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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달의 역사
..... 수미다 위장폐업반대 한일 연대투쟁_이재성(107호)
첨부파일 -- 작성일 2018-03-18 조회 1048
 

마산에 위치한 외국인투자기업인 수미다전기는 경영환경의 변화에 따라 갑작스럽게 자본철수를 감행하는 전형적인 다국적기업의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자본 철수에 맞서 노동자들은 국내외를 오가며 장기투쟁을 벌였다. 또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양 국가 간의 국제연대를 실현하기도 했다. 수미다전기노조는 1990년 청산했다. 최종 협상 타결까지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은 총 91명이었다. 수미다전기노조는 외자횡포 분쇄를 위한 수미다 투쟁보고서라는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이 자료집에는 투쟁일지와 평가내용, 합의서나 교육자료 등 핵심 1차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들의 투쟁은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자본의 횡포에 맞선 아세아스와니, 티엔디 등의 사례와 더불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수미다 위장폐업반대 한일 연대투쟁

 

이재성(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마산에 위치한 외국인투자기업인 수미다전기는 경영환경의 변화에 따라 갑작스럽게 자본철수를 감행하는 전형적인 다국적기업의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이 투쟁은 자본 철수에 맞선 노동자들의 장기 투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동시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양 국가 간의 국제연대(19891119906)를 실현한 중요 사례이기도 하다.

 

수미다 전기의 집단해고

1972년 자본금 1억으로 출발한 마산 수미다전기는 회사설립 16년 만에 자본금이 70억으로 급성장했다. 1987811일 노동조합 설립 당시 조합원 수는 2,000여 명이었다. 198810월 경에는 자연감소로 인해 500여 명이 줄어들어 1,500여 조합원이 있었다. 10월 이후 본격적인 인원감축이 시작되었다. 사측은 노조와 협의 없이 희망퇴직자 신청을 받았고, 갑작스러운 라인이동, 부서이동 등을 통해서 조합원들을 불안하게 하여 자진퇴사를 유도했다. 19899월에 한국인 대표이사가 물러나고 일본인 구시노 고이치가 부임했다. 대만 수미다전기에서 경리를 맡았던 구시노는 노조 측의 교섭 요청을 무시하다가 19891014일에 팩시밀리 한 장으로 도산을 통지한 후 450여 조합원을 집단해고했다.

 

집단해고 철회와 민주당 농성

노동조합은 1989111일에 집단해고 철회 및 대표이사 소환 요구를 내용으로 한 진정서를 노동부에 접수하고, 3일에는 임금체불에 대한 고소장을 노동부에 제출했으며, 6일에는 단체협약 및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고소장을 노동부에 접수했다. 조합원들은 상공부 마산수출자유지역관리소와 노동부 마산사무소 등을 항의방문하고, 노총과 야당, 일본영사관과 대사관도 수차례 항의방문 했다. 같은 시기 외국자본의 자본철수 등 유사한 사례들이 많이 발생하여 연대 조직도 생겼다. 1121일부터 129일까지 외자기업 8개 노조 50여 명이 평민당 중앙당사 점거농성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122일에 국회 마창지역 노사분규 진상조사단이 마산에 도착했다. 노동자들은 국회의원들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1213일부터 민주당 백찬기 의원 사무실에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13일 밤 1225분 경, 술에 취한 민주당원 세 명의 행패로 농성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중상을 입고 실신했고, 9명이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회사로 돌아와서 당시 개최되고 있던 마창노련 2주년 행사 전야제에 참석했고, 다음 날인 14일 다시 백찬기 의원 사무실을 점거하였다.

백찬기 의원의 주선으로 1220일 조합원들이 서울에 올라가 김영삼 총재와 약 15분간 면담하였다. 여기서 백찬기 의원의 일본 파견과 일본 사회당 서기장 방한 시에 공동성명서를 발표할 것을 약속받고 점거농성을 풀었다.

 

수미다노동자의 일본 출정투쟁과 본사와 교섭

수미다 노동자들은 직접 일본출정투쟁도 전개했다. 19891115일에 시작된 이들의 투쟁은 199068일까지 이어졌다. 정현숙 위원장, 김순미 부위원장, 박성희 조사통계부장, 정순례 조직차장 등 투쟁단은 일본 내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과 종교계, 지식인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미다 경영진을 고발했다. 국회의원의 호응도 있었고, 일본의 대표적 민주노조인 도쿄도청 수도노조, 국제철도노조, 도쿄동부지역노조협의회 및 기타 노동조합들과 집회 및 지원연대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는 한편, 지역주민들에게 보내는 지지문, 호소문 배포와 주민과 교류하는 모임 등을 펼쳐나갔다. 아사히신문이나 NHK 방송 등 언론매체를 통한 고발도 활발히 전개했다.

일본 원정투쟁에 나선 수미다전기노조 조합원들(c_씨네21)

수미다 본사와 첫 번째 교섭은 19891221일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2264차 교섭으로 결렬이 되었고, 대표단의 무기한 단식농성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1,000명 이상이 지원을 위해 방문하였고, 단식 50시간 만인 1228일에 교섭은 재개되었다. 그러나 199014일에 청산대리인으로 파견된 일본 변호사가 한국에 와서 마산지방노동사무소, 마산지방검찰청, 수출자유지역관리소 등 관계기관을 방문하고 수미다 사태에 사과하며 국내법에 따른 폐업절차를 밝고 퇴직금 2억 원을 은행에 예치하였다. 이것은 노조와의 아무런 협의가 없이 진행된 것이었다.

노조원들이 반발하자 교섭석상에서 사측이 집단해고 철회 후 19902월 말까지의 임금 지급‘31일부로 전원 퇴사라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출정교섭단의 비자시한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 협상안은 겉으로는 양측이 명분과 실리를 챙길 수 있는 대안이었다. 비자연장을 위해서 위원장 등이 차례로 귀국하여 27일 마산 수미다 농성장에서 외자횡포 분쇄를 위한 수미다 본사출정 중간보고 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협상은 쉽게 정리되지 못했다. 1990414일에 두 번째 단식농성이 시작되었다. 이 단식농성에는 신부와 수녀 등 지원자들이 동조단식을 벌였다. 일본 국회의원 41명의 서명이 본사에 전달되었고, ‘한국 여성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여성들의 모임에서도 641명의 항의서명이 전달되었다.

199052일에 노조위원장 등이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리고 511일에 마침내 일본 사장 명의로 된 교섭요청문을 받고 제13차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6822차 교섭을 통해서 집단해고 사과, 생계대책비 39,600만 원, 투쟁경비 3,500만 원 지급 수락등이 포함된 내용에 양측이 합의했다. 1990625일 저녁 수미다 조합원 및 마창지역 노동자 100여 명은 수미다 농성장에 모여 수미다 대표단 환영식 및 투쟁보고대회를 열고 238일 동안의 투쟁을 마무리했다.

수미다 노동조합은 1990811일부터 13일까지 조합원 41명이 참가하는 수련회를 열었다. 최종 협상 타결까지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은 총 91명이었다. 17일에 청산결의 및 회계감사를 끝으로 해산했다. 해산과 동시에 수미다전기 노조는 외자횡포 분쇄를 위한 수미다 투쟁보고서라는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이 자료집에는 투쟁일지와 평가내용, 합의서나 교육자료 등 핵심 1차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들의 투쟁은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자본의 횡포에 맞선 아세아스와니, 티엔디 등의 사례와 더불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2010년 박정숙 감독에 의해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다.

 

 

 

출처

 

김원 외,

 
 
이달역사_수미다_씨네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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