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뉴스레터
..... 이 달의 역사
..... 1988년, 서울운수노동조합협의회 결성 투쟁_김원(116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9-08-05 조회 1255
 

1988년, 서울운수노동조합협의회 결성 투쟁

 

김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어용노조와 열악한 노동조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후 버스노동자들은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자노련) 밑에 주로 조직된 상태였다. 자노련은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을 결성한 직후인 1988년에 85,138명의 조합원(629개 단위노조)이 조직된 상황이었다. 시내버스의 경우 자노련 전체 조합의 45.6%에 이르는 287개 조합에 42,849명 조합원이 소속되어 있었다. 단체협약상 자노련은 유니온 숍으로 1987년까지 모든 조직대상 노동자들은 노조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노조가 어용이어서 노조와 조합원 간의 괴리가 심했다. 이에 노조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발적 흐름이 나타났다. 노동쟁의시 조합원들은 노조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어용노조 문제만이 아니라, 버스노동자를 둘러싼 노동조건도 열악했다. 운수노동자들은 1일 10시간씩 월 27.8일, 주당 64시간 일해야만 했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1988년 당시 제조업 평균 주당 근무시간인 54시간보다 10시간이 많았다. 다음으로 이들은 부양가족이 4~5명인 가장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월 임금총액은 현재 평균 44만4천90원에 불과했다. 이러한 저임금에다가 기본급이 총임금의 60%에 불과한 일당제에 기초한 월급제였다. 세 번째로, 교통사고 발생,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구속되거나 면허가 정지되었을 때, 사고비용, 범칙금, 사용자의 과징금 전가 때문에 발생하는 임금 손실이 전체 임금의 6.3%였다. 또한 진급제도가 없어서 근속년수에 따른 임금상승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직업병, 교통사고로 인한 산재율도 높았다.  

 

노민추와 서운노협 결성 투쟁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버스노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운수업의 경우 1987년에 1,289건의 쟁의가 발생했지만, 버스업종에서는 149건의 쟁의에 그쳤다. 87년 당시 시내버스의 임금협정 만료일이 6월 말이나 7월 말에 종료되었기에 임금교섭 시기가 6월 항쟁을 즈음으로 한 시점에 겹쳐서 임금교섭 도중에 노동자들이 투쟁에 들어간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87년 8월 14일 자노련 중앙상무집행위원회는 노조 측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전국적으로 승무를 거부할 것을 결의했고, 서울 시내버스의 경우 ‘노사교섭 → 서울시 알선 → 지방노동위원회 조정’ 끝에 8월 21일에 11% 임금인상 등 노사합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52개 노조 조합장들이 이에 반발해서 파업을 결의했고 8월 22일, 26개에 달하는 단위노조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1987년 8월 13일, 
대진버스, 삼화여객 기사들의 운행 중단으로 시작된 농성. 출처 : 부산지역 6월항쟁 사진집

 

이처럼 1987년 8.22 총파업에서는 노조의 민주화를 주장하던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의 역할이 컸다. 8.22총파업이 마무리된 다음, 이들은 취업카드 철폐운동 등을 전개해 임금 18.3% 인상, 근속수당, 무사고포상, 교통비, 식대 등을 쟁취했다. 이와같이 투쟁에서 요구를 관철시킨 노민추 세력은 자노련에 맞설 민주노조 상급단체를 건설하고자 했다. 1987년 10월 28일에는 서울 중림동에서 운수노동자협의회를 결성했고 이듬달 11월 26일에는 서울 흑석동 원불교회관에서 ‘취업카드 완전철폐와 운전정밀검사 폐지를 위한 운전자 결의대회’를 개최했으나 조직 역량의 한계로 계속 지속되진 못했다.

 

그러나 1988년 봄, 연장근로수당과 휴일근로수당 착취, 자노련 산하 서울버스지부의 비리가 밝혀지자 6월 24일 서울시내버스 삼양교통노조, 범진여객노조, 신촌교통노조, 아진교통노조 등 10여 개 버스노조 대표들은 서울운수노동자협의회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뒤이어 7월 6일에 드디어 종로성당에서 50여 개 버스노조 5백여 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수노동자협의회(서운노협)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버스노동자들의 진정한 권익쟁취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조직 건설을 결의했다. 

 

서운노협과 조합 활동 

 

7월 18일, 서운노협은 고려대학교 대강당에서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민통련 등의 후원으로 버스임금협상안 철회 촉구 및 전 자노련 조직개편 음모 분쇄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결의 대회에서는 88임금협상안, 전 자노련 조직개편 음모와 우리의 대응, 연장근로수당, 상여금 등 임금착취, 해고노동자,  구속 운전기사 문제에 대해 주제발표와 결의문 채택이 있었다. 또한 서운노협신문을 창간해 단체협약과 임금 협상을 사측과 어용노조에 의해 비밀스럽게 진행하던 관행을 깨고 이를 공개하도록 요구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이듬해인 1989년 2월 17일에는 서울버스지부가 단체협약 요구안을 관철시킬 것을 촉구하는 대회를 개최해 단체협약 요구안의 공개를 촉구했으며, 2월 23일에는 서울버스지부를 방문하여 항의투쟁을 벌였다. 이어 6월 30일에는 89임금인상요구안과 관련한 공청회를 개최하고 <서울시내버스 단체협약 해설>과 <서울시내버스 임금협정서 해설>을 발간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서운노협은 현장 조합원들로부터 높은 지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1988년 11월 1일 서울대원여객 버스노동자들이 연장근로수당 지급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과정에서 이문철, 이창국이 “연장근로수당 지급하라! 부당해고 철회하라! 근로기준법과 단체협약을 준수하라! 회사는 약속을 이행하라!”라는 요구를 내걸고 분신, 1994년 3월 11일 평택 성호여객의 노동자 최성묵이 부당노동행위와 노동 탄압에 항거하여 사측 전무와 같이 분신하는 희생도 따랐다. 이후 서운노협은 1995년에 전국버스노동자협의회로 명칭을 변경해 이어지고 있다.

 
 
 
 
 
목록
 
이전글 땅을 딛고 설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_양규헌(116호)
다음글 혁신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려고 하는 문재인 정부 _양규헌(115호)
 
1025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공릉천로493번길 61 가동(설문동 327-4번지)TEL.031-976-9744 / FAX.031-976-9743 hannae2007@hanmail.net
63206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 250 견우빌딩 6층 제주위원회TEL.064-803-0071 / FAX.064-803-0073 hannaecheju@hanmail.net
(이도2동 1187-1 견우빌딩 6층)   사업자번호 107-82-13286 대표자 양규헌 COPYRIGHT © 노동자역사 한내 2019.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