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민주주의: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콜린 크라우치 지음, 미지북스 펴냄, 2008
노동자들이 만든 민주주의 지키기
민주화 이후에 민주주의는 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걸까? 우리는 이미 20년 전에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민주화의 물결은 사회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나팔수와 하인 노릇을 하던 자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굳건한 요새를 유지하고 있다. 형식적 민주화와 정권교체는 경험했지만, 경제 분야에서 민주주의는 거꾸로 가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은 20년 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현대판 노예제나 다름없는 비정규직 문제는 단결과 연대라는 노동자계급의 정신에 어두운 그림자를 간간히 드리운다. 설상가상으로 10년을 벼려온 우파 정권의 권토중래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욱 가파르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하다.
『포스트민주주의』에는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저자 콜린 크라우치는 2차 대전 후 황금기를 이루었던 약 25년간의 민주주의 시대가 마감되고 ‘포스트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상황에 대해서 경고한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형식은 유지되지만, 그 실 내용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단순히 자유 선거와 같은 제도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사실상 민주주의의 역사는 계급정치의 역사였고, 20세기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연대와 계급에 기반한 강력한 정당이 총자본으로 하여금 민주주의적 프로그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급격히 글로벌화 되고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기업의 힘이 막강해진 반면 노동자 계급은 수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점차 약화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치판도 뒤집어졌다. 고전적인 계급 정당 모델이 붕괴되었다. 정당 중심부에서 외곽에 이르기까지 <정당지도층-활동가-당원-유권자>로 구성되던 정당의 동심원 모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좌파 정당은 충성스러운 옛 지지층보다는 광범위한 유권자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열심히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왔다. 그 사이에 여론전문가들, 정책전문가들, 기업로비스트들이 끼어들어 똬리를 틀었다. 정당은 일군의 엘리트들의 타원형 모델로 변했다. 정당들이 주장하는 것들도 좌우를 막론하고 비슷비슷해졌다. 이제 민주주의는 이념이나 정책이 아니라 이미지와 마케팅 기법으로 가득 찼다. 유권자는 무관심하고 냉담하기까지 하고, 이민자와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격렬히 공격하는 극우파들이 갑자기 대중의 인기를 얻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실로 민주주의에 위기가 다가온 것이다.
민주화에 이어 탈민주화도 압축적으로 겪는 한국 사회
저자가 소개하는 사례들은 지난 30년간 주로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한국은 단지 민주화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탈민주화의 경험도 더 압축적으로 겪게 될 뿐이다. 시민의 권리가 기업 이윤을 위해 팔려 넘어갔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아니면 경제가 나빠지고 기업들이 이탈한다는 논리가 압도했다. 꾸준히 진행된 규제완화, 민영화, 감세 등과 같은 정책은 시민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할 국가를 무기력한 바보로 만들었다. 교육, 의료, 전기, 가스, 물이 시장 논리로 편재되면서 경제적 불평등이 시민의 보편적 권리에도 적나라하게 반영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목도하고 있는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적법하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저자는 포스트민주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선 기업의 지배력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제도적으로 재계와 정계간의 인사이동을 제한해야 하고, 그들의 로비범위를 축소시켜야 한다. 또 저자는 과거의 정당 정치 모델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정당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단, 정당을 감시하고, 압박하고, 이용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정당을 버린 채 각개의 운동만으로는 기업의 거대한 로비력에 뭉개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과거 노동자들이 맡았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파가 정체성의 정치를 버린다면, 극우파가 그것을 훔쳐 갈 것이다. 이주노동자와 조직된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공격과 분노라는 형식으로 말이다.
지은이 _ 콜린 크라우치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공공정책과 노동 시자의 변화 문제를 연구해왔고, 유럽의 정치적 이슈들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저자가 최초로 제기한 ‘포스트민주주의’ 문제는 서구 정치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촉발했다.『계간정치Political Quarterly』의 편집장이며, 영국학술원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회원이다. OECD의 '공공관리와 복지지향적 영역개발이사회'의 자문 위원이며, 현재 워릭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정치학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Capitalist Diversity and Change: Recombinant Governance and Institutional Entrepreneurs (2005), Social Change in Western Europe (1999), Industrial Relations and European State Traditions (199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