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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조선노협) 창립(1994년)
조선노협 창립 배경
1990년 전노협이 결성되자 정권과 자본은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민주노조 지도부의 구속·수배·해고는 필수였으며 심지어는 백주대낮에 식칼테러까지 저지르는 한편 노동조합 업무감사, 위원장 직권조인 인정, 일방중재, 긴급조정권 발동 등으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권리까지 묵살하는 비인간적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구속·수배·해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다. 특히 1991년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은 전노협과 연대회의를 사수하다가 목숨을 바쳤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골리앗 투쟁으로 자본과 정권의 탄압에 맞섰다.
조선업종 노동자들은 이러한 투쟁의 경험 속에서 자본과 정권에 맞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는 ‘산별노조 건설’로 모아졌다. 초기에는 ‘민주노조운동 조직발전’이라고 표현되다가 1992년 노동자대회를 기점으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조합원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했으며 지도부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후 부산대학교 문창회관에 모여 ‘영남지역 노동조합 간부결의대회’로 1993년 임단협 승리와 산별노조 건설 결의를 다지고 공동대응을 모색하면서 동질성에 바탕을 둔 조선업종 노동조합 간부들의 모임이 시작됐다.
조선업종 노동자들은 1993년 초부터 위원장단 회의를 비롯한 약 20차례의 간부회의와 3차례의 세미나를 열어 업종별 연합단체의 필요성을 공유했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조합원 대중들과 함께하는 사업을 준비했다.
1993년 이전에도 민주노조 진영의 제조업 노조들은 정보교류 등 일상적인 관계는 맺어왔지만 지역·그룹별로 활동했다. 한국노총 산하 금속노련 내에 조선업종 분과 소속 사업장들은 상급단체에 이미 의무 이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업종연합을 결성해 민주적인 산별노조, 나아가 민주노총 건설의 토대를 구축하고자 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조선노협)를 준비했다.
조선노협 창립 경과
1993년 3월 6일 대우조선, 한진중공업, 코리아타코마, 3개 노조 위원장들이 모여 조선업종 노동조합 간의 연대활동에 대해 논의했다. 이어 4월 10일 영남지역 노조 간부결의대회에 참석한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 코리아타코마노조 대표자들이 모임을 제안했다. 4월 30일,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대우조선노조 최은석 위원장이 정식으로 제안서를 작성해 각 노동조합으로 발송했다. 제안서에서는 첫 단계로 조선업종 지도부 간에 공감대를 형성과 함께 △지도부 교육 △1993년 투쟁의 교섭 체결 시 유효기간의 시기를 같게 해 공동대응 △정권과 자본의 여론 공세에 효과적 대응 △회의의 정례화 △조합원 대중이 산별에 대해 인식하도록 홍보·선전 강화와 조선업종 동질성 부여하기 위한 연대편지 쓰기 등의 사업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져 5월 1일 처음으로 조선업종 노동조합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세미나 계획, 일상 연대활동, 매월 1회 회의 등을 결의했으며, 실무회의를 병행해 보다 발전적인 전망을 세우는 한편 부서장 모임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9월 1~3일 경주에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한진중공업, 현대미포조선, 코리아타코마 노조 등에서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업종 세미나를 열었고, 10월 9~10일에는 부산 송정에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한진중공업, 한라중공업, 코리아타코마, 현대미포조선 노조와 삼성중공업노동자협의회 등에서 82명이 모여 ‘2차 조선업종 노동조합 간부수련회’를 했다. 11월 10일에는 조선업종 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선노협 규약을 확정해 조합원에게 홍보했다.
1994년 1월 6일 국제 조선업종 정책 세미나를 열어 핀란드 금속산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으며, 조선노협 1994년 공동사업 기조를 중심으로 부서별 사업계획을 세웠다. 1월 12일 언론의 공세와 정부의 사전탄압 기도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노협 대표자들은 과천 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1994년 노사관계와 조선노협 탄압 기도에 대한 대통령에게 보내는 질의서’를 발송했다.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 ‘(가칭)조선업종 노동조합 연대회의’라는 명칭을 ‘조선노협 준비위’로 바꾸고 모든 회의를 ‘창립대회 준비위’ 체계로 전환해 대표자회의, 집행위 회의, 부서장단 회의 등을 약 20회가 넘게 진행했다.
조선노협 창립대회
10여 차례의 대표자회의와 창립대회를 위해 수석부위원장급으로 구성한 집행위원회 회의를 7차례 열어 창립에 관한 모든 문제를 총점검하고 실무를 집행했다. 조직쟁의부장단 회의는 대회 사수대와 안내를 준비했고, 교육선전부장단 회의는 대회자료집, 공동유인물, 대회 포스터 제작 등을 담당했으며, 산업안전부장단 회의는 법적 대응을 마련했고, 문화체육부장단 회의는 문화단체와 함께 축하공연 등을 준비했다.
창립 날짜를 정하는 데는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 선거와 겹쳐 어려움이 있었다. 선거 결과의 영향을 고려해 2월 초로 정했던 일정을 12월 11일로 바꿨다가 현대중공업노조 조합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다시 1월 30일로 변경했다. 장소도 부산대학교로 확정했으나 학교측과 교섭을 명확히 하지 못해서 장소 확보에 난항을 거듭하면서 창립대회 15일을 앞두고 부산대학교에서 장소 사용 불허와 동시에 이후 법적 소송까지 하겠다는 내용의 공문을 각 노동조합으로 두 차례나 보내왔다. 준비위는 긴급 집행위를 소집해 총학생회와 함께 대응방안을 모색한 후 창립대회를 사수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수립했다.
대회를 원활하게 치르기 위해 “최대한 학교측과는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고 총학생회에서 장소를 대여했다는 원칙 고수, 교직원들을 동원해 대회장을 봉쇄할 때에는 학생들이 투쟁 전개, 경찰침탈 대비 부산경남지역총학생회연합을 중심으로 사수대 200 대오 구성, 학교측 전기차단에 대비해 발전차 준비, 경찰의 원천봉쇄에 대비 제2의 장소 확보”등을 기조로 잡았다. 이러한 기조를 설정하게 된 것은 조선노협 출범도 중요하지만 조선노협을 이끌어갈 지도부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서다. 정권과 자본이 조선노협을 출범을 미끼로 민주노조 진영의 핵심지도부를 사전에 고립시켜 1994년 임단협에서 정부의 임금억제 정책을 관철하려는 것에 대비한 것이다.
1부 창립 대의원대회는 오전 11시에 구영식 현대중공업노조 수석부위원장의 사회로 시작해 규약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출한 뒤 창립선언문, 강령을 채택하고 1994년 사업계획을 확정했다. 이날 1기 지도부로 의장 최은석(대우조선), 부의장 이갑용(현대중), 백윤선(한라중), 사무총장 조길표(한진중)를 비롯해 회계감사와 운영위원을 선출했다. 오후 2시부터는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오후 3시 40분부터 소리새벽, 부양공투본 문화팀, 노동자문예창작단의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1994년 조선노협 활동
조선노협은 1994년 공동사업의 기조는 △조합원 대중에게 연대의식을 확고히 확인시키고 대중의 요구에 의한 산별노조 건설이 될 수 있도록 정착 △조선노협의 결속력 강화 및 산별노조 체계의 교두보 마련 △조합원의 권익과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1994년 투쟁 성실히 수행 △전국 차원의 투쟁을 내실 있게 받쳐나가며 실천 담보 △단위사업장별 임금 격차 줄이고 고용·산재 등의 열악한 작업환경 및 근로조건 개선 △통일성 담보 위해 지도집행력 강화하고 미가입 조직의 조직화 및 단위사업장별 조직력 강화 등이다. 그리고 △조직력을 담보해낼 수 있는 지도집행력 강화와 상근자 확보 △조선노협 및 산별체계로의 발전을 위한 연구 및 분석 △민주노조 진영의 공동사안 공동대응 △미가입 사업장의 조직화 사업 △고용보장 및 작업환경, 산업재해 추방에 대한 공동대응 △조선노협의 합법성 쟁취와 대국민 및 조합원의 지지 획득 위한 교육·선전·홍보·광고 강화 △정보교류 확대·신속화를 위한 대응책 마련 등을 사업계획으로 수립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조선노협은 1994년에 임단협 갱신투쟁과 한국노총 탈퇴투쟁에 앞장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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