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헌의 ‘내가 살아온 길’ ㉑
전국적 투쟁전선 구축하며 전노협 강화
대중투쟁 활발했던 1994년 1994년 임금인상과 단체협상 투쟁이 시작됐다. 1994년 임단투는 어용 노총 타도와 전노협 강화, 그리고 민주노총건설에 초점을 맞추는 한편 조직 강화와 해고자복직 투쟁을 위해 전국적인 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특히 조직 강화사업은 ‘전노협 중심론’ ‘노동운동위기론’ 등과 맞물려 있는 중요한 노선상의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전노협은 1992년부터 조직 규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입 조합원 숫자로 평가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전노협을 유지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기본 동력이 매우 중요했다. 1994년 임단투는 전노대와 함께 철도·지하철 등 궤도 노동자들의 연대 파업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대중투쟁으로 전개돼 노동조합운동의 침체국면을 극복할 수 있었다. 쟁의 건수도 1993년 132건보다 100여 건이 많아 전반적으로 투쟁이 활성화됐고, 대다수 사업장에서 노조 간부들만이 아니라 다수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이 전개됐다. 전지협을 중심으로 전개된 궤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자체가 운동사 측면에서도 획기적이었다. 요구와 일정의 통일을 바탕으로 공동투쟁의 모범을 창출한 투쟁이었다. 한진중공업, 금호타이어, 대우기전 등 대구 3사, 울산의 현대중공업노조도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완강하고 비타협적인 대중투쟁은 김영삼 정권의 본질을 폭로해 냄으로써 정치의식 강화에도 기여했다. 전국적으로 한국노총 탈퇴운동을 확산하며 대중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노선을 강조해 나갔다. 그 와중에 지역별로 전노협 가입사업도 진행돼 16개가량의 사업장이 신규 가입하기도 했다. 가입조합 수가 많다고 할 수는 없으나 조직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규 가입은 가뭄에 단비 같았다. 
전해투의 목숨건 단식투쟁…정권은 외면 개혁을 전면에 걸고 김영삼 정권이 등장하자 군사 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들은 복직투쟁에 나섰다. 전국구속·수배·해고노동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전해투)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들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1993년 9월 11일 단식에 돌입했고, 뒤늦게 나도 1주일 동안 단식에 동참했다. 마포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며 진행한 단식은 30여 일이 지나고 있어서 쇼크사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전노협 직무대행을 맡고 있던 나는 배일도 전해투 위원장과 함께 이인제 노동부장관을 찾아갔다. 인권변호사까지 하며 개혁의 아이콘이라고 자처했던 이인제 장관과는 그가 국회의원이던 시절부터 안면은 있었다. 그가 안양지역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당사 점거 투쟁으로 얼굴을 익힌 정도다. 배일도 위원장과 장관실을 찾아가 문민정부의 노동정책을 비판하며 “군사 정권하에서 피해당한 전해투 동지들이 사활을 건 아사 단식을 하고 있는데 모두 죽이려는 거냐?” 항의하고 “빨리 해고자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인제 장관은 뜬금없이 “양위원장이 이전 정부에서 빚어진 문제를 우리(문민정부)에게 해결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부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여유를 갖고 고민해야 할 사안이라며 덧붙이는 말이 “전노협이나 양 위원장이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조만간 전노협은 전노협 이념에 맞는 정당을 만들 것 아니냐”는 것이다. 지지하지도 않으면서 왜 부탁을 하러 왔냐는 식이었다. 같이 배석한 노동부 국장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정상적 대화가 어렵다는 걸 느꼈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어서 장관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는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후 투쟁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당신들의 태도를 확인하러 온 것”이라 말한 뒤 “그래도 한때 민변까지 해 먹은 장관으로서 기본적인 양심과 인권의식은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꼴통 관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관료들과 얘기하는 것보다 개와 대화하는 것이 훨씬 편하겠다”고 했다. “관료들과 대화를 하려니 웬만한 인내 없이 대화하기 어려우니 조속한 시일 내에 전해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모든 투쟁수단을 동원해서 싸울 것이다. 그렇게 알라”고 하고는 배일도 위원장과 함께 장관실을 나왔다. 
해고무효소송, 법보다 센 전노협 입증한 꼴 1991년 해고에 대한 무효소송이 진행됐다. 대우전자부품노조 위원장 시절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이유로 회사가 인사위원회를 소집해 해고를 결정하는 바람에 나는 해고자 신분이었다. 회사에는 “투쟁으로 원직 복직을 쟁취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경기노련과 전노협 활동을 하면서 복직투쟁까지 할 겨를이 없었다. 해고가 부당하다고 항의해서 받은 해고수당 등은 결국 국고로 들어갔고, 지노위와 중노위는 생략하고 해고무효 소송만 남겨두고 있었다. 법정에서 판사가 원고 양규헌 관련 해고 무효소송 심리를 시작하면서 한마디 했다. “본 해고 건은 원고가 구속 상태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절차상 하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판사가 절차상 문제를 들고 나왔으니 이 싸움은 이기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회사 측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서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재판장님! 원고 양규헌은 지금 전노협 위원장입니다” 밝아 보였던 판사 얼굴이 금세 일그러지며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재판에서 해고가 적법하다고 인정됐다. 그 후 진행된 대법까지 전노협의 ‘위력’이 유지돼 절차상 하자가 있었던 해고는 정당화되고 말았다. 법 절차보다 전노협의 위력이 훨씬 강하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