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의 목표와 요구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1992년 4월 2일 22차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ILO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 대표자회의에서 제출한 1992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의 투쟁계획을 검토했다.
전노협 중앙위원회에서는 세계노동절 기념대회가 하나의 행사가 아닌 1992년 상반기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의 과정에서 제기되는 노동대중의 요구와 지향을 포괄하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조와 명칭, 기념주간 등이 예년보다 후퇴한 측면이 있다고 제기했다. 그러나 이는 사업내용으로 보완하고 다수 대중을 민주노조 진영의 대열에 동참시킨다는 취지로 ILO공대위 대표자회의의 안을 대체로 추인했다.
그리고 ILO공대위 대표자회의 시안 중 ‘노동절 기념대회’를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로 명칭을 바꿀 것을 ILO공대위 기획회의에 제안키로 하고, 세계노동절 투쟁의 조직화 방안은 전노협에서 마련하기로 했다. 이후 4월 11일 ILO공대위 대표자회의에서 1992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계획을 확정했다.
1992년 4월 11일 ILO공대위 대표자회의에서는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첫째, 세계노동절을 맞이하여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기본권 수호, 그리고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해온 전 세계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투쟁 정신을 기린다. 둘째, 1992년 노동절대회는 단순한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해당 시기를 전후한 노동대중의 요구와 지향, 제반 사업과 투쟁을 노동절이라는 계기를 통해 종합해내고, 이후 상반기 임금인상 투쟁의 승리와 노동악법의 실질적 개정을 위한 힘찬 투쟁을 결의해낸다는 기본관점을 견지한다. 셋째, 1992년 노동절을 즈음하여 당면 과제인 총액임금제를 통한 임금인상 억제정책 분쇄와 1992년 임금인상 투쟁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ILO기본조약 비준 촉구 및 노동법 개정, 고용안정, 노동운동 탄압 분쇄 등을 중심요구로 하여 대중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넷째,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의 대중적 성과를 수렴하고 제조업과 사무직 노동자 간의 연대를 강화하며 지역공대위 구성을 촉진해 민주노조진영의 조직적 단결을 강화한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의 주요 투쟁구호에 담긴 핵심기조는 전국노동자의 총단결 투쟁을 통해 총액임금제를 분쇄하고 임금인상 투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이는 정권과 자본의 민주노조에 대한 법․제도적 탄압을 투쟁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민주노조의 단결된 의지의 표현이었다. 특히 정권과 자본이 ILO 등 국제기구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을 활용해 민주노조 진영은 국제수준에 맞는 노동법의 개정을 전면적으로 요구했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조직화 활동
대회는 총액임금제 저지 및 임금인상 쟁취, ILO 기본조약 비준 촉구 및 노동악법 개정, 고용보장 요구, 노동운동 탄압 분쇄를 핵심내용으로 해서 ILO공대위가 주최·주관해 금요일인 5월 1일 비휴무사업장 기념식과 지역 차원의 기념식을 하고 5월 2일에는 전국적 기념대회로, 수도권 중앙대회와 지역 동시다발 대회를 열기로 했다.
전노협은 순회간담회를 통해 총액임금제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시키고, 총액임금제 분쇄투쟁과 결합한 공동 임금인상 투쟁과 아울러, ILO지역공대위 사업의 활성화와 노동절대회의 조직을 독려했다.
전노협은 1992년 상반기 핵심 투쟁인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의 연속성을 보장하고, 민족민주 진영의 새로운 결집점을 만들어 낸다는 전제하에 노동절 기념주간을 선포했다. 이기간 동안에는 공연과 강연회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정권과 자본의 노동정책에 대한 허구성을 폭로하는 한편, 박창수 위원장 추모투쟁과 각 단위사업장․지역 차원의 선동 경진대회를 통해 조합원의 투쟁 의지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리본달기’, ‘각 단위사업장 현수막 걸기’, ‘동시 출퇴근’, ‘작업환경 개선의 날’에 현장청소, 건강달리기, 건강체조 등 단위노조에 맞는 다양한 준법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기념주간 사업은 △4월 25~26일 세계노동절 기념공연(민예총 주최, 서노문협 주관) △4월 27일 작업환경 개선의 날(단위사업장과 지역의 실정에 맞게 준법행동) △5월 1일 단위사업장 및 지역 차원의 기념대회(중식시간을 이용한 총회) △5월 2일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으로 설정했다.
전노협은 정책실에서 노동절 기념주간 현장토론 지침 ‘1992년 노동절 전노협 정책자료집’을 발간해 단위사업장과 지역 차원에서 투쟁 결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또 지역에서는 선동경연대회, 문화행사 등을 통해 투쟁 분위기를 높여나갔으며, 단위사업장에서는 슬라이드와 비디오 상영, 현장체조, 건강달리기, 건강체조, 리본달기, 총액임금제 분쇄 결의를 담은 현수막 걸기를 통해 조합원들의 투쟁 의지를 높였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의 진행
기념대회의 행사 전체를 총괄 기획하는 행사준비반은 반장을 중심으로 기록팀, 진행반, 문화선동대(문선대), 무대설치팀, 일반설치팀으로 구성했고, 문선대 산하에는 풍물, 노래, 율동, 사진, 기동선동팀 등이 있었다.
행사준비반의 제반 사업은 반장, 각 반 책임자(문선대는 문선대장과 각 선동대 대표가 참여)로 구성된 기획회의에서 논의․조정․결정했으며, 각 반의 세부업무까지도 기획회의에서 담당했다. 이외에 행사준비반의 제반 실무를 담당하는 각 반은 반장을 중심으로 고유의 업무들을 집행했다.
4월 25일 노래문선대 40명(서노협, 인노협, 병원노련, 전문노련, 민출노협 등), 풍물 문선대 28명(서노협, 인노협, 전문노련, 건설노련, 택시노련 서울지부 등), 율동 문선대 12명(서노협, 병원노련, 인노협 등) 등 총 80여 명이 참가해 문선대 총연습을 했다.
수도권 기념대회는 수도권 노동자 대중들의 광범한 집결을 이루어 내고, “최대한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치른다”는 전술적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노동자들의 위력을 떨침과 동시에 대회의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질서유지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제기됐다.
질서유지대는 총대장을 중심으로 서울 1대, 인천 2대, 부천 3대, 경기 4대, 성남 5대, 그리고 특별대를 구성·운영했다. 질서유지대의 특별대는 업종회의와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조직된 단위다. 이렇게 구성된 질서유지대원은 총 100명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절대회 각 주관조직의 공식적인 집행단위의 결의를 통해 조직됐다.
선전홍보사업으로는 대회 포스터(2종 3천 부), 조합원용 선전물(8종 8만 부), 대국민 선전물(3만5천 부), 대회 안내전단(2만 부)을 제작하는 한편 선전물 주요구호에 총액임금제 철회(임금억제정책 분쇄), 고용안정 보장, 구속자 석방, 해고자 복직, 노동악법 철폐 등의 내용을 담았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전국 현황
5월 2일 진행한 수도권 중앙대회에는 조직노동자 13,000여 명을 포함 2만5천여 명이 참가했다. 사전행사에서는 경기남부 롯데제과 평택지부, 서울지역의보노조, KBS노조의 투쟁사례 보고를 진행했다. 15시35분부터 양규헌 경기노련 의장의 사회로 본대회가 시작됐다. 주최단체인 전국공대위, 수도권공대위, 업종회의, 인천공대위, 부천임대위, 성남노련, 경기노련 소개에 이어 권영길 전국공대위 공동대표의 대회사와 태재준 전대협 의장의 노학연대투쟁 결의와 총액임금제 분쇄 및 1992년 임투승리 결의, ILO기본조약 비준촉구 및 노동법개정 투쟁 결의, 고용안정 쟁취를 위한 결의발표가 이어졌다. 문화상징의식으로는 박창수 열사 1주기를 맞아 1992년 임투 승리 및 총액임금제 분쇄, 노동악법 철폐, 민주노조 총단결 등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표현했다. 17시 40분경 대회를 마무리하고 대오별로 집회 후 해산했다.
광주지역은 광주공대위와 광주연합 주관으로 5월 1일 오후 6시 30분 YWCA 대강당에서 진행한 행사에 19개 사업장 1,000여 명이 참여했다. 금호타이어, 대우전자 광주지부 등 대공장 노조가 조직적으로 참여해 행사를 더욱 뜻깊게 진행했으며, 대회가 늦게 끝나 홍보전 없이 해산하고 단위사업장별로 단합대회를 했다.
‘전북지역 ILO 공대위 준비위’(전북노련, 전교조 전북지부, 병원노련 전북지부, 전북지역 의보노조 등이 구성)가 주관한 전북지역 대회는 조합원과 학생 1,500여 명이 참여했다. 대회가 끝난 뒤뉴코아 앞까지 가두행진을 하며 선전물 1만 부를 배포했으며, 차량 3대를 동원해 대국민 선전전을 수행했다.
대구지역은 5월 1일 대우, 대동노조 조합원들이 임금인상 투쟁 승리 등반대회를 마친 뒤 200여 명이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이튿날 오후 3시에 경북대 야외공연장에서 30개 사업장 600여 명과 학생 700여 명 등 총 1,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대회를 열었다. 집회는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했고, 대회 후 거리로 진출해 6시부터 9시 30분까지 시위와 홍보전을 가졌다. 경찰병력은 마산과 울산으로 차출된 탓에 가두시위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
부산지역은 부산·양산지역 ILO공대위가 주관해 오후 2시에 부산대학교에서 대회를 진행해 노동자 1,500명을 비롯 3,000여 명이 참여했다. 집회 후 가두진출 봉쇄로 교문을 사이에 두고 공방전을 전개했다. 저녁 이후 동의공전에서의 가두시위에 1,000여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이 참가해 도로를 점거하고 “총액 분쇄! 노태우 퇴진!”을 외치다 강제해산당했다.
마창지역은 마창노련, 마창지역 업종회의, 한국노총 금속노련 경남지역본부 주관으로 오후 2시, 창원 올림픽공원에서 50여 개 노조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회를 열었다. 1부에서는 총액임금제 분쇄와 임투 승리를 결의하고, 2부에서는 ‘이제 우리는’이라는 노래 선동극을 공연한 뒤 가두 홍보전을 진행했다.
울산지역은 현총련 주관으로 오후 1시 일산해수욕장에서 21개 현대그룹 계열사노조 조합원 8,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노동절 기념대회와 현총련 출범식을 하고 사업장별로 마무리 집회를 했다.
대전지역은 대전지역 제조업노조회의, 대전․충남업종회의, 택시노련 대전지부가 주관해 오후 2시 대전공과대학교 민주광장에서 진행했다.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1부에서는 각 노조·단체의 현황 소개에 이어 “민주노조 총단결”을 외친 동일계전노조 윤희종 위원장의 선동 연설, “총액임금제 철회”에 대한 대전생명노조 신태식 위원장의 연설에 이어 택시노련 정진적 지부장이 “'92택시 임투 현황”을 주제로 연설했다. 대회가 끝난 뒤 6시부터 2시간 동안 거리 홍보전을 펼쳤으며 저녁 8시부터는 도로를 점거하고 정리집회를 했다.
이밖에도 구미에서는 5월 1일 기독교회관에서 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식을 했고, 포항에서는 5월 2~3일 진전분교에서 10개 노조 50여 명이 참가한 수련회에서 기념식을 했다. 진주에서는 5월 1일 경상대학교 운동장에 1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과 체육대회를 했다. 원주에서는 5월 1일 원주공대위 주관으로 200여 명이 지역 차원의 기념식을 하고 5월 2일 수도권 중앙대회 출정을 결의했다. 거제에서는 4월 30일 2,500명이 참가해 중식집회 형식으로 기념식을 했다. 춘천에서는 5월 2일 AMK 노조원 200여 명이 참가해 기념식을 했다.
세계노동절 기념대회 평가
1992년 대회는 준비 주체가 명확하지 않아 준비과정에서 혼란을 초래했다. 1991년 11월 11일 전국노동자대회는 ILO공대위가 주최해 각 업종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데 반해 1992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는 주최와 주관단위 결정에 혼란이 있었고, 수도권의 지역공대위가 주관하다보니 업종이 분명한 주관단위로 부각되지 못함에 따라 업종의 사전조직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회 조직화의 중간 결집점으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공연을 계획했으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투쟁 일정과 중복된 탓에 취소됐고, 이로 인해 각 조직의 사전조직화 계획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또 ILO공대위와 각 지역 공대위에 소속된 단체인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는 대회 집행체계에서 빠지는 바람에 준비과정에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단지 대회 당일 참여하는 것에 그쳤다. 한편 준비과정에서 전노협․업종회의가 공동으로 문화단위를 구성하고 대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은 ILO공대위 활동의 모범적 사례였다.
1992년 4월 28일 수도권 대표자회의에서는 장충단공원으로 집회 장소를 고수하기로 하고 대회 성사를 최우선의 목표로 결정했다. 이와 별도로 대회의 원천봉쇄에 대비해 대회 성사를 위해 비공개 장소를 준비했다. 그러나 경찰측은 완강하게 불허 방침을 고수했다. 대책 마련을 위해 4월 29일에 소집한 비상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경찰의 불허 방침으로 장충단공원에서 집회 성사가 거의 불가능하며 현재의 조직력과 투쟁력으로는 원천봉쇄를 돌파, 항의투쟁을 벌일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당일 원천봉쇄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항의투쟁으로 대응해 정치적 효과를 확보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한국노총이 장충체육관으로 장소를 옮길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대위측이 비공개 전술을 사용하여 대회를 제2의 장소로 옮긴다는 것은 정치적 효과 면이나 대중적으로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공개적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결국 대회는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진행했지만, 장소 결정 과정의 문제가 이후 주요하게 지적됐다.
대회에서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의 연설을 뺀 결정 역시 조합원 대중의 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지도부가 행진보다는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비중을 두다 보니, 수배 상태인 단 위원장의 참석은 공권력 침탈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대회 장소가 변경됨에 따라 애초의 행진계획도 수정되면서 수세적인 대국민 선전전으로 대체됐고, 이에 따라 지도부에서 조합원의 투쟁 열기를 반영해 사전에 치밀하게 행진계획을 준비하지 못한 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1992년 노동절대회는 미가입노조, 중간노조,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동시에 ILO공대위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된 반면, 선진노동자에게는 매년 해왔던 일회성 집회라는 상반된 평가가 나왔다. 실제로 2만여 대중의 참여와 세련된 문화행사 등 열기 있는 대회 분위기가 대중에게는 자신감을 주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지역 또는 단위사업장에서 1992년 상반기 투쟁 전선을 힘있게 돌파하고 있지 못한 간부나 선진노동자에게는 일회성 집회에 불과했다. 상반기 투쟁 일정 속에서 노동절대회가 자리 잡지 못하는 한 선진노동자들에게 지역․단위사업장의 투쟁과는 별개의 집회와 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또 각 지역에서는 대회의 투쟁 결의가 추상적이고 선언적이었다는 공통된 평가를 제기했다. 이는 대회를 전후한 투쟁을 대회 일정 속에 통일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점과 투쟁 조직화의 성과로 노동절대회를 조직하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1992년 상반기 계속된 탄압 속에서 위축됐던 노동진영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력한 조직 대오를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총액임금제 분쇄투쟁의 결의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대회였다.
한편 대회 재정수입은 1,279만 6,000원(조직별 분납 및 모금)이었으며 1,295만 원의 예산 총액 중에서 실제 집행총액은 934만 3,000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