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선을 거부하며 걸었던 길
송시우(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부위원장)
여기는 4?3사건으로 마을이 전소되어 잃어버린 제주시 해안동 리생이 마을터이다.
3백여 년 전 설촌 된 이후 120여 호에 5백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평화롭게 살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독승물 등 생수가 도처에 넘쳐흐르고 수많은 학동들이 글 읽는 소리가 진수서당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4?3의 광풍은 이 마을이라고 비켜가지 않았으니 1948년 11월 20일 소개령이 내려지고 주민들이 미처 가재도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아랫 마을로 내려간 후 마을은 전소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이 와중에 50여 명의 주민들이 이슬처럼 스러져 갔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해안리에 축성하여 살기 시작한 이후 다시는 리생이 마을로 돌아오지 않아 지금은 잡초만 우거지고 빈 집터엔 대나무만이 지나간 역사를 얘기하고 있다.
여기를 지나는 길손이거나 찾아온 사람들이여 이곳에도 정다운 사람들이 오순도순 살았음을 기억하라. 뼈아픈 역사를 되새겨 보라.
다시는 이 땅에 4?3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2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사진은 http://cafe.daum.net/norae43에서)
재작년 6월에 ‘한라산 자락의 백성들’이란 주제를 가지고 몇 무리들과 사진으로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순례한 기억이 있다. 섬에서 민중적으로 삶을 엮어가는 노랫꾼 최상돈씨의 이끌림으로, 4•3민중항쟁 중 거의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두 장의 사진 현장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으로 제주시 외도동에서 산으로 걸었었다.
1948년 가을부터 ‘초토화 작전’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100여 곳이 되지만, 제주시 해안동으로 올라가면 ‘리생이’ 마을을 볼 수 있고, 정겨운 올렛길들 하며 어귓담, 통시, 대낭, 폭낭 거리, 먹는 물통 등이 가슴 아리게 했었다. 동네를 이뤘던 지역에서 ‘웃드르’로 가면 ‘모시 곡끄래 댕겼던’ 소로가 시멘트 포장길로 변해 버린 농로를 따라 1948년 단선을 거부하며 오갔던 그 길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붉은 덩어리’ 지경에서 선거만 끝나면 아무 일없던 것처럼 삶의 터전으로 돌아 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길의 숨결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었다. 약 300여 명이 그랬다 한다.
그러던 중 무자년 가을 소개령이 내렸고 마을 사람들은 ‘쇠촐’이나 양식을 거념해야 했기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닷가로 ‘소까이’할 순 없었고 근처에 있는 ‘궤’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을에 성을 쌓아 주둔했던 토벌대들은 산으로 피신해 버린 사람을 찾아 수색하던 중 섣날 그 어느 날 ‘곰궤’에 숨어있던 사람들을 그야말로 무참하게 학살해 버린 역사를 ‘잃어버린 마을’ 표석으로 감당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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