상태에서 역으로 흡수 통합된 것이다. 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등록 취소됐다. 총선 직후에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당의 존폐가 거론됐으며 좌파진영은 재창당과 12월 대선 독자후보를 주장했다. 그러나 당권파는 진보정당 실험이 실패했음을 주장하며 ‘법적 해산’만이 아닌 ‘정치적 해산’ 결정을 통과시켰다. 진보정당을 통해서는 금배지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훗날 김영삼 정권 시절에 앞다퉈가며 집권당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더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정치적 행보를 보여줬다. 현재 주대환은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역사관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극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선본 운동 1992년 대선에서 민중진영은 또다시 비판적 지지와 민중독자후보론으로 양분되었다. 1992년에 구성된 백선본에는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 민중회의준비위원회(민중회의), 전국노동운동연합(전국노련) 등 4개 조직이 결합했다. 선본 구성은 각 조직에 고르게 안배되었다.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은 민중회의 오세철, 부위원장은 진정추 최윤, 사추위 김종석, 전국노련 한경남 등이 역할을 맡았다. 집행단위인 중앙선거대책본부장은 진정추 황선진, 부본부장은 사추위 김철수 등이 맡았다.  대학로 유세 _ 한겨레신문
백선본은 조직뿐만 아니라 정책에서도 5년 전(민중의 당)보다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대선 강령을 작성해서 선거에 임한 것도 성과로 볼 수 있다. 대선 강령은 크게 정치, 경제, 통일 강령 등으로 분류되었다. 정치 강령은 ‘민중대표자회의’를 최고 권력기관으로 하는 민중주체 민주주의 구현을, 경제 강령은 노동자 자주관리를, 통일 강령은 남북한 민중들이 주도하는 연방제 통일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백선본의 대선 강령은 내용의 충실성 문제와 관점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주의 조직들이 최초로 공동의 강령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다. 대선에 임하는 지향점도 5년 전(87년 민중의 당)과는 다르게 명확했다. 민중후보운동의 정치적 조직적 성과를 모아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대선 완주에도 결과는 참담 1992년 11월 올림픽공원 사이클경기장에서 민중후보 선출대회가 열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1만여 명이 모여 백기완 선생을 민중후보로 선출하고,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사회주의자들의 1차 당대회를 상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경기지역에서도 나를 포함, 수백 명의 동지들이 민중후보 선출대회에 참여했다. 1992년 백선본은 선거운동 방식에서도 좀 더 세련됨을 추구했다. 백발이 성성한 백기완 후보가 염색을 결심한 것도 획기적 일이 아닐까 싶다. 일부에서는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백선생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1992년 민중후보운동은 5년(87년 대선) 전보다 여러모로 발전했음에도 결과는 참담했다. 사퇴 없이 끝까지 갔다는 점에서도 5년 전과는 달랐지만, 그 결과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꿈이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결과를 초래했다. 선거가 끝난 직후 단병호 위원장이 백선생에게 인사 가자고 한다.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갔는데, 백선생은 선거결과에 따른 후유증으로 낙심하고 계셨고, 전노협을 포함한 노동자들에 대한 배신감에 엄청난 상처를 받으셨고 선생님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내 생전에 그렇게 많은 욕을 얻어먹어 보긴 처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